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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진의 미술관 속 로스쿨 <10>담벼락 낙서를 보는 법의 눈

김형진

옛날엔 어느 마을에나 동네 담벼락에 낙서하던 개구쟁이가 많았다. 꼬마들이 깨끗한 벽에 지저분한 낙서를 하다가 주인에게 붙잡히면 혼나게 마련이었다. 이처럼 그 시절의 낙서는 코흘리개들의 장난일 뿐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낙서야말로 인류에게 가장 오래된 문화적 행위다. 이제 귀중한 문화유산이 된 유럽의 라스코 동굴벽화나 알타미라 동굴벽화가 바로 구석기시대에 그려진 낙서이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의 낙서 전통은 폼페이 유적이나 그리스 신전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계곡의 바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낙서는 가장 오래된 문화적 표현이지만 예술로서는 그동안 제대로 대접받지 못해 왔다. 특히 서구에서는 1970년대부터 빈곤층 청년들이 스프레이 페인트로 거리 곳곳에 그림을 그려 대는 통에 거리가 상당히 어지러워졌다. 애써 예쁘게 가꾸어놓은 도시 곳곳에 아무렇게나 낙서를 하는 젊은이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게 된 지방자치단체들은 무질서한 거리 낙서를 규제하기 위해 여러 가지 법적 조치를 강화했다. 법원들은 낙서하는 사람들을 경범죄가 아니라 더 무거운 죄목으로 처벌하기 시작했다. 낙서를 뿌리뽑기 위해 스프레이 페인트 구입을 원천 봉쇄(?)하려는 시도가 계속됐다. 가령 미국의 시카고시에서는 아예 스프레이 페인트를 팔지도 가지고 다니지도 못하도록 하는 조례가 통과됐다. 뉴욕시에서는 미성년자에게는 스프레이 페인트를 팔지 못하게 하는 조례를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여러 가지 노력에도 거리 낙서는 오늘날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깊이 뿌리내린 지 오래다. 이제는 거리 낙서도 진화해 점차 독립된 하나의 예술로 인정을 받고 있다. 게다가 이 분야에서 키스 해링과 같은 세계적인 미술가들이 속속 출현해 그들의 작품은 세계의 유명 미술관에 전시되거나 엄청난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만약 키스 해링과 같은 유명 작가가 만든 낙서 작품이 화랑에서 전시된다면 그런 작품들은 당연히 예술 작품으로 인정받을뿐더러 저작권법을 비롯한 여러 법률의 보호를 받을 것이다.
그런데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작가가 다른 사람의 건물에 마음대로 그린 낙서도 예술 작품이 될 수 있을까? 만약 그런 낙서가 예술 작품이라면 당연히 저작권의 보호를 받을 것이며 작가는 동일성 유지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 저작권법은 “저작자는 그의 저작물의 내용·형식 및 제호의 동일성을 유지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동일성 유지권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작가가 아닌 다른 사람은 작가의 허락 없이는 작품의 내용, 형식, 제목 등을 더하거나 지우고, 자르거나 고치는 등 일체의 변경을 할 수 없다.
이처럼 작품을 약간 변경하는 것이 동일성 유지권의 침해가 된다면 작품을 아예 없애거나 지워버리는 것은 더 큰 문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저작권법은 동일성 유지권을 침해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거나 이 두 가지를 같이 부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동일성 유지권을 엄격히 적용한다면 비록 자기의 건물에 그려진 낙서라 하더라도 건물 주인이 그 낙서를 지우는 것이 법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다.
자기 건물에 그려진 낙서는 마음대로 지워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이 세상에는 자기 땅이나 자기 건물이라고 하더라도 주인 마음대로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가령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땅에 허락 없이 들어가 밭농사를 짓는다고 하자. 만약 그 작물이 어느 정도 자라게 되면 설사 땅 주인이라 할지라도 작물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나라 법이다. 비록 땅 주인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들어가 농사를 지었지만 농사짓는 사람은 법적으로 인정되는 경작권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건물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작가의 낙서 저작권을 이기지 못하게 될 우려도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그저 이론일 뿐, 아직 어느 나라도 그 정도로 거리 낙서를 보호하지는 않는다. 비록 똑같은 낙서라도 근사한 화폭에 담아 미술관에 전시하는 것과 길거리 담벼락에 그리는 것은 아직 커다란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어느 나라도 거리 낙서에 대해 동일성 유지권을 인정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아직 정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미국의 거리 낙서 예술가 리벅은 유수의 현대 미술관에서 작품전을 할 정도로 유명한 거리 미술 작가이지만 2011년 4월에는 세계적 작가인 그조차 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 계속 길거리에 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체포돼 결국 6개월 실형 선고를 받기도 했다. 미술에 대해 비교적 관대하다는 선진국에서도 이처럼 범람하는 거리 낙서 문제로 골치 아프기는 마찬가지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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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진씨는 미국 변호사로 법무법인 정세에서 문화산업 분야를 맡고 있다.『미술법』『화엄경영전략』 등을 썼다.
-중앙선데이 2011.5.23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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