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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의 운영과 정체성 문제- 서울관 개관 전 파문을 우려하며

윤익영

국립현대미술관의 운영과 정체성 문제

- 서울관 개관 전 파문을 우려하며 

 

윤익영/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장

 

 

지금 전시 중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전이 열리자마자 여러 단체의 미술인들이 경악과 함께 허탈감에 빠져 서울관의 전시 및 운영상의 문제점을 들어 관장의 퇴진 등을 촉구하는 규탄대회가 있었다.

(사)한국미술협회 회원들과 미술단체 대표들로 구성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파행사태를 바로잡기 위한 범 미술인 대책위원회’는 “서울관 개관전은 미술인의 열망과 바람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현대미술 현장의 다양성을 파기하면서 조직 이기주의적 독선과 불통의 폐쇄행정만 난무하고 있다.”면서 그 사례를 <자이트가이스트-시대정신> 전을 들었다. 이러한 비판과 공감하며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코자 한다.

 

■ “대중 친화적인 미술관으로서 동시대 시각예술을 만날 수 있는 현장이자, 대중에게 열린 미술관으로 기능하도록 설계된”(정형민 관장, 인사말 중에서)에 대하여

대중을 맞이하는 첫마디가 “자이트가이스트 - 시대정신”이다. 31년 전에 베를린에서 열렸던 한 전시회 명칭인 ‘자이트가이스트’를 과연 일반대중이 얼마나 알고 전시장을 들어섰을까. 전혀 대중친화적인 용어가 아니라고 본다.

반면, 외국인들을 위해서 ‘Zeitgeist-Korea’라 했다. 우리 대중들이 ‘자이트가이스트’가 무슨 뜻인지 모를 수도 있음으로 친절하게 그 뜻이 ‘시대정신’이라고 가르쳐주기 위해서 인지 “자이트가이스트 - 시대정신”이라 했다. 국문으로 표기한 이 전시명칭만 봐서는 그 시대정신이 ‘한국의 시대정신’이란 것을 전혀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외국인들에게는 ‘Zeitgeist-Korea’라고 표기해 ‘한국의 시대정신’이라 했다. 모국어만 아는 대중은 여러 면에서 무시당했다. 그런 대중은 전시 알맹이는 보지 못해도 되니, 그저 접근성 좋고 탁 트인 새 건물과 주변 풍광만으로도 족하라는 것처럼 느껴진다. 미술관 측은 물론 이런 의도에서 “대중 친화적인 미술관”이라고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알레프 프로젝트>가 무슨 말이지 아는 대중은 또 얼마나 될까. 그렇지 않아도 우리 사회에서는 “현대미술은 봐도 잘 모르겠다.”며 외면하는 대중들이 상당한데 그런 난해한 미술을 설명하는 말조차도 평범하지 않으니, 그저 대중에게 “(너무 알려하지 말고) 맘대로 상상하면 그것도 좋은 겁니다.”, “글은 무슨 뜻인지 몰라도, 보이는 현상을 보세요.”라며 대중을 대하는 것 같아 불통을 호소한다.

과연 히브리어의 첫 글자라는 ‘알레프’를 아는 대중이 얼마나 될 것이며, 그것을 다룬 보르헤스 문학을 음미했거나 그의 (서구 지성들의 키워드들로 구성된) 난해한 문학세계가 서울 경복궁 옆의 국립미술관 서울관 개관 전을 찾은 대중들에게 얼마나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는지 의문스럽다.

 

■ <자이트가이스트(Zeitgeist)>와 한국현대미술 정신에 대하여

<자이트가이스트 - 시대정신>의 전시취지는 한국전쟁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현대미술의 시대정신을 역사적으로 접근하여’ 조망해 보려는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기획자는 “1980년대 초반, 독일의 신표현주의를 비롯하여 이탈리아와 미국 등 일련의 형상적/서사적 회화 작품들의 국제전인 전시를 ‘자이트가이스트(Zeitgeist)’라 부르며 유명해졌고, 본 기획자는 정확하게 그 명칭을 차용했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로 지금까지, 60년이 넘는 한국현대미술의 시대정신을 31년 전에 베를린에서 불과 45명의 신표현주의 경향의 작가들이 참석했던 <자이트가이스트(Zeitgeist)>의 이름으로 조망해 보려한 것은 매우 안이한 태도였으며, 정서적으로도 학술적으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점을 남겼다.

