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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연희의 옛 그림 속 인물에 말을 걸다 (11) 이인문 ‘설중방우’… 눈이 오면 떠오르는 모습

고연희

눈 내리면 문득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러나 눈 때문에 오히려 외출이 쉽지 않다. 눈길에도 마다 않고 찾아가는 발길이라면 그 마음의 천진스러운 흥취와 벗에 대한 정감이 남다름을 뜻한다. 눈길을 갔다거나 눈 속에 기다렸다는 그 모습이 옛 시와 옛 그림의 한 테마였다.

‘설중방우’를 또 하시렵니까 

눈 속에 벗을 찾아가는 일을 ‘설중방우(雪中訪友)’라 칭했다. 그 모습이 어떠한가. 선비가 나귀나 말을 타고 동자와 더불어 눈길을 가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만한 낭만적 이미지가 쉽지 않다. 그런데 조선후기의 문인 성대중이 엮어 필사체로 전하는 ‘청성잡지’에 설중방우의 고생스러운 실상이 우스꽝스러운 일화로 각색돼 있다. 

노비가 대감을 따라가는데 강의 살얼음을 건너다가 대감이 물에 빠졌다. 노비가 대감의 상투를 붙들어 끌어올리는데, 반쯤에서 멈추고 약속을 받는다. “나리, 설중방우를 또 하시렵니까?” 대감이 “아니!”라 답했다. 노비는 또 묻는다. “저의 아내를 계속 곁에 두시겠소?” 대감이 “아니! 아니!”라고 했다. 그제야 노비는 대감을 완전히 끌어올렸다. 

성대중은 설명을 더했다. 설중방우란 ‘취사’(趣事·흥취 있는 일)거늘, 선비 곁을 동행하는 노비는 고생이 너무 많다. 손이 곱고 발이 시릴 것이다. 사실, 선비도 춥기는 마련이다. 그래서 추위를 견디느라 노비의 처를 곁에 두고 가며 희롱까지 했다는 것이다. 노비는 차마 투덜대지 못하다가 절호의 찬스를 만난 셈이다. 이때구나 싶어 약속을 받겠다고 얼음물에 빠진 주인을 반만 꺼내 놓고 다그친다. “나리, 설중방우를 또 하시렵니까?” 간절한 요청인데 방식이 이러하다니, 노비의 천진한 호기가 제멋에 취해 눈길을 강행했던 주인대감 못지않다. 



‘설중방우’의 출처, 왕휘지의 흥(興) 

‘설중방우’라는 사자성어는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두 예술가의 이야기에서 비롯한다. 한 사람은 왕휘지(王徽之·336∼386)로 서예가 왕희지의 다섯째 아들이며 그 역시 저명한 서예가였다. 또 다른 사람은 왕휘지의 벗 대규(戴逵·326∼396)로 금을 잘 연주하고 그림도 그렸으며 박학다식했는데 한사코 출사하지 않았다. 송대에 간행된 ‘세설신어’에 그들의 설중방우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왕휘지가 산음(지금의 저장성 사오싱·紹興)에 머물 때였다. 밤에 큰 눈이 내렸다. 잠에서 깨어나 사방을 보니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왕휘지가 술 한 잔에 시 한 수 노래하노라니, 문득 대규가 생각났다. 대규는 섬계(지금의 저장성 사오저우·紹州)에 살고 있었다. 왕휘지는 작은 배로 밤새 가서 대규의 집에 도착했다. 그러나 왕휘지는 대규 집 문 앞에서 배를 돌려 왔다. 사람들이 까닭을 물으니, 그의 답이 이러했다. ‘내가 원래 흥을 타고 왔다가 흥이 다해 돌아가노라. 어찌 반드시 대규를 보아야 하겠는가(吾本乘興而來, 興盡而返. 何必見戴·오본승흥이래, 흥진이반. 하필견대).’

눈 내리는 날이면 옛 문사들이 섬계의 흥취를 반드시 떠올렸고 그들의 설중방우를 기억하며 시문을 거듭 지었다. ‘설야방대도(雪夜訪戴圖·눈 내린 밤 대규를 찾아가다)’라는 그림 또한 중국과 한국에서 거듭 그려졌다. 중국에 전하는 그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조선에서도 16세기 초 정수강이, 17세기 초 신흠이 모두 ‘설야방대도’를 감상했노라고 제화시를 남겼다. 

