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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만의 현대미술 뒤집어 보기 <8> 척박한 시대의 예술가

최태만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간 이중섭
전쟁은 인간의 정신은 물론 삶 자체를 파괴하는 가공할 폭력성을 지녔다. 그런 폭력 중 가장 끔찍한 것은 역시 죽음이다. 한국전쟁은 많은 미술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에 앞장섰고 묵죽을 잘 쳤던 김진우는 북한군이 쳐들어왔을 때 서울에 남아 있다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1950년 12월 옥사했다. 북한이 자랑하는 선전화가 임홍은의 동생인 임동은 역시 부역자로 체포돼 경찰서 유치장에서 죽었다. 일제시대 이중섭 등과 함께 신미술가협회에서 활동했고, 전쟁발발 당시 홍익대 교수이기도 했던 진환은 1·4후퇴때 고향인 전북 고창군 무장면으로 내려가던 길에 국군의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일제강점기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입상하고 일본 수채회화전에서도 최고상을 받아 '조선의 지보(至寶)', '화단의 귀재'란 평가를 받았던 이인성은 서울수복한 직후인 1950년 11월 검문 중이던 경찰과 시비를 벌이다 화를 이기지 못한 경찰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오산에서 이중섭을 가르쳤던 임용련은 해방 직후 미군정에서 고문으로 활동한 것이 빌미가 돼 인민정치보위부에 체포돼 북으로 이송 도중 행방불명이 됐다.
전쟁은 미술가들을 정치노선에 따라 두 갈래로 갈라놓았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지리산에서 할거하던 남조선유격대(빨치산으로 더 알려져 있다)는 조직 안에 정치공작대를 만들어 문화예술인을 대원으로 배속시켰는데 오지호와 양수아 등이 그들이다. 남조선유격대 총사령부 정치부에 배속되어 활동하던 오지호는 1952년 2월 토벌대에 붙잡혀 재판에 해부돼 무죄로 석방됐다. 양수아는 이태의 빨치산 수기 '남부군'을 통해 소개된 바 있다.
한국전쟁은 비단 예술가를 죽음으로 내몰았을 뿐만 아니라 척박한 시대의 상처인 이른바 월북작가, 월남작가라는 부류를 만들어냈다. 해방과 한국전쟁 사이에 많은 미술가가 이념에 따라 또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각각 남과 북으로 갔다. 한국전쟁은 미술가들의 대이동현상을 야기했던 것이다. 월북이든 월남이든 고향을 떠난 예술가들에게 이산은 지울 수 없는 상처이자 평생 짊어져야 할 멍에였다.
월남과 이산, 그리고 비참한 최후란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작가로 이중섭을 들 수 있다. 강원도 원산 출신인 이중섭은 한국전쟁 중 원산의 집이 폭격으로 파괴되자 가까운 친척집으로 피신했다. 인천상륙작전 후 한국군이 북진하였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전세가 바뀌자 이중섭은 일본인 아내와 두 아들, 조카 영진을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1951년 부산을 떠나 제주도 서귀포로 갔던 그의 가족은 구호품으로 연명하는 비참한 생활을 하다 다시 부산으로 왔으나 생활의 어려움을 견딜 수 없어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중섭이 그린 '길 떠나는 가족'은 이런 사연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는 1954년 간염이 발병했을 뿐만 아니라 1955년 미도파화랑에서 가진 개인전의 은지그림(담배 은박지에 그림)이 '춘화'라 하여 철거당하고 그림값마저 떼이자 실의에 빠져 술로 분노와 시름을 달랬다. 자학에 빠진 그는 시인 구상의 주선으로 대구에서 개인전을 갖기도 했으나 1956년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음식을 거부하는 등 이상증상을 보였다. 청량리뇌병원에 입원했지만 정신이상이 아니란 진단을 받고 서대문적십자병원으로 옮겨져 숨졌다. 그는 하마터면 행려병자로 분류돼 화장당할뻔 했으나 친구들이 그의 시신을 발견,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었다. 이렇듯 이중섭의 비참한 최후는 전쟁이 남긴 개인 파멸의 한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국젠신문 2011.7.4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10704.22021193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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