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토요 산책] 狂人(광인) 고흐와 장승업

신은숙

빈센트 반 고흐와 조선시대 화가 장승업. 두 사람은 기이한 행동으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으면서 작품도 주목 받지 못하다 말년에 이르러서야, 혹은 후대에 와서야 재조명을 받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친 사람, 즉 광인(狂人)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던 이들이 위인이 됐으니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19세기 고흐의 작품을 논하는 사람을 보고 우리는 '그 사람 참 교양 있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흐의 뛰어난 작품들은 그의 생전에 인정받지 못했고 그는 내내 가난을 면하지 못했다. 지난 1903년 열린 유작 전시회 이후에야 그가 위대한 화가였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생전 미친놈서 사후 위대한 화가로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자화상' 속 고흐는 귀가 하나뿐이다. 한때 많은 사람들은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른 뒤 그렸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앞뒤가 바뀐 해석이다. 고흐는 귀가 2개였지만 1개만 그렸다. 그는 보는 각도나 해석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지 틀린 그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친구 고갱은 고흐가 진실을 왜곡했다고 비평했고 고흐는 사실주의의 한계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 자신의 귀 하나를 잘라버리고 말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괴이한 행동이지만 전통의 관념이나 논리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예술 창작을 추구한 그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일화다. 고흐는 20세기 초 야수파 화가들의 첫 지표가 됐으며 후대에 강한 영감을 끼쳤다.

장승업도 광인으로 간주되다 후대에 재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그는 고종의 명으로 궁궐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으나 중국 화법만 좇는 세태를 거부했다. 성격이 호방하고 어디에 매이는 것을 꺼려해 몇 번이나 궁에서 빠져나와 황제의 노여움을 샀다. 교조화된 성리학과 사대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예술 창작에 몰두했고 그 매개로 술에 의존했다. 항상 취기로 살아가고 창작활동을 하는 그의 행위는 광인으로 취급되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전통을 답습하지 않고 계속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려는 그를 세상은 술주정뱅이 취급했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 장승업의 에너지 넘치는 작품세계는 암울했던 19세기 후반, 빈 공간으로 남겨질 수 있었던 회화사를 풍성하게 살찌웠고 우리 민족사의 어두웠던 한 시기를 정신적∙예술적으로 환하게 밝힌 빛이었다고 평가한다.

세상은 새로운 것,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틀을 정해놓고 그 틀에 맞지 않는 것은 모두 틀렸다고 한다. 하지만 '다르다'와 '틀리다'는 엄연히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다름을 존중해야 창조성·변화 숨통

인터넷을 비롯한 통신수단의 발달로 우리는 변화의 한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 기존의 가치들이 흔들리며 혼란스러운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회가 혼란스럽고 급변하는 시기에 역사적인 작품과 지식들이 만들어져왔다. 공자는 '성인(聖人)을 얻지 못하면 광자(狂者)를 얻겠다'고 말했다. 성인을 얻지 못하는 상황에서 광자, 즉 광인이 가장 가능성과 능력을 갖춘 인물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광인이야말로 이 시대를 이끌어갈 현실적인 인재라는 의미가 아닐까.

사람들이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분위기가 형성될 때 비로소 많은 이들이 형식과 틀에 얽매이지 않고 창조성을 펼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다름의 가치를 지향하고 나아간다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인물들이 한국사회에서도 많이 배출될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우리 시대의 광인을 기다려 본다.


- 서울경제 2012.12.08
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1212/e2012120717025348910.htm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