흥에 겨워 밤새 갔다가 흥이 다해 돌아왔다는 이 이야기는 무엇을 뜻할까. 그들의 시절은 위진남북조시대라, 한나라 이후의 정치적 혼란기였다. 예술과 개인적 자유에의 각성이 일던 시절이다. 내 흥대로 하노라니 그것이 가치라는 풍조가 엿보인다. 조선의 학자들은 유학자의 체통으로 해석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율곡 선생 이이는 ‘설중방우’의 뜻을 묻는 과거시험에서 한때의 즐거움일 뿐이라고 일축해 답했고, 그의 답안은 최고로 뽑혔다. 그림으로 감상한 신흠은 말했다. ‘정신으로 사귐이라 형체를 잊은 것이라.’ 그 후 신위의 말도 비슷했다. ‘좋은 벗은 마음에 있는 것이니, 어찌 반드시 얼굴을 봐야겠는가.’ 이러한 조선 선비들의 반응 속에서는 흥겨운 공감보다는 의미에 대한 수양적 성찰태도가 드러난다. 

생각해 보라. 보고 싶어 밤새 갔다 보지 않고 되돌아오다니. 범상치 않은 화두다. 한편 흥도 좋고 내면도 좋지만 어이없음도 사실이다. 차라리 매천 선생 황현이 툭 트듯 읊조린 시구가 정곡을 찌르는 양 시원하다. ‘섬곡에서 배 돌린 일은 너무 썰렁한 이야기라네!’ 왕휘지에게 왜 그냥 돌아가느냐 다그친 사람은 밤새 노를 저어 갔던 그의 시종이 아니었을까. 

이인문이 그린, ‘설중방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고송유수첩’ 중에 ‘설중방우’가 실려 있다. 고송유수(古松流水)는 화가 이인문(1745∼1821)의 호다. 이인문의 ‘설중방우’를 보면, 눈 쌓인 날 두 선비가 방안에 마주 앉았다. 한 사람은 주인이고 한 사람은 방문객이다. 방문한 벗은 흥이 다하지 않아 돌아가지 않은 것일까. 두 벗이 만났으니 그림을 보는 이도 흡족할 뿐이다. 

조선초기 정도전의 시 ‘설중방우’가 이 그림 같았다. 정도전은 눈 속에 친구 한 씨를 찾아갔다. ‘문 앞에 당도해도 눈이 아직 개지 않았네!’ 왕휘지의 흥은 집 앞에서 끝났지만 정도전의 흥은 계속 내리는 눈과 함께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니 흥으로 치자면 정도전이 왕휘지보다 낫다고 자부해 볼 만했다. 



돌아가는 길에도 남은 흥을 타고 가리니, 

풍류에 굳이 섬계의 옛일을 들먹이겠는가. 

返路也乘餘興去(반로야승여흥거),

風流何必剡溪行(풍류하필섬계행). 

(정도전 ‘설중방우’ 중에서) 



이인문의 그림을 보면, 담장 밖에 동자가 주춤대는데 주인댁 동자가 팔을 들어 안내한다. 추위에 떨던 동자는 이제 안으로 들어 곱은 손발을 녹일 참이다. 

화가 이인문은, 김홍도와 동시대를 살았던 정조대의 화원화가로 산수를 잘 그렸다. 이 그림 속 설경 표현은 어딘지 기분 좋아 쓸쓸함이 전혀 없다. 하늘을 침침하게 선염하며 눈 쌓인 부분을 모두 바탕색으로 남겨 두는 것은 설경을 그리던 오랜 전통법이다. 하얗게 남기는 것을 ‘유백법(留白法)’이라 한다. 이 그림은 이런 전통을 잘 따르고 있지만, 특별히 산뜻한 설경이다. 그 이유는 무성하게 가지를 친 오동나무며 청록이 싱싱한 소나무 솔잎 위로 베풀어진 유백법 때문인 듯하다. 화면의 거반을 차지하며 뻗어 나간 가지들 위로 소복소복 눈꽃이라 산뜻한 생동감이 화면을 지배한다. 사람들의 흥취와 온정의 이야기가 이렇듯 생기 넘치는 설경에 담겼기에, 이 그림이 기분 좋게 내 눈에 들었던 것이다. 



폭설 속에 기다린 예(禮), ‘정문입설’ 

날이 궂다고 배움을 거를 일인가. 눈 오는 날에도 스승을 찾아가 배우기를 마다 않고 폭설에도 예를 지킨 옛 학자의 이야기. 조선시대 학자들이 설경 속에 떠올리던 이야기 중 하나였다. 조선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1676∼1759)의 그림이 있다. 

때는 송나라. 유조와 양시 두 학자가 이천 선생 정이(程?)을 처음 찾아뵙고 나서는데 정이가 마침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유조와 양시는 차마 물러나노라 인사를 못하고 선 채로 기다렸다. 정이가 눈을 뜨고 말했다. “자네들 아직 거기 있나. 이제 가서 쉬게나.” 문 밖에는 눈이 한 자나 쌓여 있었다. 

