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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주의 미술론의 거장 임영방

정준모

인문주의 미술론의 거장 임영방


(향년 86세, 1929~2015,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1992∼1997) 선종

 

1929년 인천에서 태어나 프랑스 파리의 소르본대학에서 철학(미학)과 미술사를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1965년 귀국, 수도여자대학교 교수로 1년을 재직한 후 이듬해 서울대학교 미학과 교수, 동국대 석좌교수 등을 역임한 임영방(1929~2015)가 지난 1월 31일 밤 8시 30분경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미학자로 미술사학자로 한국미술계의 중추를 이루는 후학들을 지도하고 육성하는 교육자로서의 오롯하게 삶을 살아낸 그는 1992년부터 1997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장, 1995년 창설된 광주비엔날레의 초대 조직위원장으로 또 어려서 홍콩에서 동문수학한 백남준과 함께 당시 베니스비엔날레 운영위원장이던 아킬레 보니토-올리바(Achille Bonito-Oliva, 미술사가, 로마대교수)와 당시 베니스 시장인 마시모 카차리(Massimo Cacciari)를 설득하여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의 한국관이 개관하는데 막후에서 큰 역할을 수행하는 등 한국미술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이외에도 한국문화재 위원, 한국미학회 회장, 예술평론가협의회 부회장, 서양미술사학회 명예회장, 유네스코 한국위원 등을 맡아 한국미술사에 있어서 미학과 미술사는 물론 미술행정과 정책을 입안하고 한국미술의 세계화에도 크게 기여한 거인이다.

이런 와중에도 학자로서 ‘서양미술전집’, ‘현대미술의 이해’, ‘미술의 세 얼굴’, ‘미술의 길’ ‘현대미술비평30선’,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와 미술’, ‘바로크’ 등 다양한 저작활동을 통해 미술의 인문학적 대중화에 앞장섰다.

한국과 프랑스 문화예술 교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95년에 프랑스 문화예술훈장을 받았고 2006년에는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2호실이며 발인은 2월 3일 오전 9시 서울대병원(동숭동)장례식장이며 장지는 서울 흑석동 성당 평화의 쉼터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조향순여사와 딸 임상미가 있다. 전화 02-2072-2033

 

참고로 고 잉명방 관장님과 관련하여 보다 깊이있는 삶의 궤적과 철학은 미술사학자 최열이 쓴 이래 고 임영방 관련 원고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참고자료

인문주의 미술론의 거인 임영방 / 월간미술2006년 11월호

최열(미술평론가)

 

임영방이란 이름은 나에게 한 마디로 경이로움이다. 인문주의 세계관으로 가득 찬 지성인, 세속주의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자유인, 그렇다. 그 뜻만으로도 설레임을 억누를 길 없었던 나는 또 다시 놀라움을 맛보아야 했다. 임영방의 시대라 할 20세기가 저물고 새로운 세기가 열렸는데 두께가 엄청난 저술을 연이어 우리 앞에 내놓으셨으니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안온한 세월을 누리실 즈음이라고 여기던 때였으니 말이다.

옛 선비들은 공직에서 물러나면 은거하여 자연을 벗삼아 천지조화의 이치에 몸과 마음을 맡겨 그렇게 흘러가곤 했다. 그 맑고 깨끗한 세상을 맞이하여 세속의 티끌을 털어 내며 출처와 진퇴의 매듭을 분명히 했던 게다. 국립현대미술관을 떠난 때부터 그 어떤 세속의 물결도 거절함으로써 그 뜻을 갖추었던 임영방 관장은 평생을 추구해 마지않았던 세계로 깊숙이 들어섰다. 처음 출발했던 곳, 뿌려놓은 씨가 싹을 감춘 그 곳에 선 임영방은 물길을 열고 숲길을 틔워 나갔다. 너무나도 무르익어 사라졌을지도 모를 그 세상이 몇 해를 지나 눈부시게 자태를 드러냈으니 두 권의 대작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와 미술>>과 <<중세미술과 도상>>이 그것이다. 나는 그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퇴임이 곧 은퇴인 미술이론가들만을 지켜보았는데 퇴임이 또 다른 진출임을 드러내었으니 이 얼마나 흔쾌한 일인가 말이다.

