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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진의 미술관 속 로스쿨 <7>백남준 비디오 아트와 저작권

김형진

경기도 과천 산속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은 숨어있는 보석이다. 그다지 번잡하지 않은 평일 오후에 이곳을 찾으면 세계적인 작품들을 만나는 즐거운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을 들어서면 백남준 선생의 1988년도 작품인 ‘다다익선’(사진)이 우뚝 서 있다. 이 작품은 무려 1003개의 브라운관 TV모니터로 이뤄져 있다. ‘모나리자’와 같은 그림은 관리만 잘하면 수백 년이 지나도 별로 변하지 않지만, 전자제품을 사용한 현대미술은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관리가 어려워진다.
‘다다익선’도 처음에는 현란한 현대 과학 기술을 보여주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어느덧 나이가 들어버려 군데군데 모니터들이 꺼져 있다. 모니터의 수명이 다하기 때문에 그대로 놓아둔다면 앞으로 언젠가는 모니터가 모두 꺼져버릴 것이다.
하지만 저작권법에 따라 작가가 동일성 유지권을 가지기 때문에 작품에는 아무나 함부로 손댈 수 없다. 동일성 유지권에 따르면 미술 작품은 작가의 뜻을 나타낸 것이므로 저작물을 고치는 행위는 오직 작가만이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미술 작품은 창문의 커튼과는 다르다. 가게에서 커튼을 사오면 누구든지 자기 집에 맞게 커튼을 고쳐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미술품은 비록 구매자가 제값을 주고 샀더라도 작가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고치지 못한다.
가령 미술관이 많은 돈을 주고 헨리 무어의 조각 작품을 사오더라도 마음대로 작품에 색칠을 하거나 절단할 수는 없다. 다만 작품의 성질 등에 비춰 부득이하다고 인정되는 범위 안에서 약간 변경할 수는 있다. 그러니까 그림이나 조각의 전시 위치나 높이를 바꾸는 것 정도는 아마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백남준 선생은 생전에 TV 모니터와 같은 첨단 전자제품을 사용한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 이러한 작품들이 있는 사람들은 아직까지는 작품에 사용된 모니터와 같거나 비슷한 모니터를 구해 고장 난 모니터와 교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를 “부득이하다고 인정되는 범위 안에서 약간 변경한 것”이라고 보고 저작권법에서 말하는 동일성 유지권 문제는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자 기술의 발전에 따라 ‘다다익선’에 사용된 브라운관 모니터는 이미 우리 주변에서 사라지고 있으며 조만간 더 이상 생산되지 않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꺼져가는 모니터들을 어쩔 수 없이 브라운관 모니터 대신 LED나 LCD, PDP 같은 모니터로 바꿔야 할 것이다.
그런데 브라운관 모니터는 화면의 색감이나 잔상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최신 모니터들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최신 모니터들을 사용하기 시작한다면 백남준 선생이 처음 작품에 대해 생각했던 시각적 효과가 충분히 표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 또 1003개의 모니터가 여러 가지 다른 종류로 섞이게 되면 관객들은 그 모습을 낯설게 느낄 것이다. 더욱이 수년 뒤에는 LCD나 PDP조차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기술이 사용된 모니터들이 등장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다익선’은 브라운관 모니터 한 가지로 돼 있는 지금과는 달리 여러 종류의 모니터들이 섞여 있게 될 것이므로 다다익선이 아니라 ‘다다익악(多多益惡)’이 될 수도 있다.
아직 이런 문제에 대해 판례나 소송은 없었다. 하지만 후세 사람들이 고쳐감에 따라 점차 작품이 작가의 뜻과 많이 달라진다면 작가의 동일성 유지권을 침해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자꾸 작품에 손을 대려 하지 말고 그저 그대로 놓아둬야 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작품 이곳저곳이 고장 나는 것이야말로 바로 작가가 바라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작가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작품을 자꾸 변경하는 것은 마치 노년에 무리한 성형수술을 반복하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고 어색하다는 것이다.
여하튼 작품의 모니터들이 모두 꺼져버리기 전에 아이들 손을 잡고 과천에 가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과연 백남준 선생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까? 어떤 이는 백남준 선생이 생전에 작품을 새로운 기술이 적용된 모니터로 교체하도록 허락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작품을 어느 정도로 수리해가며 언제까지 전시할 수 있는지에 대해 미리 좀 자세히 물어보았더라면 더욱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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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진씨는 미국 변호사로 법무법인 정세에서 문화산업 분야를 맡고 있다.『미술법』『화엄경영전략』 등을 썼다.
-중앙선데이 2011.5.2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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