이 이야기는 ‘정문입설(程門立雪·정이의 문에서 눈 속에 서다)’의 사자성어로 통한다. 정선의 그림 상단 오른편에 이 네 글자가 또렷하게 적혀 있다. 그림 속 대학자 정이의 집은 소박한 초막이고 인물은 오직 세 사람이니 참으로 간단한 그림이다. 명상에서 깨어난 정이가 물러나라 허락하느라 뜰을 향해 곤두 앉았다. 뜰에 선 두 학자 유조와 양시는 정강이까지 눈 속에 파묻혔는데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할 따름이다. 집도 담도 온전한데 두 학자만 눈 속에 파묻힌 것이 볼수록 우습지만, 입설(立雪)의 주제를 그린 것이라 이해할 일이다. ‘정문입설’의 이야기는 ‘송사’와 ‘주자어록’에 모두 전한다. ‘주자어록’의 원문을 보면 두 학자가 문을 나왔더니 눈이 한 자였다고 돼 있다. 그렇다면 실제로는 그림처럼 눈 속에 한참을 서서 스승의 명상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더욱 크다. 다만 한 자 깊이 눈 속을 헤치고 돌아가야 했으니 상황은 비슷했을 것 같다.



정성을 본받고, 초심을 지키라

조선후기 정조 때, 성균관 유생들의 품행이 바르지 않고 그들의 풍습이 가지런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이들 모두 단체기합을 받기에 이르렀다. 유생들은 대궐의 뜰에 공수(拱手·손을 맞잡아 모음)의 자세로 반나절을 서 있어야 했다. 그다음, 그들은 ‘정문입설’이란 시 제목을 받았다. 공손하게 예를 지킨 송나라 두 학자를 기억하며 시(詩)를 지어 제출하란 뜻이다. 그 시절의 반성문이다. 때마침 이날 밤에 큰 눈이 내렸다. 정조는 ‘문 밖에 눈이 세 자’라 하며 그날 대궐에 입직한 모든 신하들에게 이 일을 주제로 부(賦)를 짓게 했다. 부란 시보다 격식을 갖춘 산문시라 짓기가 까다롭다. ‘홍재전서’ ‘일득록’의 기록으로 1792년 겨울의 일이다.

‘정문입설’은 한반도에 성리학이 수용되던 고려말기부터 학자들이 인용했던 고사다. 스승을 처음 뵌 날 배움을 시작하는 태도의 표본이라 해 ‘입설의 초심’이라 부르고 이 초심을 지키라 했다. 정선을 후원한 안동 김씨 가문의 김창흡(1653∼1722)도 이 고사를 여러 번 인용하며 ‘눈 속에 서는 마음(立雪心)’이라 칭송했다. 정선이 이 그림을 그린 배경에는 ‘정문입설’의 고사를 아낀 김창흡의 각별한 애호가 있지 않았을까. 눈 속에 서는 ‘입설’뿐 아니라 눈 속에 눕는 ‘와설(臥雪)’도, 설경 속에서 선비들이 잊지 않던 고사였다. ‘와설’이란, 눈이 와서 심각해진 백성들의 노고와 기근을 염려한 관료 원안이 밖에 나가지 않고 가만히 누움으로써 백성들의 노고를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자 했다는 이야기다. 이 역시 시와 그림의 오랜 주제였다. 



눈이 내리네! 

눈이 내리면 설렘에 무언가 마음에 떠오르기 마련이다. 내 맘에는 여고시절 아다모의 ‘눈이 내리네’를 가르쳐 주신 불어선생님이 떠오른다. 동화 같은 환상 속으로 우리들의 미래를 하나하나 자립시켜 줬던 선생님의 열정에 매료돼 추위를 잊고 노래를 부르던 기억이 아련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선비들도 눈이 내리면 설??을 것이다. 그러나 농경사회의 고비였던 한겨울에 할 일 없이 시종을 거느리고 벗을 찾아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쉬웠을 리 없다. 혹은 우스꽝스럽기 십상이다. 밤을 새워 배를 저어간 왕휘지의 영상이 잊어지지 않았던 이유는 그 환상이 안겨 주는 낭만적 위로가 있어서였으리라. 이인문의 그림 같은 설경 속 조우라면 더할 나위 있겠는가. ‘입설’이나 ‘와설’은 좀 다르다. 눈이 쌓여도 배움의 도리를 지켰다는 두 학자, 눈이 쌓였으니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지 말자고 꼼짝 않고 누웠다는 원안, 그들은 아마도 눈 내리는 겨울 방에 선비들을 끌어 앉히고 마음을 여미게 해준 고마운 모습이 아니었을까. 

- 문화일보 2013.01.18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3011801033130025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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