 

개방가문에서의 성장기

개방의 물결이 조선을 휩쓸고 있을 19세기 인천의 임영방가문은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가톨릭에 귀의했다. 이른바 ‘개화가문’을 일궜고 염전사업을 한 할아버지는 중국, 일본을 드나들며 서학(西學)에 탐닉했거니와 아들을 영국에 유학을 보냈다. 상해에서 대학을 졸업한 임영방의 부친은 천진에서 미국계 석유회사에 근무했는데 2남 3녀 모두를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일본에 유학을 보냈다. 넷째인 임영방은 초등학교 시절 병마가 엄습해 금강산에 들어가 반년동안 요양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그 뒤 부친을 따라 중국 천진으로 건너가 두 해를 머물다가 홀로 귀국해 외할머니 슬하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1945년 8월 15일 고보 1학년 때 해방이 찾아왔다. 소년 임영방에게 해방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게 무척 궁금했는데 관장께서는 설명해 주시기를 신천지가 개막하듯 눈부신 이미지의 세계라고 했다. 인천 내동성당 종탑에 몰래 올라가 아득한 바닷가를 벗하던 여름 그 먼 수평선에 형성된 미국함대는 하나의 검정띠였고 손에 잡힐 듯 인천 상공을 나르는 미국비행기들이 쏟아낸 오색 전단지는 하늘에 핀 함박꽃이었으며 드디어 8월 15일 해안을 상륙하는 미군은 새까만 개미떼였다. 그 전날 신부님을 따라 송도에 자리한 포로수용소엘 갔다. 일본군의 포로가 된 영국군인을 위한 미사 집전에 복자로 참석했는데 영국 장교가 선물한 레이션 상자를 한 아름 들고 귀가했다. 미군수송기가 낙하산에 태워 뿌린 궤짝 속에 들어 있던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레이션에 담긴 달콤한 사탕과 초콜렛을 맛보며 일본 천황의 항복선언 방송을 들으며 소년 임영방에게 해방은 그렇게 왔다.

해방은 아름답고 달콤한 소년시절 추억이었을 뿐인데 정작 궁금한 것은 이런 추억을 지닌 소년의 내면세계를 사로잡고 있었을 그 무엇이었다. 그 무엇은 다름아닌 문학이었고 철학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세계문학전집을 통해 톨스토이를 비롯한 숱한 세계문호들을 만났고 고등학생 시절엔 도서관 그 이상이었던 형의 서재에서 니시다 이쿠타로(西田畿多郞)의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비롯한 책에서 철학의 세계를 발견했다. 그 뿐이 아니다. 형의 친구인 이경성이 관장으로 있던 인천시립박물관에도 드나들었다.

1946년 중국에서 귀국한 부친은 식구를 이끌고 서울 필동으로 이사했고 가문의 전통에 따라 임영방은 미국유학 준비를 시작했다. 철들어 가던 때였으니 철학 공부를 염두에 두고서 미군 장교로부터 영어를 배우던 중 집안 전체가 홍콩으로 이사를 감에 따라 1949년 홍콩생활을 시작했다. 영국계 고등학교에 입학한 임영방은 여기서 셋뿐인 한국인 학생 가운데 몇 살 아래 백남준 어울렸다.

 

파리, 그 인고의 세월

고국에서 일어난 전쟁은 소식이었을 뿐 이 소년의 생애에 끼친 충격이 없었음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전쟁은 홀홀단신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을 때 시작되었다.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하노이와 베이루트를 거쳐 마로니에 낙엽이 뒤덮인 파리에 도착한 때는 1950년 10월 하순이었다. 지금은 최고의 미술관으로 바뀐 오르세이 역사(驛舍)에 자리한 공사관에 발을 디뎠으나 아무런 도움도 받을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발길을 되돌려 오르세이 건물 옆 호텔 지붕 밑에 여장을 풀었다. 이 때만해도 십 오 년의 세월을 겪을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이 긴 세월 이야기를 회상하는 내내 임영방 관장은 마치 그 때로 되돌아간 듯 들떠있었다. 격정과 인내로 꽉 찬 그의 세월을 누군들 헤아릴 수 있을까. 뭔가를 이루지 못하면 귀향을 꿈조차 꾸지 못한다고 믿고서 성당기숙사와 노부부가 사는 저택을 전전하던 그 시절, 낙오와 성공의 갈림길을 끝없이 서성대야했다.

요즘과 달리 방대한 과목을 엄격한 기준에 따라 모두 통과해야만 대학 과정에 들어설 수 있었으니 불합격은 공포스런 전율이었거니와 미래조차 알 길 없는 처음 파리생활은 전장터였다. 학문의 여정만이 머릿 속을 메우고 있는 터에 시험 통과가 마치 인생의 목표처럼 이 제삼국의 연약한 유학생을 짓누르고 있었다.

