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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진의 미술관 속 로스쿨 <9>진품 판화의 경계선은 어디

김형진

스페인 출신의 초현실주의 작가 살바도르 달리(1904~1989)는 4차원적인 작품을 남겼을 뿐 아니라 온갖 기이한 행동으로 가득 찬 신나는 4차원적 삶을 살았다. 여러 방면에 재주가 많았던 달리는 그림이나 조각뿐 아니라 판화 작품도 많이 남겼다. 진품이 하나밖에 없는 그림과 달리 필름이나 원본 틀을 가지고 복제할 수 있는 사진, 조각 그리고 판화에는 진품이 여러 개 있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판화는 작가가 동판이나 석판·목판 등에 직접 원화(master image)를 그리고, 그 원화를 가지고 작가나 작가의 지시를 받은 사람이 만들게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판화 작품을 작가가 작품으로 인정해야 비로소 작품으로 완성된다.
판화가 진품임을 입증하기 위해 보통 작가의 서명이 작품과 같이한다. 원래 판화, 사진 그리고 조각 작품 등은 진품이 여러 개 있지만 그렇다고 무한정 있는 것은 아니고 보통 수량이 한정돼 있다. 작가의 작품마다에는 작가가 이 원화를 바탕으로 모두 몇 장의 진품을 찍었는가를 표시하는 숫자를 표시한다. 이를 에디션 번호라고 한다.작가의 진품 숫자가 많을수록 그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므로 에디션 번호는 작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외국의 경우를 보면 간혹 작가들이나 화상들이 에디션 번호와 관계없이 작품을 마구 찍어내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 같은 일은 결국 작품의 가격을 크게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게 되어 소장자들에게 손해를 끼치게 된다. 이러한 행동은 작가의 몇 개 안 되는 진품 중 하나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소장자들의 신뢰를 저버리는 짓이며 더 나아가 범죄행위가 될 수도 있다.
늘 활력이 넘치던 달리도 말년에는 건강이 나빠져서 더 이상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됐다. 그러자 화상들의 요구에 따라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종이 위에 서명을 마구 해주곤 했다. 화상들은 달리의 서명이 있는 빈 종이들을 가지고 달리의 작품을 찍었다고 한다.
달리의 경우처럼 작가가 스스로 서명을 남발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작가가 사망한 이후 원화나 원본 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른바 진품을 수없이 만들어내는 것도 큰 문제다.
이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이 강구되고 있다. 가령 미국의 경우 1971년 제정한 법률에 따라 캘리포니아주에서는 모든 판화, 사진, 조각품의 판매자는 구매자에게 작가가 현재 살아 있는지 또 다른 진품들이 있는지 등의 정보를 상세히 밝히도록 하고 있다. 미국의 다른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법률이 시행되고 있다.
그런데 이 법의 규정을 위반하더라도 주로 민사적인 손해배상 책임만을 지게 되고 형사적 처벌은 없는 것이 보통이다. 실제로는 진품이 아닌 복제본을 산 사람들조차 설사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작품이 진품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판매자들에 대해 법적으로 문제를 삼지 않는 것이 보통이므로 이러한 법들이 실효성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구매자들이 소장 작품의 가치를 떨어뜨리기보다는 가만히 있다가 그 작품을 다른 사람들에게 비싼 값에 되팔기 위해 문제를 감추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상대적으로 작품의 가격이 높은 조각의 경우 원본 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작품을 계속 찍어내 에디션 번호에 관계없이 진품의 숫자가 계속 늘어나는 것이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를 일으켜 왔다. 이처럼 투명하지 않은 조각 에디션 문제에 대한 소장자들의 실망과 분노를 반영해 마침내 1991년 뉴욕주에서는 특별히 조각 작품의 복제에 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이 법에 따라 누구든지 일정한 가격 이상의 조각 작품에 대한 정보를 속이거나 에디션 번호를 조작한다면 벌금뿐만 아니라 형사처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에디션 번호를 속이는 사람은 이제 민사상 책임뿐만 아니라 형사적 처벌까지 받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도 간간이 에디션 번호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지만 그동안 이런 문제들을 법적으로 해결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앞으로 이처럼 판화나 사진, 조각과 같이 복제본이 범람하기 쉬운 분야에서는 이제부터라도 특히 공신력 있는 기관에 의한 검증이나 보장이 필요할 것이며, 더 나아가 의도적으로 작품의 정보를 속이는 사람들에게 무거운 처벌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통 판화 작품의 경우 원화를 가지고 만들었고 또 작가의 서명까지 있다면 진품으로 인정한다.
천재였던 달리는 1989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서명해 놓은 많은 종이들과 원화가 아직 남아 있으므로 그의 진품은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다.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나도 작품 활동을 계속하는 달리는 역시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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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진씨는 미국 변호사로 법무법인 정세에서 문화산업 분야를 맡고 있다.『미술법』『화엄경영전략』 등을 썼다.
-중앙선데이 2011.5.15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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