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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point] 높이도 모르면서 황룡사탑 복원한다?

배한철

자장 법사가 중국 태화지를 지나는데 신인이 나타나 '그대 나라는 여자가 왕위에 있어 위엄이 없으니 9층탑을 세우면 9한이 조공할 것'이라고 했다. 신라는 백제에 요청해 명인 아비지(阿非知)를 데려왔다. 아비지는 기둥을 세우는 날 백제가 멸망하는 꿈을 꾸자 공사를 중단했다. 

이내 대지가 진동하면서 깜깜해지더니 노승과 장사가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기둥을 올리고 사라졌다. 

삼국유사 탑상편 중 한 대목이다. 경주 황룡사 9층탑은 지금 남아 있지는 않지만 `호국불교의 상징`이자 `고대 건축의 최고봉`으로 우리 가슴속 깊이 새겨져 있다. 

고려 중기 문인 김극기가 '(탑 위에서)동도(東都)를 내려다보니 집들이 벌집처럼 아련하다'고 읊을 만큼 탑은 하늘을 찔렀다. 이로 인해 선덕여왕 19년(645년) 탑이 완성된 뒤로 신라와 고려에 걸쳐 무려 5번이나 벼락 피해를 입었다. 

탑은 성덕왕 19년(720년), 경문왕 12년(872년), 고려 현종 13년(1021년) 등 세 차례 다시 만들었다. 그러다 고종 25년(1238년) 몽골군에 의해 탑과 대불(大佛)인 장육존상, 절의 전각들이 잿더미로 변했다. 

탑을 포함해 황룡사를 복원ㆍ정비하는 사업이 2000년 착수돼 13년째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이 사업을 주관하는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사찰 정문인 중문과 그담장 일부만 되살리는 것을 전제로 실시설계를 수립 중이다. 

배병선 문화재연구소 실장은 '학술대회 등을 통해 논의를 거듭했지만 현 단계에서 목탑 복원이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탑 중건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드세다. 애초 원형으로 삼은 것은 경문왕대에 중건된 탑이다. 이때 금동사리외함에 중수 사실 등을 새긴 찰주본기가 지금까지 전해져서다. 

그렇지만 탑 구조를 유추할 수 있는 문헌은 찰주본기를 포함해 사실상 전무하다는 게 문제다. 

경주 남산 탑골 마애조상군에 새겨진 9층탑이 황룡사탑으로 거론되지만 개략적인 겉모양일 뿐 속구조를 알 방법은 없다. 안압지, 월성해자에서 공포부재 등 당시 건축기법을 짐작할 수 있는 유물이 다수 출토됐다지만, 그야말로 참고용에 불과하다. 

현존하는 탑 중 황룡사탑과 흡사한 것은 중국 불궁사 석가탑(1056년 건립)과 7세기께 백제가 지어줬다는 일본 법륭사 오중탑(五重塔)을 든다. 

불궁사 탑은 각 층이 비어 있어 불상을 모셔놓고 사람 출입도 가능한 반면 오중탑은 내부가 막혀 있다. 

삼국유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 침략을 진압할 수 있다.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 9층은 예맥'이라고 쓴 것으로 미뤄 황룡사 탑은 불궁사 탑처럼 각층별로 별도 공간이 마련돼 호국을 기원하는 불상들이 모셔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불궁사 방식은 태풍에 매우 취약하며 오중탑 형태는 하부 목재가 수백 t에 달할 하중을 견디기 어렵다. 

높이 측정도 고민거리다. 삼국유사에는 그 높이가 225자라고 적고 있다. 

고구려척(尺)이 쓰였다는 의견과 함께 당시엔 당척(唐尺)이 보편적이라는 견해도 제기된다.
고구려척(35.6㎝)을 적용하면 80m, 당척일 땐 67m가 된다. 

구조적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맨 아래층 면적이 상대적으로 넓어야 하는데 1층과 2층 바닥면적을 동일하게 해야 하는지를 두고도 의견이 분분하다. 

과연 이처럼 제대로 고증도 안 된 탑을 무리하게 짓는 게 능사일까. 잘못된 복원은 흉물로 비난받는 미륵사지 동탑(東塔) 하나로 충분하다.  
 





-매일경제2013.05.15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3&no=374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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