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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人] 신보슬 토탈미술관 큐레이터

편집부

고마운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4년 전 ‘신정아 사건’으로 인해 ‘큐레이터’라는 직업은 이제 전 국민이 제대로(?) 아는 직업이 되었다. 종종 많은 이들이 작품을 파는 아트딜러나 갤러리스트와 혼용하기도 하지만, 큐레이터는 온전히 전시를 기획하는 사람이다. 큐레이터의 유형을 나눠보자면 미술관이나 아트센터 등 기관에 소속되어 소장품을 연구하고 전시를 기획하는 ‘기관형 큐레이터’, 전시기획안을 들고 이곳저곳으로 뛰어다니며 예산을 구하고 전시를 실현시키는 ‘독립큐레이터’, 그리고 또한 개인적 취향이나 관심사에 따른 특정 분야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켜 나가는 ‘전문 큐레이터’가 있다.
신보슬은 위의 세 가지 유형에 모두 속하는 큐레이터라고 할 수 있다. 2007년부터 평창동에 있는 토탈미술관의 큐레이터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독립적인 외부 활동도 겸하며, 쉼 없이 해외를 들락날락거리며 자신이 스스로 기획한 전시를 열거나 심포지엄에 참석한다. (한 번은 인천공항에서 필자와 우연히 마주친 적도 있다.) 이런 폭넓은 활동에 있어 신보슬 큐레이터가 다루는 주제는 대부분 ‘미디어아트’와 관련이 깊다.

기계, 미술에 꽂힌 이론가
신보슬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큐레이터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 미술선생님이 지금은 미술평론가로 잘 알려진 이재언 씨였다. 당시 미술선생님은 어린 신보슬에게 “감각은 있지만, 그렇다고 미대는 갈 만한 재능은 아니”라면서, 실기보다는 이론을 해보라는 조언을 해 주셨다고. 그래서 신보슬은 ‘큐레이터’를 염두에 두고 대학과 대학원에서 철학과 미학을 공부했다. 워낙에 기계를 좋아하던 터라 「정보화 사회에서 예술과 기술-인터랙티비티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석사논문을 썼다. 1997년의 일이다. 국내에 백남준 말고는 미디어아트를 다루는 작가도 거의 전무했던 시기다 보니 미디어아트를 전문으로 다루는 기관이 있을 리 만무했고, 그래서 신보슬의 첫 직장은 롯데화랑이 되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기획한 전시에는 어린이 관객들이 많았다. 단체로 전시장을 찾은 정신지체 어린이들이 전시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순간 난처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어린이들이 전시장을 마음껏 즐기고 그곳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배려했다. 그때 한 아이가 선물한 호랑이 그림은 아직까지도 소중하게 간직하며 매너리즘에 빠질 때면 꺼내 보곤 한다고.
미디어아트와 실질적으로 만나게 된 것은 그 후 SK그룹의 워커힐미술관이 미디어아트 전문기관인 아트센터 나비로 변신할 때의 창립멤버로 들어가면서부터이다. 하지만, 나비에서는 학술팀 소속이었기 때문에, 마음껏 역량을 펼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본격적인 미디어아트 전시기획자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세계 유일의 미디어아트 비엔날레인 ‘미디어시티서울’의 큐레이터를 맡은 2003년부터다.
미디어아트 전문기획자를 키운 세 가지 인연신보슬에게 미디어시티서울은 여러 면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미술계에서 그녀가 ‘미디어아트 전문 큐레이터’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고, 신보슬에게 중요한 인연들을 만나게 해준 장이였다. 첫 번째 인연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이원일 큐레이터. 당시 미디어시티서울의 총감독이었던 그는 신보슬을 미디어시티서울에서 함께 일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전시과정 중에 내부사정으로 이원일 총감독이 사퇴하고, 새로운 총감독이 부임했다. 실무는 당연히 신보슬 큐레이터에게 몰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결과적으로 ‘하드 트레이닝’을 받은 셈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원일 큐레이터도 과거에 롯데화랑과 토탈미술관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고 하니 묘한 인연이다.
두 번째 인연은 2004 미디어시티서울의 해외커미셔너였던 한스 D. 크리스트다. 그는 비엔날레라는 대형프로젝트를 마치고 정신적, 육체적 피로감으로 인해 슬럼프에 빠져있던 신보슬에게 큰 힘이 되어줬다. “머리와 몸을 함께 쓰고, 부단히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으며, 언어와 지역에 구애 받지 않고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큐레이터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직업”이라며 격려해주었고, 신보슬이 본격적으로 해외에 진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주었다. 한스가 디렉터로 있는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쿤스트페어라인 미술관의 장기 프로젝트인 ‘온 디퍼런스’(On Difference)에 《미들 코리아》섹션을 맡아 전준호, 양아치, 노순택 등의 한국작가를 소개했다. ‘미들 코리아’는 분단이라는 현실에서 출발하여, 대안적이고 이상적인 국가 공간에 대한 가상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 채택한 키워드였다. 작가들과의 네트워크에서 출발한 《미들 코리아》는 국가, 이데올로기, 차이 등 굵직한 담론들을 건드리는 훌륭한 촉매제가 되었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분단의 역사를 겪었던 독일에서 이들의 이야기는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세 번째 인연은 미디어아트 작가 다니엘 가르시아 앙두아르다. 스페인 출신의 그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소비한다’는 미디어아트에 대한 선입견을 무너뜨리는 젊은 미디어아티스트다. 첨예한 문제의식과 날카로운 시선으로 2009년 베니스비엔날레 카탈루냐관에 출품할 정도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가 2004년 미디어시티서울에 참여했을 때부터 오랜 시간 예술적 우의를 다졌던 신보슬은 다니엘 가르시아 앙두아르의 개인전을 한국으로 가져왔다. 2010년 토탈미술관에서 열렸던 그의 개인전 《포스트 캐피탈 아카이브》는 1998년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의 양상을 거대한 인터넷 아카이브로 구축한 프로젝트다. 만지면 반응하는 식의 단순한 인터랙티브에 익숙했던 한국관객에게 보다 고차원의 지적 인터랙티브를 경험하게 하는 전시로 국내 미술계에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포트스캐피탈 아카이브
photo by Hans D. Christ

