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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밖 미술비평_ 4.김우창

홍지석


직접적인 체험에 갇힌 심미적 시선
미술 밖에서 미술을 이야기하는 논자들이 흔히 범하는 잘못 가운데 하나는 미술작품을 그와 연관된다고 여겨지는 어떤 일화나 사건에 종속시켜 논하는 것이다. 「라오콘 군상」이라는 조각 작품을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 전하는 특정 일화로 환원시켜 설명한다거나,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 대한 논의를 7월 혁명의 역사적 전개에 대한 서술로 대체하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이 작품들은 그러한 일화, 사건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술작품의 의미란 그와 연관된다고 판단되는 일화나 사건에 국한될 수는 없다. 그것은 항상 말로는 쉽사리 표현할 수 없는 것, 즉 일화나 사건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빈번히 미술작품의 의미를 부지불식간에 어떤 추상적인 언어체계 속에 가두어 놓게 된다. 이것은 오감에 호소하는 영화에 대한 비평을 시나리오(문학) 비평으로 대체하는 것만큼이나 잘못이다. 그러한 접근은 한편으로 미술이나 영화에 대한 폭력이 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언어 자체의 시적 가능성을 훼손하는 폭력이 될 수 있다. 우리 지성사에서 이 문제를 가장 첨예하게 의식하고 그 극복 가능성을 탐색해 온 대표적인 논자가 바로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다.
감각과 합리성의 추구
그는 문광훈과의 대담집 『세 개의 동그라미』(한길사, 2008)에서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 안하는 것이 좋다”고 할 때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 저쪽에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의미를 이해하는 데 언어가 중요한 수단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언어 표현이 바로 우리 체험과 일치하는 것도 아니고 언어나 우리 체험이 반드시 주어진 현상, 더 나아가 실재에 일치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가 보기에 언어는 우리가 너무 많이 사용하고 수 만년 동안의 발달 과정을 거치면서 지나치게 고정된 추상적인 성격, 고정된 추상성을 지니게 됐다. 이런 이유로 언어는 우리의 실제 체험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단순화한 것을 다시 조금 복잡하게 해주는 것, 그럼으로써 보다 더 구체적인 경험을 표출케 해주는 것이 바로 시각예술과 청각예술이다.
그러니까 김우창이 보기에 음악이나 미술은 추상적 논설보다는 좀 더 직접적 체험에 가깝다. 음악과 미술이란 이러한 직접적 체험, 달리 말해 감각적이고 직접적인 체험, 경험적 사실을 표현한다. 하지만 그러한 직접적 체험을 그냥 표현해서 하나의 지적 작용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것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감각으로 말하고 합리성으로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곧 직접적 체험은 추상화, 형식화를 필요로 한다. 『세 개의 동그라미』에서 한 구절을 인용해보자.
'그림이나 음악, 문학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직접적 경험의 서술이나 재현을 통해 여기에 스며있는 일반적 원칙, 형식적 원리를 알게 하는 것이 인문교육의 핵심이에요. 그러니까 심미적 체험은 구체적인 것으로 돌아가면서 또 동시에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더 넓은 것을 이해하는 기제가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가 노성두와의 대담 ‘그림으로 발견하는 감각의 인문학’에서 밝혔듯 “가장 직접적 현실이라는 건 늘 감각적으로 주어지는데 이 감각적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합리적인 질서가 나오는가”를 관찰하고 해명하는 일이다. 이 문제를 미술과 관련해 본격적으로 다룬 저서가 바로 『풍경과 마음』(생각의 나무, 2002)이다. 여기서 그는 동양의 산수화와 서양의 풍경화를 대상으로 감각적인 체험이 어떻게 기술적인 실천으로 이어지는지살핀다. 『풍경과 마음』에서 그의 이러한 접근 태도를 잘 보여주는 한 대목을 인용하면 이렇다.
