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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과 문화 블랙홀

예진수

‘레이디(lady)’란 말은 중세 이전에는 빵을 반죽하는 사람을 뜻했다. 지금은 여성의 품격이 느껴지는 의미로 말의 권위가 상승돼 있다. ‘명작(masterpiece)’도 유럽 중세시대 숙련공이 길드에 입성하기 위해 만든 우수작을 칭하는 말이었다. ‘레이디’ 못지않게 위상이 격상된 말이 ‘명작’이다. 길드의 장인은 명작을 만들지만 한 분야에만 정통하다. 현대에서는 자기 분야에만 몰두하는 사람을 ‘전문바보’라고 한다.

‘전문바보’에서 탈출하기 위해 찾아갈 곳이 뮤지엄이다. 미술작품 속에는 역사, 정치, 풍속이 다양한 방식으로 녹아 있다. 시공간의 경험을 확장시켜 주는 미술감상은 삶의 방향이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균형추를 잡아준다. ‘인상파 그림의 숨은 보고’인 영국 런던의 코톨드 인스티튜트 갤러리를 내가 찾았을 때, 사람들이 모여있던 곳은 마네의 전설적 작품 ‘폴리 베르제르의 바’였다. 이 그림 속 바텐더의 표정은 실로 ‘모나리자’ 못지않게 미묘하다. 마주하고 있으면 시간이 흐르는 것을 잊게 된다. 망원경을 꺼내 그림의 디테일을 뜯어보았다. 그림의 왼쪽 아래 빨간 포도주병 라벨에 ‘마네(Manet 1882)’ 라는 서명이 보인다. 우리나라 19세기 책가도(冊架圖·서가) 그림에서 그림 모퉁이 인장에 화가의 이름을 새겨 넣었던 것과 유사한 일이다. 요즘 한국의 결혼식장에서 하객용으로 제공되는 포도주병 라벨에 신랑·신부 사진을 붙이는 유행을 보면, 붉은 술병의 마네 서명이 떠오른다.

‘내 인생의 미술관’ 톱 5의 한 곳이 뉴욕의 클로이스터(중세) 박물관이다. 복잡한 맨해튼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지하철을 타고가면 클로이스터의 목가적 풍경에 이른다. 메트로폴리탄 부속의 중세미술관이다. 지하층에 전시된 12세기 베리 세인트 에드먼드의 십자가가 아우라(광채)를 발산한다. 죽음의 수렁에서 빠져나와 이 십자가 끝에 매달려 가까스로 구원되는 아담과 이브의 조각상에서 현대 미술품 못지않은 중세의 신선한 발상에 놀라게 된다. 클로이스터는 프랑스 남부의 중세 수도원 5곳을 옮겨다 지은 수도원 콤플렉스다. 클로이스터가 세계적 미술관이 되기까지 록펠러가문의 기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문화에 활력을 가져다 준 패트런(후원자)의 역할이 혁혁하다. 

좋은 미술관은 통상적인 관광 코스를 바꿔놓는다. 일반 관광객들의 발길은 별로 닿지 않지만, 런던의 코톨드 갤러리와 뉴욕의 클로이스터 미술관, 모스크바의 트레차코프 미술관 등은 미술관 순례자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코스다. 트레차코프 미술관에서 본 크람스코이의 ‘미지의 여인’은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실제 모델인데 이 여인의 신비스러운 표정도 도저히 잊을 수 없다. 

베이징 고궁 박물관에도 명작이 많다. 장택단의 청명상하도는 뒤늦게 발견된 걸작이다. 중국 최고 문화재로 등극한 이 그림에는 고려인 상인 행렬도 등장한다. 이 작품은 전시되기만 하면, 몇 시간이나 줄을 서야 할 정도다. 한국은 지난해 외래관광객 1000만 명 시대를 맞았다. 하지만 그들이 꼭 가야 하는 미술관 혹은 줄을 서서 보고 싶은 명작을 전시한 미술관이 없는 것 같다.

서울 소격동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6월 11일 준공 후 11월 개관한다. 구태의연한 내수용 전시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미술관이 해외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거대한 블랙홀이 되려면 정보·문화 인프라 확충이 필수적이다. 세계인들이 그 작품 때문에 서울을 찾도록 하는 명작을 현대미술관에 상설 전시해야 한다. 이는 한국 문화 르네상스의 첩경이다.

- 문화일보 2013.03.21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3032101033030025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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