예술로 도시를 해킹하라“미디어아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신보슬은 “이슈 파이팅”이라고 아주 간명하게 답한다. 테크놀로지는 그저 도구일 뿐, 미디어아트는 미디어와 관련된 사회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반응하고 새로운 논리를 창조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다시 말해 어느 날 갑자기 신문에 기사가 아닌 전혀 엉뚱한 것이 들어간다면 사람들이 당황하듯, 신문, 핸드폰, 뉴스, 영화 등 익숙한 미디어를 일반인이 생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끌고 나가는 것이라고. 그래서 신보슬은 꽤 오래 전부터 ‘해킹’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물론 개인정보시스템이나 금융사를 공격하는 그런 해킹은 아니다. 미디어 사용자를 능동적인 자리에 위치시키고자 하는 의미로서의 해킹이다.
이러한 관심은 2008년 서울시의 ‘도시갤러리 프로젝트’에 대칭을 이루는 컨셉으로 기획한 ‘Hack the City 프로젝트’로 구체화되었다. 그때 초대했던 작가는 미국의 그래피티 아티스트 집단 GRL(Graffiti Research Lab)로, 이들은 직접 고안한 프로그래밍 레이저빔을 이용해 낙서를 한다. 주로 깜깜한 밤에 이뤄지는 비물질적인 작업이다. Hack the City 프로젝트에서는 서울시내 주요 건물에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레이저로 쐈다. 그때 신보슬은 이전에 맛보지 못했던 일종의 ‘쾌감’을 느꼈다고 한다. 미디어아트도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를 향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직접 체험한 것이다.
그녀가 생각하는 미디어아트의 또 다른 장점은 얼마든지 장소에 맞게 포맷을 수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핸드백에 DVD 한 장만 가져가도 전시장 상황에 따라 모니터에 틀 수도 있고, 프로젝트에 대형 스크린으로 쏠 수도 있듯이 말이다. 물론 대형전시에 쓰이는 미디어아트 장비는 대여하는 데만도 상상을 초월하는 예산이 소요되지만, 신보슬이 기획하는 전시는 대부분이 테크놀로지보다는 이슈가 중요하기 때문에 장비가 중요한 요건은 아니라고 한다.