위대한 미학자이자 노교수 수리오를 방문해 학문하는 방법을 깨우치고서야 비로소 전선을 돌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쾌락과 낭만은 임영방의 것이 아니었다. 고단한 육체를 다스리는 유일한 시간은 <파리의 지붕 밑>을 상영하는 영화관뿐이었다. 놀랍게도 유학생 임영방은 파리생활을 시작한지 8년 만에 외식을 처음 했다고 한다. 그리고 동네 영화관을 거쳐 기숙사로 돌아 온 다음 꼬박 이틀을 죽은 듯 잠들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대체 이 사람의 희망이 무엇이었기에 이런 전쟁을 치루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답은 수리오 교수의 몫이었다. 교수는 학생에게 장차 뭘 할지 결정하고서 전공을 선택하라고 권유했고, 막연한 철학도였던 이 학생은 간단없이 미학을 선택했다. 미래는 그렇게 결정났다.

하지만 그것은 선택이었지 끝이 아니었다. 이것은 미학의 폭을 훨씬 넘어서는 그 많은 이수과목에 압도당했다. 여전히 고통스러웠으나 앞선 8년의 전쟁경험이 있었기에 다음 행군은 수월했다. 대학원 시절의 이런 자신감은 결코 많지 않은 몇몇 벗을 사귀는 가운데 영화관, 까페, 식당을 다니는 여유로움을 회복시켜 주었고 파리국립도서관, 루브르박물관에서 일할 수 있는 의지를 실현할 수 있었다. 그보다 큰 행복은 전후 프랑스 사회가 누리던 ‘황금시대’가 바로 그 때 그 곳 파리였다는 사실이다. 학문 분야만 하더라도 수리오는 물론, 레이몽 아롱, 장 삐아제, 양케르비치, 장 바르, 바슈라르와 같은 거장들이 파리의 대학에 자리하고서 자신의 학문을 빛내는 가운데 후학을 배출하던 시절이었다. 연극, 영화, 문학, 미술은 말할 나위조차 없었는데 전후 남한의 예술가들이 동경해 마지않던 바로 그 곳 복판에서 임영방이 뜨겁게 스스로를 담금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샤스텔 교수 지도 아래 박사논문을 취득한 다음 파리유네스코에 응시해 합격했다. 영광스런 시대의 기운을 빨아들이며 어느덧 임영방은 철학, 미학, 미술사학을 아우르는 인문학자로 불쑥 자라났다. 이제 임영방만의 전쟁, 그 개인의 작은 전쟁도 막을 내렸던 게다.

 

인문학자의 신념

귀국할 생각조차 없었던 임영방이 귀국한 직접 이유는 아버님 환갑이었지만 길게 보면 운명이었다. 조국이 그를 필요로 했던 게다. 그 시절엔 공무가 아니면 여권은 꿈조차 꾸지 못하던 때였다. 잠시 한국에 들렀다 파리로 되돌아오도록 해주겠다는 파리주재 영사관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여권을 내주지 않았다. 1965년 10월말 귀국한 임영방은 30대 중반의 훤출한 지성인이었고 파리에서 인연을 맺은 수도여사대 장두건 과장의 권유로 교수생활을 시작했다. 한 해 뒤엔 서울대학교로 옮겨갔다. 유배의 세월 같았던 유학시대로부터 해방된 터에 꿈결을 추억하는 한국유학생 몇과 가끔 어울리며 더 바랄 것조차 없었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시대의 격정은 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일협정 반대투쟁이 대학을 거점으로 불꽃을 튀기고 대통령과 국회의원 부정선거가 이어지면서 6월 대학 휴교령이 선포되었다. 7월에 접어들어 낮잠 든 새 임영방은 어디론가 끌려갔다. 몇 일간의 고문은 가혹했다. 주먹, 각목, 전기 따위는 물론 잠 안 재우기까지 견딜 수 없어 기절을 되풀이했다. 그 유명한 동베를린거점 북한대남공작단 사건에 휘말렸건만 영문조차 모르는 폭력 앞에 그만 넋이 빠져나갈 지경이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어떤 심정이었느냐’고 물었는데 대답은 간단했다. ‘더 무서울 게 뭐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기나긴 유학시절의 고통을 훨씬 능가하는 차원이었던 게다. 무혐의로 풀려나 꼬박 세 달의 회복기를 거친 임영방은 정말 세상 무서운 일이 사라졌고 세상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귀국 직후 임영방은 미술비평을 시작했다. 개발지상주의가 판치던 시절 도시계획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관학파와 재야가 뒤엉킨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성격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같은 해 프랑스에서 귀국한 이일과 더불어 해외파 비평가군을 형성하기 시작한 임영방은 그러나 서두름 없이 중후한 행보를 보였다. 1970년을 앞뒤로 문화재전문위원을 거쳐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으로 문화유산은 물론 도시환경 정책실천에 자신을 투여했고 더불어 ‘한국미술의 유산과 그 전통’ 또는 ‘서울시가에 세워진 조각물’과 같은 제목의 비평을 수행했다.

