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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3000원짜리 예술인 복지

어수웅

10년 아래 후배가 출판사에서 일한다. 또래들 사이에서 요즘 '이번 생(生)은 아닌가 봐'라는 말이 유행이라고 그는 전했다. 후배는 영문과 출신으로 문학과 예술에 대한 열정이 충만한 청춘이었다. 대기업에 갈 수 있었지만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했고, 지금 그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보수는 박하다 못해 한숨이 나오는 수준인 데다 출판 산업의 미래조차 불투명하다.

하지만 이 성실한 청년은 정권이나 경제체제를 원망하기보다 자신의 노력 부족을 책망하는 모범생 타입이다. 그렇더라도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명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 알리바이 혹은 핑계가 '이번 생은 아닌가 봐'였다. 그런데 그는 내생(來生)이나 전생(前生)을 믿지 않는다.

최근 몇 달간 20~30대의 트위터 공간에서 '대나무숲'이 유행했다. 신라 경문왕의 설화에는 임금님의 두건 만드는 사내가 죽기 직전에 대나무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고, 그 뒤로 바람만 불면 임금님의 비밀이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진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익명의 계정으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칠 수 있게 해 준 신기술 SNS 덕분에 트위터에는 '을(乙)'들의 외침이 난무했다. 자신이 좋아한다는 일을 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열정을 갈취한 사례에 대한 고발이었다.

'이력서를 내면 출판사로 불러 교정과 번역 시험을 치게 한다. 사장은 면담에서 교정 실력이 한참 부족하다며 일하면서 배우라고 한다. 수습 6개월에 월급 60만원이다.'

'예전에 한 시나리오 작가가 지병과 영양실조로 세상을 떴을 때 사람들이 그랬죠. 편의점 알바라도 하지,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뭐 했느냐고. 근데요, 청춘은 짧거든요. 영화 한답시고 쫓아다니다 서른 훌쩍 넘기고 나면 알바 자리도 얻기 힘들어요.'

물론 그들의 재능이 자신들의 선택을 뒷받침할 만한 수준이어야 한다는 전제는 기본일 것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그 정도 희생은 감수하라는 이야기는 과연 정당한가. 청춘들에게 꿈을 꾸라고 말하지만 그 꿈을 실현하려는 사람들의 노동을 헐값으로 착취하는 것은 아닐까. 이들 사이에서 '열정 노동'이란 자조(自嘲)가 나온 이유다.

18일이면 이들의 열정을 착취 수준으로 만들면 안 된다는 취지로 제정된 '예술인복지법'이 시행된다. 1년 전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의 가슴 아픈 죽음이 촉매가 되어 가속도가 붙었던 법률이다. 정부가 밝힌 이 법의 수혜 대상자가 54만명이라는데, 현재까지 확정된 예산은 70억원이다. 단순 계산하면 1인당 1만3000원꼴이다. 그나마 얘기되던 4대 보험은 물 건너 갔다.

예술인을 정부가 지원해야 하느냐는 본질적 질문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수준이라면 정부의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정부도 예술인의 복지를 신경 쓰고 있습니다.' 역시 이번 생은 아닌가 보다. 그리고 현생(現生)을 포기하는 세대가 늘어나는 나라의 미래를 굳이 상상해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 조선일보 2012.11.15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1/14/201211140302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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