“동양화에 그려져 있는 바위나 산 또는 나무를 보면 순탄한 산이나 바위가 아니고 괴기한 것, 뭉쳐서 이상한 형태를 이룬 것이 많이 눈에 뜨입니다. ……바위의 개성을 표현하고 산의 개성을 표현하고 동시에 하나의 어떤 구조적인 형상을 표현하려는 것이 동양화에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자연을 통해서 어떤 힘, 어떤 마음의 힘 또 마음의 힘 속에 나타나는 자연의 힘, 이런 것들을, 다시 말해, 기운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필력, 골법 같은 것들을 중시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직접적 체험으로부터 합리적인 질서를 도출하는 형식화는 때로 지나치게 상투화돼 원초적 체험의 직접성을 벗어나고 그 결과 체험의 진실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는 이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누구 작품이라고 쉽게 알아볼 수 있게 의식적으로 만들려고 하면 안 된다.” 또는 “공식과 상투형은 그것으로 끝이다.”(『세 개의 동그라미』) 방법론적으로 구성된 객관성이란 언제나 직접적인 객관성은 아니기 때문에 다시 비판돼야 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원근법에 의해 상투화된 공간이해를 우리에게 새롭게 체험시켜주려 했던 20세기 실험예술들처럼 공식이나 상투형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창조적으로 직접적 체험으로부터 합리적인 질서를 이끌어내는 작가가 요청될 것이다. 우리 시대 화가 가운데 김우창은 오치균이 바로 그런 작가라고 생각한다(『김우창과 김훈이 보는 오치균의 그림세계』, 생각의 나무, 2008).
指頭로 물감을 캔버스에 칠해 표면이 거의 조각적인 요철을 이루는 오치균의 화면에서 김우창은 “거리의 조정에 따라 이 낱낱이 따로 있는 작은 덩어리들이 일정한 형태를 가진 물체가 된다”는 사실에 경이를 느낀다.
여기서 “혼란과 질서는 차원의 이동에 따라 몇 번이고 상호 교체되는 관계에 있다.” 그리고 그는 「뉴욕」 연작에서 「서울」 연작, 그리고 「사북」 연작 등으로 이행하는 오치균의 작업 전개를 꼼꼼히 살피면서 세계의 물질성과의 결합 속에서 늘 새롭게 확인되고 드러나는 지각의 원리와 과학적 원리에 감탄한다. 그가 보기에 오치균의 작업에는 늘 ‘발견의 즐거움’이 수반된다.
이 발견에 思惟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은 단지 사유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직접적으로 지각되는 것이라는 게 김우창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가 보기에 이것이야말로 ‘아름다움의 중요한 속성’이다. 여기에는 서사가 있지만 단순한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예술의 본질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근원적 서사다. 김우창은 이를 ‘화폭 속에 함축된 근원적 서사’라고 지칭한다.
지각되는 것 혹은 근원적 서사의 발견
나는 이렇듯 인간존재의 근원적 공간성으로의 복귀를 호소하는 김우창의 생각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 그가 특히 동시대 미술이나 음악을 바라보는 시야가 좀 협소하다고 느낀다. 무엇보다 그가 좋아해 마지않는 오치균 역시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누구 작품이라고 쉽게 알아볼 수 있게 의식적으로 만들려고 하면 안 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은 까닭이다.
또 가령 아르키펭코의 조각 작품을 논하면서 그것을 아르키펭코의 직접적 체험과 관련시켜 이해하기보다는 “얼굴이 비어있는 것은 사실은 근본적으로 우리 주체가 비어있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라며 그것을 (필자가 보기에 지극히 추상적인) 불교적인 관점에 간단히 귀착시키거나, 또는 “지적인 요소가 너무 강하면 음악이 좀 죽을 수 있다”면서 쇤베르크의 실험적 작품이 좋지는 않다고 말할 때, “미술의 경우 도장 찍듯이 하는 것은 지금 우리의 폐풍 중의 하나인 것 같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때, 나는 그가 어쩐지 자신의 직접적인, 새로운 체험에 얼마간 닫혀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든다.
홍지석 객원기자·미술평론가
원문 :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8388
1.오치균, 「눈내리는 날 2」, 캔버스에 아크릴, 87X131cm,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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