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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문화 마인드

손수호

“국무회의 앞서 책을 이야기하라. 예술가들과 밥 먹으면 비전의 등불 환해진다”

중학교 때 유신이 단행됐다. 교감 선생님이 훈시를 했다. “민주주의가 좋긴 하지만 서양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10월 유신은 그걸 우리 실정에 맞춘 것이다. 제군들은 알겠나?” 철부지 제군들이 알리가 있나. 교감은 비유법을 썼다. “옷이 아무리 좋아도 몸에 맞지 않으면 불편한 것이다. 그렇지 않나?” 귀에 쏙 들어왔다. 유신은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고등학교는 아예 병영이었다. 학생회 대신 학도호국단이 생겼다. 각반을 찬 채 플라스틱 총으로 제식훈련을 했고, 수류탄 던지기로 체력장을 봤다. 그러던 중 사회 선생님의 어록이 은밀하게 돌았다. 그는 복음처럼 암송하던 국민교육헌장을 씹었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고? 개인은 단지 부모의 뜻에 따라 태어날 뿐이다”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이라고? 이건 전체주의다!” 머리가 쭈뼛 섰다. 

지난주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사를 읽으면서 묘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아버지의 문법과는 달랐다. “국민 개개인의 행복의 크기가 국력의 크기가 되고… 국가가 아무리 발전해도 국민의 삶이 불안하면 아무 의미 없어… 이제 국가와 국민이 동반의 길을 걷고 국가 발전과 국민행복이 선순환의 구조를 이루는 새로운 시대의 출발선에 서 있습니다.” 국민과 국가의 관계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분명 역사의 진보가 있었다. 

경제부흥, 국민행복과 함께 등장한 문화융성도 놀랍다. ‘문화’가 처음으로 3대 열쇠말이 된 것이다. 다만 문법은 경제부흥과 문화융성이 국민행복으로 이어지는 순서가 자연스럽다. “21세기는 문화가 국력인 시대입니다… 생활 속의 문화, 문화가 있는 복지, 문화로 더 행복한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인류평화 발전에 기여하고 기쁨을 나누는 문화의 시대를 열어가겠습니다.” 지난 삼일절 기념식에서도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는 김구 선생의 문화국가론과 유사하다. ‘백범일지’는 이렇게 기록한다.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인류가 불행한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진정한 평화가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대통령에게 주문할 것은 스스로 문화를 즐기라는 것이다. 문화예술이라는 것이 시간이 나면, 돈이 생기면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생활 속에 녹아들어야 한다. 정책이나 예산의 산물로서가 아니라 개별적이고 주체적인 삶에서 실현돼야 값지다. 문화가 주는 즐거움과 기쁨, 만족의 총체가 국민행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속이 상하거나 화나는 일이 생기더라도 문화적 삶을 영위하면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비전의 등불이 켜진다. 

물론 대통령 자리가 마냥 문화활동에 빠질 수 없음을 안다. 중요한 것은 문화 마인드다. 그래서 두 가지만 권하고 싶다. 먼저 국무회의나 청와대 간부회의를 주재하면서 허두에 주말에 읽은 책 이야기를 해보라. 효과는 금방 나타날 것이다. 책은 문화의 원형을 담고 있어 수많은 콘텐츠를 파생시킨다. ‘레 미제라블’에서 보듯 이야기를 담은 책에서 뮤지컬과 영화가 나온다. 책 읽는 분위기는 지적인 사회, 품격 있는 나라를 만든다. 영화나 공연 이야기를 해도 좋겠다. 

또 다른 제안은 문화예술인과 자주 밥을 먹는 일이다. 문인과 화가, 음악인, 춤꾼과 같은 사람은 에너지가 넘친다. 좀 엉뚱하긴 해도 정치적 야심이나 자리에 대한 욕심이 없기에 듣기 좋은 말이나 하는 부류와 다르다. 그들과 나누는 세상 이야기는 흥미롭다. 단체장들 모아 하나마나한 소리 듣는 것은 아니함만 못하고, 분야별로 색깔이 뚜렷한 5명 정도가 알맞다. 아티스트들은 늘 미래를 이야기하기에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다듬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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