그러니까 임영방은 단순히 비판과 주장을 되풀이하는 지식인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옛 선비들은 학문의 목적을 경세제민(經世濟民)에 두었는데 쌓은 지식을 드러냄에 있어 세상에 나아가서는 현실에 개입하고 물러나서는 세상을 밝힐 대안을 제시했다. 학자의 전통이 이러함에 있어서랴. 더욱이 임영방은 유학시절 인문학자의 소양을 쌓았으니 1970년대 초 서울시정 자문위원과 새마을운동 국책 위원회 문화분야 위원으로 참여하여 지식을 아낌없이 사용했던 것이다. 인간의 삶을 아름답게 꾸미고자 하는 정신을 인문학의 요체라고 여기는 이 젊은 학자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대안을 제출했다. 미술계를 사로잡고 있는 관전인 국전의 성격문제, 미술사의 관점에서 동상의 고증문제와 도시환경을 규정하는 환경조각의 향방, 개발과 보존의 갈등 속에 문화유산의 가치를 옹호하는 태도를 뚜렷이했다.

사찰 경내까지 점령한 잡상인을 퇴거하고 코앞까지 들어선 호텔을 철거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뜻밖의 권력에 마주친 임영방은 주저 없이 사퇴하였다. 하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물러나서는 비평활동으로 자신의 신념을 계속 펼쳐나갔다. ‘국전은 어디로 가나’ 및 ‘외국 관전의 실상’ 그리고 ‘민족예술의 계승’과 ‘유럽의 기념조각상’ 그리고 ‘누구를 위한 환경조각인가’와 같은 주제가 그런 것이다.

국립대학은 국가의 이념과 미래를 교육철학으로 구현하는 인문학 기관이라 할 것이다. 임영방은 국립 미술대학이 이러한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고 믿었고 따라서 ‘환경예술학과’ 개설을 제안하였다. 이 학과는 국민의 미적 환경을 책임질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인간을 위한 예술의 가치를 지향하고 있던 교수 임영방은 생활 속의 미술이 얼마나 중요한 인간의 과제인지를 깨우치고 있었고 그 신념을 대학이 수행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부의 냉소와 반대에 마주쳐 원대한 구상은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인문대로 옮긴 임영방은 경성제국대학 이래 철학미학으로 제한된 전통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예술미학으로 확장시켰다. 나는 이런 대목에서 감탄을 아끼지 못한다. 거대한 역사, 완고한 기관의 변화는 이런 개방된 사유의 소유자를 만나야만 가능한 것일까. 아무튼 1982년 인문대로 옮긴 뒤 1984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직 제안이 있었지만 서울대학생 민정당사 점거사건에 자신이 지도하는 전담학생이 무려 다섯 명이나 가담하였는데 이를 이유로 학교에서 거부했고 꼬박 십 년이 흐른 뒤 1992년에 가서야 관장에 취임했다.

 

미술의 지형도를 바꾸다

당시 우리나라 미술관의 수준이 너무 낮았기에 소년시절 박물관 출입, 석사시절 루브르박물관 연수, 1971년 루브르박물관 박물관학 과정으로 이어지는 경험만으로도 분에 넘치는 것이었다. 말이 국립 미술관이지 관료들의 기관에 불과하였는데 관장에 취임해 처음 만난 장애물이 미술관법과 시행령 따위로 강제된 바로 그 제도였다. 거대한 관료집단의 수중에 있었기에 개선은 불가능했다. 오직 관장이 할 수 있는 것은 운영의 권한을 살려나가는 것이었고 이를 통해 학예사 역량강화 및 작품구입 및 전시수행 중심 정책을 펼쳐나갔다. 대관을 폐지하고 젊은 작가를 초대하면서 해외전시를 유치하는 한편 열악한 예산을 보완하는 후원에 정력을 쏟았다. 나아가 해외전시 유치, 작품수집 제도개선 관련에도 적극 나섰는데 이런 정책은 거의가 제도가 아니라 관행으로, 후임 관장의 의지로 연명되었다. 그러나 이 마저도 최근 책임운영기관 전환으로 말미암아 20년 전으로 후퇴하고 말았으니 임영방 관장에게 그 사실을 설명 드리고 소회를 물었다. 말없는 미소가 되돌아 왔다. 함께 웃고서 그렇다면 당신이 5년 동안 재임하던 시절, 대중화 맥락에서 성공했던 몇 가지 기획전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다.

