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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4월 20일] 차용과 도용의 판단

강수미

예술은 창조성과 독창성을 제일의 가치로 여긴다. 그럼에도 현대미술 중에는 모순되게도 '차용미술'이라는 것이 있다. 영어 단어 '어프로프리에이션'은 번역하면 도용(盜用), 전용(轉用), 표절(剽竊), 차용(借用)으로 옮긴다. 따라서 차용미술은 말 그대로 남의 것을 훔쳐 쓰고, 바꿔 쓰고, 그대로 베끼는 미술인 것이다. 대표적인 작가는 쉐리 레빈이다. 그녀는 1980년대 초 미국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막 싹트기 시작할 즈음 미술사의 거장들 작품을 노골적으로 표절해서 주목받았다. 그리고 지난 해 11월 세계에서 가장 실험적인 미술을 선보이는 곳으로 인정받는 뉴욕 휘트니미술관이 그녀의 회고전을 개최한 데서 보듯이 지금도 그 예술적 성과를 높게 평가받고 있다. 심지어 미술사가 하워드 싱거만은 작년에 출판한 <미술사, 쉐리 레빈 이후>라는 책에서 서구 미술사를 레빈 이전과 이후로 나눠 논하기까지 했다.

예컨대 레빈은 첫 개인전에서 근대 사진의 대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에드워드 웨스턴의 여러 사진을 문자 그대로 고스란히 재촬영해서 자기 이름으로 전시했다. 처음에 미술계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몰랐고, 뻔뻔하게 다른 작가의 예술을 훔쳐 쓴 레빈과 그녀의 행위를 두고 우왕좌왕했다. 하지만 곧이어 현대미술계는 그에 대한 가치판단과 이론적 의미를 '차용미술'로 정의하기에 이르는데, 그 판단의 근거와 논리를 다른 무엇도 아닌 레빈의 작업이 제공했다. 그녀는 앞서 소개한 것처럼 거장 웨스턴의 사진을 그대로 베꼈다. 하지만 작가는 그것을 숨기기는커녕 오히려 <에드워드 웨스트 이후>식 작품명을 통해 원작자와 표절 사실을 명시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레빈은 작업의 진짜 의도가 남의 예술적 성과를 은밀히 도용해서 자신의 사적 이익을 취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미술의 개념 및 독창성의 조건을 문제시하는 데 있음을 명확히 했다. 이를테면 미술은 반드시 시각적이어야만 하는가, 시각적으로 유사한 것들은 반드시 그 의미 또한 동일한가, 현대문명에서 과연 100% 완벽하게 독창적인 창조물이 가능한가와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이다. 덕분에 그 시기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이론은 지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오늘 우리는 손기술만 좋거나 눈속임만 잘하는 미술이 아닌 미술을 향유하게 됐다. 이를테면 비판적인 사고와 다각적인 판단력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미술을.

그런데 한국 현실 정치판에서는 표절 또는 도용의 문제가 완전히 딴판이다. 문대성 국회의원 당선자의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문 당선자는 박사학위 논문 표절 의혹을 받았지만, 새누리당 후보로 선거를 치러 부산 사하갑에서 당선됐다. 각종 언론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그의 2007년 8월 학위 논문은 2007년 2월 김모씨가 쓴 논문과 연구 주제나 방법론이 유사한 정도를 넘어 상당한 분량의 문단을 전거도 밝히지 않은 채 도용한 표절 논문이다. 오자조차 고스란히 베낀 대목을 두고는 네티즌의 희화화가 봇물을 이루기까지 했다.

헌데, 정작 당사자와 소속 정당은 선거 기간 중 침묵으로 일관했다. 또 당선 이후에는 '논문에서 이론적 배경은 모두 다 베끼는 것' 따위의 자기합리화를 하며 여론의 비판에 맞대응하고 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당선인의 도덕적 불감증이나 정치적 계산에 몰두하는 여당의 막무가내만이 아니다. 박사논문까지 쓴 이가 타 연구자의 성과를 왜 참고해야 하는지, 인용과 도용, 참조와 표절 간의 차이는 무엇인지, 그 차이를 어떤 형식으로 논문에 명시해야 학문의 정당성이 확보되는지조차 모른다는 점이 더 놀랍다. 그렇게 학문 윤리 및 도덕적 실천, 공공의식 및 판단력의 백지 상태에서 교수를 하고, IOC 선수위원을 하며, 국회의원직을 사수하려 하는 점이 더더욱 놀랍다. 분별력 있는 국민에게 그 사태의 판단은 너무나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일보 2012.4.20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04/h201204192101528192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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