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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定本 여유당전서’ 의미

최영창

다산 정약용(1762∼1836)은 강진 유배기 500여 권의 저술로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의 문집은 조선시대에 간행되지 못했다. 이른바 ‘폐족’으로 낙인찍힌 데다 다산과 그의 자손들도 문집 출간이 적대 세력에게 또다른 빌미를 줄지 모른다고 걱정했기 때문이다. 실제 다산의 간찰(簡札·편지)이나 아들에게 써 준 글 등을 보면, 그는 ‘목민심서’가 필사돼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것을 우려했으며 편지를 쓸 때는 혹시라도 남에게 꼬투리 잡히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두 번, 세 번 읽어보곤 했다.

이처럼 조심스러운 삶을 살았던 다산이 남긴 저술들은 20세기에 들어와 빛을 보게 됐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0년 장지연이 ‘목민심서’와 ‘흠흠신서’ 등을 펴낸 데 이어 일제강점기인 1934년부터 1938년까지 정인보·안재홍 등이 다산 서거 100주년을 기념해 154권 76책으로 재편집한 ‘여유당전서’를 신조선사에서 활자본으로 출간한 것이다. 조선학 부흥운동을 통해 민족의 긍지를 되살리기 위한 국학자들의 노력의 결실로 다산의 복권은 물론, 실학자들에 대한 연구도 이때부터 본격화됐다.

다산학술문화재단이 지난 21일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 출간 이후 70여 년 만에 ‘정본(定本) 여유당전서’ 37권(책)을 상재했다. 지난 10여 년간 80여 명의 전문인력을 투입해 국내외에서 300여 종의 필사본을 발굴하고, 이를 하나하나 대조하는 교감(校勘)과 문장부호를 다는 표점(標點) 작업을 통해 ‘비판적 정본’을 완성한 민간재단의 성과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여유당전서’처럼 500만 자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의 교감·표점 등 정본화가 이뤄진 것도 사실상 처음이며 무엇보다 올해 다산 탄생 250주년 기념사업의 대미를 장식하게 돼 의미를 더한다.

사실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는 석·박사논문 300여 편과 단행본 100여 권을 필두로 그동안 출간된 다산 관련 논문과 저술 2000여 건이 이를 저본으로 한 데서 알 수 있듯, 20세기 후반 ‘다산학(茶山學)’의 정립과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하지만 수많은 오탈자의 교감 문제와 편집 및 구성체제의 오류, 신조선사본 필사 저본의 부재 등이 지적되면서 정본의 필요성이 제기돼 왔다. 이에 따라 ‘정본 여유당전서’는 현재 전하는 다산의 수많은 필사본 저술 가운데 다산 친필과 다른 사람이 베낀 것, 다산 당대 및 후대의 것, 다산 자신 또는 후학들이 손을 댄(고친) 부분 등을 가려내 다산의 진의에 가장 근접한 텍스트(대본)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물론 ‘정본 여유당전서’는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DB 구축을 통한 인터넷 서비스 등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남아 있다. 이주행 다산학술문화재단 기획본부장은 “‘여유당전서’ 정본화 사업을 하면서 표점과 교감의 경우, 범례의 표준화가 절실함을 느꼈다”며 “이번에 겪었던 시행착오 등을 출간기 형태의 기록으로 남길 계획”이라고 밝혔다.

‘퇴계전서’와 우암 송시열 저서의 정본화 사업이 재정 문제로 중단돼 있는 등 국내에서는 아직 인식이 부족하지만, 서구에서 고전 텍스트의 정본(캐논)화 사업은 인문학의 기초이자 출발점이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은 오는 2020년까지 중국의 고전을 비롯, 다산 등 한국 학자들의 저술까지 정본화하는 유장(儒藏) 편찬사업을 진행 중이다. ‘정본 여유당전서’ 출간이 21세기 시대정신에 맞는 새로운 ‘다산학’의 창출과 함께 한국학 고전 정본화 사업의 기폭제가 되길 기대해본다.

- 문화일보 2012.12.24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2122401033030074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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