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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광장]아름다운 사람들

황주리

며칠 전 새벽, 침몰한 원양 어선에 관한 라디오 뉴스를 들으며 잠에서 깼다. 운 좋게 살아난 사람들도 있고 고인이 된 사람들도 있고, 실종자도 적지않다는 슬픈 소식이었다.

순간 엉뚱하게도 몇 해 전 텔레비전에서 흐릿한 영상으로 본, 잊히지 않는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선교 활동을 하러 중동지역에 갔다가 알카에다에 끌려가 감금된 한국의 한 젊은이가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공포에 떨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이었다.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나는 문득 그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몇 년 전,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근교, 성지 순례지 중의 하나인 기적의 암벽 교회에 가본 적이 있다. 어느 날 뉴스를 보니 거대한 암벽들이 아래로 굴러 떨어져 수많은 교인이 깔려 목숨을 잃었다. 그 많은 시련을 통해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일까. 공교롭게도 그날 아침 자리에 누운 채 이리저리 다이얼을 돌리던 중 라디오에서 문득 이런 말이 흘러 나왔다.

“난 평생 신을 찾아 헤맸소.―그러나 내가 찾아낸 것은 고통받는 인간… 무정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뿐이었소.―그리고 죽음의 다음은?―아무 것도 없소! 아무 것도!”(김은국의 ‘순교자’ 중에서)

중학교 3학년 때인가, 김은국의 ‘순교자’를 읽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뒤, 올해 나는 그 책을 다시 읽었다. 나이 들어 다시 읽으니 종교적인 내용보다도 전쟁의 사실적인 기록들이 눈에 보이듯 생생했다. 60년이 흐른 지금, 전쟁의 그림자는 아직도 우리 눈앞에 어른거린다. 어쩌면 더 나쁘게 변해 가는 세상에서 종교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국경없는의사회의 일원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평생을 헌신하며 사람들을 치료하다가 탈레반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 아름다운 사람들 또한 현대의 순교자들이다. 어쩌면 하느님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종교가 더욱 의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게 나의 좁은 소견이다. 죽어서 천국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은 뒤에 그 아무 것도 없다 해도 선을 행하며 사는 것이 종교적인 삶이 아닐까.

평소 안면이 있던 목사님이 임종을 지키러 오신다 해도 거절하신 우리 아버지는 병상에서 말씀하셨다. “살아생전 착한 일도 별로 한 것 없는데 죽을 때 가서 하느님 찾기 싫다.” 서른셋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기독교에 귀의한 할머니는 임종하시기 사흘 전에 의식이 혼미해지고 곡기를 끊으셨다. 몇 십 년 동안 손때가 묻은 소중한 성경책을 손에 쥐어드리면 허공을 향해 집어던지셨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나를 키워준 건 80%가 할머니가 나를 위해 드렸던 평생의 기도였다는 걸.

이른 아침 우연히 라디오에서 들려온 구절은 ‘순교자’란 신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 세상의 무의미한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는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며 죽어가는 사람이라 말하고 있었다.

내게는 왠지 하느님은 거역할 수 없는 힘센 자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연은 무섭다. 지진과 홍수와 가뭄과 쓰나미, 인간이 이겨낼 수 없는 자연의 거대한 힘이야말로 하느님이 아닐까?

그러니까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비롭지 않을지도 모른다.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고, 자비를 베풀라고 말씀하신 분들은 하느님이 아니라 예수와 부처와 마호메트 같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고 선한 존재들이다.

그 위대한 뜻을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왜곡하는 후세의 인간들은 종교와는 가장 거리가 먼 싸움을 종교의 이름으로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평화 시에도 우리는 매순간 신이 정말 있다면 왜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의미 없는 고통과 마주하며 살아간다.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는 불치병과 싸우며, 누군가는 높은 건물 위에서 투신해 생을 마감한다.

불의의 사고로 꽃 같은 나이의 젊은이들을 데려갈 때마다 어쩌면 정말 하느님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악마보다 더 악한 사람, 하지만 꽃보다 아름답고 하느님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어 살 만한 게 아니겠느냐고, 아침에 눈 뜨면 라디오와 창 밖과 세상의 구석구석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소리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문화일보, 2010.12.16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0121601033037191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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