<자이트가이스트>가 열렸던 곳은 마틴 그로피우스 바우(Martin Gropius Bau)로서 이 건물은 나치정권 때 게슈타포(비밀경찰)가 사용했던 곳으로 1982년 당시는 정면 출입구가 베를린 장벽에 가려져 후문을 사용 했던 만큼 독일의 이념분단을 실감케 하는 건물이었다. 이번 개관 특별전이 열리는 서울관이 국군기무사령부 건물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도 이번 전시취지와 초점이 맞지 않는다.

전시의도가 이념분단에서의 한국현대미술을 조명하려 했다 해도 전시내용과 일치하지 않으며, 그가 밝힌 대로 한국현대미술의 시대정신을 역사적 맥락에서 조망하려 했다 해도, 굳이 일반대중이 잘 모르는 <자이트가이스트>란 명칭을 왜 빌려 왔는지 그 의도가 불투명해 진다.

그러다 보니 전시작품의 선정과 전시구성(디스플레이)에서 주제상실증과 산만함을 나타냈다. 언제, 어디서, 누가, 왜, 무엇을, 어떻게, 미술작품으로 시대정신을 나타냈는지 해설문도 없으며, 기획자 스스로도 <자이트가이스트> 본래적 태도와 어긋난다는 추상미술, 미니멀리즘, 개념예술을 한 장소에 희석시켜야 할 명분을 희석시켜 놓았다.

미술사적 맥락 속에서나 고유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자이트가이스트>를 빌려와 일반적 의미의 ‘시대정신’으로 쓰는 바람에 주제의 초점이 흐려졌다. 전시작품의 배치는 어떤 시대나 양식적 분류의 기준조차 없이 들쭉날쭉 배열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작품선정의 기준이 흐려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작품선정 과정이 인맥과 학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은 뻔하다.

 

■ 국립미술관의 본분에 대하여

그 결과 주제상실증과 편협한 한국현대미술의 시대정신가 제시되었다. 이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서 마땅히 피했어야 했다. 나라를 대표해서 한국현대미술의 역사와 정신, 한국현대미술의 정체성을 제시하는 전시였다면 매우 신중했어야 했다.

반세기가 넘는 60년의 한국현대미술 역사와 향방을 조망하는 주제를 일개인의 기획에 맡기고 ‘큐레이터의 독립성 존중’을 운운하는 것은 국립미술관으로서 취할 자세가 아니다. 그러한 의식이 살아 있는 한, 지엽적이고 미숙한 상아탑과 관료주의, 오만과 독선의 국립미술관으로 만들 수 있다. 이 전시는 국내외에 한국현대미술의 정신과 정체성에 대한 오해와 혼란을 갖게 하였고, 국내의 미술인들에게는 실망과 위화감을 갖게 했다.

국립미술관의 역할은 사립미술관과 달라야 하며, 전시 운영에 있어서 마땅히 사적인 편견에 치우치면 안 된다. 사설 미술관이 아니다. 화단 전체를 생각해야 하며 대중의 미술취미를 고루 고려하여 취미의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 국립미술관의 책임자는 자신의 모든 사적 가치관과 사적인 취미, 사적인 관심사를 포기하고, 그 너머의 미술계 보편성을 따라야 한다.

대중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립미술관은 무엇보다 ‘장르의 서열화’와 ‘대중취미의 서열화’를 억제해야 한다. 미술계에서 통하는 소위 ‘구상화’, ‘추상화’, ‘설치미술’, ‘비디오 아트’, ‘입체예술’ ‘영상매체’ 등의 유행에 따라 특정분야를 따라 다니는 경향을 저지해야 한다.

예로서 40여 년 전의 ‘구상화’도 여전히 대중에게는 친근하고 정겹고, 예술적 가치가 결코 없는 것도 아니고, 저급한 것이라고는 더욱 더 말할 수 없으며, 미술사적 가치가 없는 것도 아닌 동시대의 미술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후지고 한물 간’ 장르 취급되는 풍조를 앞장서서 피해야 하는 것도 국립미술관의 본분 가운데 하나이다.

 

■ 어제 없는 오늘의 알맹이는 없다

개관전의 정신과 의의에 대한 미술관의 인식도 문제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국가 문화예술을 대표하는 기관으로서, 폭 넓은 안목으로 미래를 지향점을 제시해야 한다. 미술인들이 염원했던 서울관 개관 특별전만큼은 한국현대미술을 이끌어 온 다양한 분야의 미술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한국현대미술의 다양성도 대중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어야 했다. 그런 연후에도 얼마든지 미술관의 장단기 계획에 따른 전문적 ‘기획전’들을 펼쳐 나갈 수 있었다.

 

한국미술평론가협회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미술관 행정의 목적과 의의를 짚어보고, 보다 발전적이고 바람직한 미술관으로 거듭나기 위한 길을 모색코자 이번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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