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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정철훈] 고려극장의 한글대본

정철훈

1991년 3월 재소한인 취재차 중앙아시아에 갔을 때의 일이다.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를 경유해 남쪽으로 40㎞쯤 내려가자 재소(在蘇) 한인 콜호즈 마을 ‘양기바자르’가 나왔다. 이주 1세대인 김기철옹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바라크를 연상시키는 비좁은 김옹의 판잣집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설 즈음, 그는 자신이 쓴 ‘이주초해’를 낡은 궤짝에서 꺼내 보여주었다. 1937년 가을, 스탈린의 강제이주명령에 따라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재소한인들의 중앙아시아 정착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한 수기(手記)였다. 자료가치를 한눈에 알아보고 베끼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공항으로 이동할 시간이 빠듯한 나머지 “빌려가서 복사한 후 돌려주겠다”고 제안했으나 김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석한 일이었다.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낸 이유는 이달 중순 중앙아시아 고려인 희곡문학작품집 ‘까레이스키 공연예술의 꿈’(국학자료원) 출간 기념모임에 갔다가 들은 얘기 때문이다. 작품집을 엮은 국제한인문학회 김종회 회장은 “애초 목표카자흐스탄 고려극장의 희곡작품을 모두 수집해 자료집으로 엮는 것이었으나 작품들을 무상으로 인도받기 힘든 상황이어서 기존에 수집한 자료를 묶는 수준에 만족해야 했다”고 아쉬워했다.

알다시피 고려극장은 193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문을 연 이후 재소 고려인(‘한인’을 의미하는 러시아어인 ‘까레이츠’와 연계시켜 ‘고려인’이라고 통칭)의 생활터전인 콜호즈와 솝호즈를 순회하며 끊임없이 공연을 이어오면서 고려인 문화의 중심 역할을 맡아왔다. 홍범도 장군 역시 1937년 카자흐스탄에 정착한 이래 1943년 크질오르다시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고려극장 경비로 있었다는 것은 고려극장의 중요성을 말해주고도 남는다. 고려극장의 활약상은 1937년 강제이주를 겪고도 이듬해부터 바로 공연을 재개한 것은 물론 1941∼43년 벌어진 독·소 전쟁 시기에도 작품을 무대에 올린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작품집엔 작가 조명희가 연해주로 넘어가기 전 한반도에서 창작한 희곡 파사(婆娑·1923)를 비롯해 연성용의 ‘동창생’(1948), 태장춘의 ‘둥굴소는 어떻게 새끼를 낳는가’(1953), 김광현의 ‘뉘 탓인가?’(1957) 등 16개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미처 수집하지 못한 희곡 가운데 제목만 알려진 작품은 부지기수다. 그중에서도 한국전쟁을 다루고 있는 태장춘의 ‘38선 이남에서’(1950), 전동혁의 ‘모란봉’(1961), 한진의 ‘폭발’(1986) 등은 강제이주를 다룬 작품들과 더불어 빠른 시일 안에 수집되고 연구되어야 할 작품들이다. 한글로 창작된 고려인 문학뿐 아니라 한글로 창작된 재중교포 문학도 엄연히 한국문학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때 국가 차원에서 이들 작품을 수집하려는 노력은 참으로 시급하다. 문제는 고려극장 측의 대본보관환경이 열악한 것은 물론 상당수는 개인소장이어서 자료 제공의 대가로 소액이나마 금전적인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알기론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문화부 국제교류과장으로 있던 1989년 9월 ‘한민족체전’이 열려 300여명에 달하는 재소동포들이 생애 처음으로 남한 땅을 밟는 감격을 누렸다. 정상진 전 북한문화성 제1부상, 김막심 소련과학원 회원, 한막스 모스크바 청년대학 교수, 황마이 알마티체육대학 부총장, 작가 아나톨리 김, 북한 고위 간부 출신 허진 등 재소동포 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을 현지에서 접촉해 초청 범위를 확정짓는 실사단의 한 명이 유 장관이었다. 이들이 숙소에서 밤을 지새우며 이야기꽃을 피울 때 자정 넘어서까지 방문을 노크하며 불편한 점은 없는지 살피던 유 장관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유 장관이 국제교류과장 시절 만났던 재소동포 지도급 인사 가운데 생존한 이들은 이제 열 손가락에 꼽기에도 어려울 지경이다. 서둘러야 한다. 현지 사정을 고려할 때 이주 2∼3세대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자료를 내놓기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일일 것이다. 유 장관이 현실적인 대책을 마련하길 기대해 본다. 

 

-국민일보2013.03.28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7027881&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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