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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품은 산… 혼 풍경이 되다

도재기

ㆍ원주 지정면 산꼭대기 미술관 ‘산’

▲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미술관, 건물 자체가 작품이다
백남준 작품 전용 전시실 등 갤러리에서는 전시회가 이어지고
건물 밖에서는 조각품들과 자작나무 숲이 반긴다
팍팍한 일상을 비우고 떠난 여행, 자연과 예술로 깨어나는 오감


‘안쪽은 완전히 어둡습니다. 자기 몸으로 공간을 읽으면서, 천천히 들어가셔야 해요. (…) 여자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암막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알게 되었다. 암흑이 검은 죽처럼 몸을 감쌌다. (…) 이런 어둠. 눈은 무용하다. 손으로 벽을 더듬다보면 손가락 끝에 눈이 생기고 발이 몸을 이끌어간다. (…) 저도 그 작품 참 좋아해요. 태양 아래서보다는 어둠 속에서 더 멀리, 더 깊이 볼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공간이죠. 어떤 사람은 그 안에서 처음으로 진짜 자기 자신을 보았다고 말하기도 하더군요.’(정미경의 단편소설 ‘남쪽 절’에서) 

미국의 설치작가 제임스 터렐(72)의 설치작품이 소설 속에선 이렇게 표현됐다.

‘빛과 공간의 예술가’로 유명한 터렐의 작품을 체험한 사람은 체험 전에 비해 겸손해진다. 자신, 나아가 인간이 지닌 시각과 지각, 인식의 한계를 아프지만 처절하게 깨닫기 때문이다. 특정 공간과 빛을 활용한 그의 작품은 우리가 평소 눈으로 보는 것이, 지각·인식하는 것이 얼마나 부실한지를 알려준다. ‘본다’는 것, ‘보이는 것’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예술작품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평범한 일상, 사물, 통념을 낯설게 함으로써 그것들을 의심하고, 다시 사유하게 하는 것이리라. 

겨울을 맞아 눈이 쌓여 있는 ‘뮤지엄 산’의 입구 ‘플라워 가든’.


하늘에서 본 ‘뮤지엄 산’ 전경.


바쁘고 번잡한 일상을 벗어나 찬바람이 부는 날, ‘뮤지엄 산(SAN)’(강원 원주시 지정면 월송리)을 찾았다. 미술관 ‘산’에는 다양한 장르의 미술품이 있지만 터렐의 작품들로 구성된 아시아 최대의 상설 ‘제임스 터렐관’도 있다. 고속도로를 피해 한강을 끼고 가는 덕소와 팔당, 그 한강을 만든 남한강·북한강이 하나된 두물머리(양수리), 이어 남한강변으로 이어지는 국도를 택했다. 도심의 메마른 겨울이 아니라 제대로 오롯한 겨울을 느끼기 위해서다.

눈 쌓인 겨울산은 쓸쓸하지만 사색적이다. 특히 앙상한 겨울 나무들은 자코메티의 조각 같다. 그의 작품은 허위, 욕심 같은 것들을 다 내버리면, 맨 마지막으로 남을 인간의 모습, 본질을 담은 듯해 좋다.

미술관은 스키장·골프장·콘도미니엄으로 이뤄진 복합리조트 ‘오크밸리’ 안에 있다. 남산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자리한 미술관은 2013년 5월 개관했지만 “산꼭대기의 미술관”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설계” 등으로 알음알음 꽤 알려져 있다. 국내 컬렉터 1세대인 한솔그룹 이인희 고문의 소장품을 기반으로 ‘한솔 뮤지엄’으로 개관했다가, 지난해 공공성을 강조하며 이름을 ‘산’으로 바꿨다. ‘산(SAN)’은 자연 속 공간에 예술품을 품고 있는 미술관 특성을 살려 ‘Space(자연과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 ‘Art(예술작품)’ ‘Nature(미술관과 미술관을 둘러싼 아름다운 자연풍광)’를 뜻한다.

미술관 주차장에 들어서는 길부터 목적지를 보일 듯 말 듯하게 숨기는 안도의 건축 철학, 특징이 드러난다. 둥그런 돌담을 따라 느릿하게 들어서야 하는 것이다. 안내센터를 지나면 돌담 사이로 널찍한 마당이 보이고, 그 마당엔 높이 10m, 폭 15m의 강철빔으로 된 조각가 마크 디 수베로의 키네틱 작품이 바람에 따라 움직인다. 지금 마당엔 발목까지 빠지는 눈이 쌓였지만, 다른 계절엔 수십만송이의 패랭이꽃 등이 만발한 화려하고 드넓은 꽃밭이다. 그 ‘플라워 가든’을 지나면 자작나무 숲이다. 희고 부드럽고 매끈한 자작나무 껍질을 살며시 만져본다. 자작나무를 ‘아낙네 살결보다 희다’고 표현한 소설가 정비석의 글을 떠올리면서. 