관장 취임 직후 미술계는 물론 대중의 시선 중심에 미술관을 우뚝 세워놓는 괴력을 발휘했다. 취임직전 33만에 머무르던 관객을 77만으로 끌어올렸고 1997년 퇴임 때 비로서 일백만시대를 열어놓았던 것이다. 경이로운 업적의 배경은 오직 하나 ‘폐쇄사회에서 상상 불가능한 기획력’인데 그 배경에 임영방의 ‘인간중심주의 철학, 인간을 위한 미술 철학’이 자리하고 있었다 할 것이다. 확실히 취임 초 백남준전에 이어 1993년 휘트니비엔날레와 아!고구려전, 1994년 민중미술15년전은 과천 시골미술관을 대중 속으로 끌어들였다. 시민의 시선을 사로잡을 줄 아는 관장이었다. 위 세 가지는 모두 주위의 우려와 강력한 반대,관료의 압력이 무섭도록 드셌었다. 예산 또한 엄청난 부담이었거니와 특유의 ‘자유와 개방의 신념’이 모든 장애를 돌파하도록 해 주었다.

임기 중 실현한 많은 일 가운데 기억나는 전시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휘트니비엔날레와 민중미술전을 꼽았는데 휘트니비엔날레의 경우, 마약, 인종차별, 성문제 같은 주제로 가득 차 있어 말들이 무성했음에도 서슴없이 개최했으며, 문화부 관료와 충돌하고 장관까지 나서서 안 된다고 했던 민중미술전을 추진한데 대해 다음처럼 회상했다. ‘그것은 하나의 역사였고 십년동안의 현실이었는데 어떻게 모르는 척, 부정할 수 있겠는가?’ 임영방 관장은 덧붙였다. ‘민중미술편이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대의 요청이었다.’ 덕분에 1995년 광주비엔날레 본부는 관장을 조직위원장에 위촉해 능력을 발휘할 것을 기대했다. 또 다시 장관과 국장 모두 불참을 종용했다. 하지만 임영방은 굽히지 않았고 혼신을 다했다. 모두가 인정하다 시피 광주비엔날레는 아시아미술의 중심기지로 성장했다. 실제로 이 모든 전시행사는 1990년대 한국미술사의 지형을 바꾸는 것이었고 미술관 관장으로서는 물론 임영방이란 인물 자신으로서도 거대한 업적이자 탁월한 성취였다.

 

인문정신의 사표

나는 임영방이란 이름을 떠올리면 자유와 개방의 인문주의자가 생각난다. 인간의 이상을 추구하는 인문주의자 임영방을 처음 발견한 때는 내 대학시절이었다. ‘미술은 사치스러운 것인가’라고 묻자 ‘삶의 가치와 하등 관련 없는 존재’로 전락한 미술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미술뿐 아니라 모든 것이 인간의 생과 결부되어 그 가치를 따진다’는 답변에 매료된 나는 미술 사회학에 기울었고 르네상스와 휴머니즘에 관한 깊은 통찰을 읽고서는 어느덧 자유와 진보의 세계관에 탐닉해 들어갔다. 실로 1997년 모든 공직을 사임하고 스스로를 감췄을 때 그가 여전히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언젠가는 복귀하실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출처관(出處觀)을 엄중히 하여 다시는 세속에 발들이지 않았다. 과거 스승에게 배운 그대로 학문탐구에 전력을 기울여 필생의 야심작이라 할 서양미술 삼부작 집필하여 십년만에 그 두 편을 내놓았고 지금은 3편에 혼신을 다하고 계신다. 내가 지금껏 읽은 그 어떤 저술보다 훨씬 뛰어난 깊이와 넓이를 새겨 두었거니와 학문의 깊이는 물론이고 대중 전달력까지 갖추고 있으니 세상을 향해 활짝 열어 둔 창문이 바로 그 저작이다. 나아가 성실한 독자라면 그 창문이 다름 아닌 인간의 이상이라는 사실까지도 깨우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선생이 꿈꾸는 그 이상의 정체를 알고 싶었고 질문했다. 선생은 모든 민족과 인종, 지역 문화의 고유성을 자신이건 타자건 망각하거나 무시해서 안될 것이라고 대답하면서 한국의 문화가 빈약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문화의 흔적에 대한 학문탐구가 빈약한 탓이라고 지적했다. 내가 듣기에 인문학으로서의 미술사와 미학의 부재에 대한 비판이었고 무엇을 위해 미술사학, 미학을 하는 줄 모른 채 자기만의 출세와 만족에 빠진 오늘의 학자군에 대한 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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