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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진 : 한 아키비스트의 집념이 낳은 ‘인간 만세‘ 이야기

유홍준

한 아키비스트의 집념이 낳은 인간 만세이야기

 

유홍준<전 문화재청장/ 미술평론가>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방대한 자료가 집대성되어 있는 김달진미술연구소와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의 탄생과정을 기록한 이 책은 미술 아카이브 체제의 확립이라는, 얼핏 생각하면 작아 보이지만 기실은 거대하기만 한 작업에 바친 한 인간에 대한 증언이다김달진은 미술에 깊은 애정을 갖고 고등학생 때 미술 스크랩을 모아 스스로 10권짜리 서양미술전집을 완성할 정도였다. 훗날 그는 대학원까지 마쳤지만 가정형편 상 곧바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이런 저런 일로 생계를 꾸리면서도 미술자료 수집을 포기하지 않았다.




2016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서 특강



그런 중 1981, 국립현대미술관장 이경성 선생을 찾아간 것이 일생을 이 길로 걸어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로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직 미술관장인 이경성 선생은 국립현대미술관에는 두 가지 전문직이 전무하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하나는 미술품보존실(conservation)이고 또 하나는 미술자료실(archive)이였다. 이때 김달진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경성 관장은 그에게 내줄 수 있는 직책이 없었다. 그래서 임시고용직 자리뿐이었다. 그래도 김달진은 이를 천직으로 알고 열심히 근무했다. 이때부터 매주 금요일이면 그는 인사동 화랑가를 다니며 팸플릿과 포스터 두 세 부를 수집하여 한 부는 국립현대미술관에, 한 부는 자기 개인이, 또 한 부는 예비로 모아 두었다. 그리고 사서교육원에서 공부하며 준사서 자격증까지 획득하며 자료를 정리하였다. 이어 경험을 살려 <국내 미술자료 실태와 관리 개선방안 연구>로 석사논문을 쓰고 2013년 한국아트아카이브협회까지 창립하였다.


당시 미술평론가로 갓 등단한 나는 이런 김달진의 모습에 감동하여 1985년 계간 선미술의 주간을 맡으면서 그에게 미술 기록에 어떠한 오류가 있는지를 써 달라고 원고청탁을 하였다. 이 원고에 내가 붙인 제목이 <관람객은 속고 있다>였다. 이 글은 당시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김달진에게 많은 원고 청탁이 들어오면서 자신의 일에 보람을 느끼며 더욱 매진하는 계기로 되었다고 한다. 1995, 41세의 김달진은 당당히 바로 보는 한국의 현대미술을 펴낸다.




유홍준선생님 부채그림



1996년 김달진은 결국 국립현대미술관을 떠났다. 그리고 이때 그는 두 번째 은인으로 가나화랑의 이호재 회장을 만나 가나미술문화연구소 자료실장을 맡게 된다. 그리고 나서 2001년 가나아트를 퇴사한 뒤 김달진미술연구소를 차리고 홀로서기를 한 그는 월간지 서울아트가이드를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미술자료의 수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공유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이 미술정보 포털 달진닷컴’,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한국미술정보센터의 모태다. 그동안 대한민국 미술인 인명록, 미술인 인명사전을 펴냈으며 20238월 현재, 달진닷컴에서는 무려 8,650여명의 미술인이 검색된다.


오늘날 라키비움(Larchiveum)이 크게 유행하고 있다. 도서관(Library)+기록관(Archives)+박물관(Museum)을 합성한 복합문화공간이다. 그 라키비움의 선구자 김달진은 취미를 직업으로 만든 사람이다. 지금 연구소장, 박물관장으로 외부 심사 및 자문, 강의와 현장에 있는 유튜버로 진화해 왔다.

이 책은 한 인간의 의지와 집념이 낳은 진정한 문화창조의 길을 말해 주는 인간 만세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기록은 누구 못지않게 미술을 사랑한 김재희라는 한 미술 도슨트가 미술 아키비스트 김달진에게 헌정한 책이기도 하여 더욱 그 의의를 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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