자작나무 숲길을 지나 돌담장을 돌아서는 순간, 번쩍 시야가 확 트이며 미술관이 나타난다. 산봉우리들을 빙둘러 배경 삼아 나지막이 아늑하게 서 있다. 건물 입구로 가는 외길 양쪽은 원래 ‘워터 가든’이란 이름의 얕은 연못이지만 지금은 얼어붙었다. 관람객은 알렉산더 리버만의 조각품 아래를 지나 건물로 들어선다.

리버만 작품 뒤로 ‘뮤지엄 산’ 본관이 보인다.


미술관의 ‘플라워 가든’을 지나면 펼쳐지는 자작나무 숲길.


본관 외벽은 경기 파주의 파주석으로 자연스러운 느낌이 물씬 나고, 내벽은 안도의 또 다른 건축 특징인 노출콘크리트다. 차갑게 느껴지는 회색 콘크리트벽을 만지면 의외로 자작나무 껍질같이 부드럽다. 20여번의 손질 덕분이다. 2층의 건물은 종이전문박물관이었던 ‘한솔종이박물관’을 모태로 한 ‘페이퍼갤러리’, 이인희 고문의 호를 딴 ‘청조갤러리’로 이뤄졌다. 청조갤러리는 4개의 전시실인데 그 중 원형 전시실은 백남준 작품 전용공간이다.

건물 자체도 작품이다. 네모, 원, 세모 형태가 골고루 녹아있고, 곳곳에 드러나는 꺾임과 꺾임이 만들어내는 각의 맛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자연채광을 이용한 간접조명도 편안하다. 특히 전시실을 옮겨 다닐 때마다 널찍한 창밖으로 최고의 걸작인 자연풍광을 느낄 수 있다. 창틀이 곧 캔버스다. 페이퍼갤러리에선 실제 파피루스가 자라는 온실을 비롯해 종이의 탄생,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국내외 유물을 볼 수 있다. 청조갤러리에선 3월1일까지 김환기·이중섭·박수근을 비롯한 근현대 미술가, 소설가·디자이너·만화가 등 문화예술인 113명의 드로잉·스케치 270여점으로 구성된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본관 건물을 나서면 조지 시걸의 조각 ‘두 벤치 위의 연인’, 그 뒤로 신라고분을 소재로 한 9개의 돌무더기로 구성된 ‘스톤 가든’, 돌무더기들 사이로 헨리 무어·베르나르 브네 등의 조각품이 있는 야외 산책길로 들어선다.

본관 뒤 조지 시걸의 ‘두 벤치 위의 연인’


제임스 터렐의 작품 ‘간츠펠트’ | 뮤지엄 산 제공


산책길의 끝이자 미술관 동선의 마지막 부분의 지하에 터렐관이 있다. ‘남쪽 절’ 속의 작품과 가장 비슷한 것은 어둠 속에서 빛으로 환영을 경험하는 작품 ‘웨지워크(Wedgework)’다. 터렐관에는 또 눕거나 앉아 수시로 변하는 하늘의 색깔을 보며 어느 게 진짜 하늘인지 헷갈려 눈을 의심하게 되는 ‘스카이스페이스(Skyspace)’, 공간감 같은 인간 지각의 부실함을 깨우치는 ‘간츠펠트(Ganzfeld)’, 회화인지 진짜 하늘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 결국 계단을 올라선 뒤에야 알게 되는 진실에 아찔한 전율을 느끼는 ‘호라이즌(Horizon)’도 있다. 터렐 작품은 해가 질 무렵 진행되는 ‘일몰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보다 온전하게 체험할 수 있다.

보고 듣고 느끼며 오감을 일깨우고 미술관을 되돌아 나오는 길. 총 4㎞에 이르는 동선이지만 뿌듯하다. 모처럼 디지털 시간을 벗어나 아날로그 세상의 느릿함, 겨울 자연, 예술가의 뜨거운 혼을 만끽하니까. 문득 한 지인의 자문자답이 새삼 떠올랐다. “대나무가 왜 부러지지 않고 곧게 뻗으며 예쁘게 자라는지 아냐. 마디 때문이지. 사람도 살아가면서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 그런 마디를 만드는 게 좋아.” 어쩌면 이 겨울여행이 뿌듯한 것은 서민의 팍팍한 일상을 벗어나 길을 나선 용기, 한번쯤 그 마디를 만들려는 내 의지가 대견해서이지 싶다. ‘뮤지엄 산’ 문의는 (033)730-9000.


원주 | 도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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