미디어아트 프로듀서 역할 개척중
신보슬이 일하는 방식에서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을 꼽는다면, 얼핏 느슨해 보이나 끈끈한 교우 관계이다. 큐레이터와 작가는 롱텀(Long-term)의 관계를 맺어야한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다. 작가와 큐레이터는 협업관계로, 오랜시간 소통을 통해 그 연결망을 견고히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녀는 앞서 소개했던 ‘온 디퍼런스’에서 전시오프닝을 마친 후 작가들과 함께 일주일 동안 독일 곳곳을 여행했다. 매일 보는 사람들이지만 낯선 공간에서 서로에 대해서 깊숙이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CeC&CaC’도 좋은 사례로 들 만하다. 몇 년 전 인도 델리에서 온 메일 한 통으로 시작된 전 세계 미디어아트 연구자들의 모임이다. 이들은 이듬해 히말라야로 갔고, 인도와 델리처럼 좀처럼 미디어아트와는 상관없을 것 같은 자연 속에서 비디오 스크리닝을 했다. 자비와 기금을 보태서 간 참가자들은 행사 기간 동안 아침부터 밤까지 종일 뭉쳐 다녔다고 한다. 신보슬은 미디어시티서울 같은 거대한 행사보다는 이런 프로그램이 더욱 애정이 간다고 한다.
작년 12월에도 작가와 대학원생 40여명을 이끌고 말레이시아에 갔다. 신보슬 개인에게는 부모님이 살고 계신 곳이자, 정신적 쉼터였고 작가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무대였다. 미디어아트라는 것을 처음 본 말레이시아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고, 마지막 날에는 모두 함께 소풍을 가기도 했다. 이 말레이시아 프로젝트는 올 11월에도 진행될 예정이라고. 이외에도 신보슬은 루마니아 작가전 등 토탈미술관의 전시를 비롯, 8월에 경기도 안성에 문을 여는 아티스트 레지던시 공간 준비로 올 한해도 정신없이 보낼 듯하다. 또한 작년부터 태국, 체코, 헝가리, 인도, 폴란드 등 6개국 큐레이터와 ‘Re-designing the East’라는 장기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기도 한데, 이 프로젝트는 협업의 가능성 아래 전시의 형태를 벗어나 파트너십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최근 신보슬은 전시보다 워크숍이 미디어아트에 적절한 소통 형식이 아닌지, 즉 본인의 역할이 전시를 기획하는 큐레이터가 아닌 워크숍을 만드는 프로듀서가 아닐까를 고민하는 것 같다. 이는 작년에 토탈미술관에서 열렸던 스페인 작가 다니엘 가르시아 앙두아르의 전시 《포스트캐피탈아카이브》에서도 잘 드러났다. 이 전시에서 메인 프로듀서는 작가였지만, 한국적 상황에서 리서치와 아카이브를 조정하는 일을 맡은 신보슬의 역할은 기존에 정의되는 ‘큐레이터’가 아닌 ‘프로듀서’의 역할에 가까웠다. 신보슬은 미디어아트 분야에 관심 있는 후배들에게도 그녀 스스로가 그랬듯 새로운 역할모델을 만들어 볼 것을 조언한다.

필자소개
호경윤은 동덕여대 큐레이터과를 졸업하고, 현재 미술전문지 월간 [아트인컬처](art in culture)의 수석기자로 재직 중이다. 전시《출판_기념회》(2008, 갤러리팩토리)를 기획한 바 있다. 블로그 트위터 @sayho11

-위클리@예술경영
http://www.gokams.or.kr/webzine/03_data/03_01_veiw.asp?idx=706&page=1&c_idx=37&searchString=신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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