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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人] 김희진 풀 디렉터

편집부

큐레이터 김희진은 평소 말이 많다. 그보다는 ‘할 말’이 많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겠다. 그녀가 과거 기획했던 프로젝트의 타이틀, ‘생각은 입에서 만들어진다’처럼 김희진은 미술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미술을 통해 사회 전반의 아젠다를 제시할 수 있는 발언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은 작년 11월부터 ‘풀’(구 대안공간 풀)의 디렉터를 맡으면서 크고 작은 프로젝트들로 가시화되고 있다.
생각은 입에서 만들어진다풀을 찾았을 때, 그녀는 연말 동안 300백 페이지에 달하는 풀의 연례보고서와 2008년부터 시작된 게릴라살롱과 2009년의 《정복되지 않는》 전시를 기반으로 하는 단행본 『연속과 강도』의 후반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간 개최되었던 살롱 및 각종 워크숍에서 튀어 나왔던 ‘말’을 담아내는 일이다. 그녀에게 미술은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듣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풀은 흔히 사회정치적 비판 의식이 강한 작가들의 작업을 지원하는 비영리 전시공간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전시뿐 아니라 워크숍, 세미나, 강연, 토론회와 같은 교육 활동과 아카이브, 출판 활동을 통해 현장 작업에서 생성되는 미지의 창작 언어들로 권위적인 지식 체계와 담론 구조를 자극한다는 미션을 중시하고 있다.”
그래서 유독 김희진이 진행하는 프로젝트에서는 워크숍이나 대담 프로그램이 중요하게 기능한다. 작가들 간의 긴장감 있는 대화, 그 가운데 일어난 화학작용을 통해 또 다른 담론이 생겨나기도 하고, 거창하게 말하자면 ‘오늘의 미술사’를 정리해 나가는 것이다.
시의 시각적 기호적 특성에 주목했던 문학도오늘의 김희진이 있기까지는 ‘세 번의 전향’이 있었다. 김희진은 원래 미술이 아닌 영문학을 전공했다. 대학과 대학원 시절 그녀의 흥미를 끌었던 문학 분야는 시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플럭서스 그룹의 시를 비롯해 구체시에 끌렸다. 즉 그녀는 문학의 수사적인 매력보다는 시각적, 기호적인 특성에 주목했던 것이다. 석사 논문 준비 차 미국에 잠시 체류했던 그녀는 그곳에서 아예 미술로 전공을 바꾸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바로 그 결심을 행동에 옮겨, 미국으로 미술사를 공부하러 떠났다. 이것이 그녀의 첫 번째 ‘전향’이다. 이후 현장에서의 아방가르드 실험을 꿈꾸며 미술관학을 공부하면서 구겐하임미술관 소호 분관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학업을 마치고 1999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녀가 본격적으로 한국 미술계에 데뷔한 것은 ‘미디어시티서울2000’에서다. 당시 서울시에서 뉴 밀레니엄을 맞이하며 야심차게 준비했던 ‘미디어시티서울2000’은 지금까지도 회자될 정도로 풍부한 예산을 배정 받아 세계적인 큐레이터와 작가들을 초청하고 서울 시내 전역을 전시장을 삼았던 대규모 전시였다. 거기서 김희진은 세계적인 큐레이터 바바라 런던을 도왔다. 규모도 컸지만 그보다는 관주도의 행사가 예술과 만났을 때 태생적으로 직면하게 되는 갈등과 한계를 배웠다.
그래서였을까. 그녀의 다음 행보는 키미아트갤러리였다. 평창동이라는 보수적 동네의 사설 화랑이 왠지 그녀답지 않은 선택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그녀는 바로 그곳에서 젊은 작가나 비주류 작가를 지원하는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개인이 하는 사설 갤러리이지만 대안적 성격을 띤, 다시 말해 대안공간보다는 좀 더 좋은 시설의 제3의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때 그녀가 발굴해 낸 작가가 문성식, 남경민, 박원주, 백정기, 애희 등이다. 전시를 열어 보고자 만났던 박이소는, 그 자신 뉴욕에서 ‘마이너인저리’라는 공간을 운영한 바 있는데, “그런 데에서도 해야 합니다”라며 응원을 보냈다.
“차별화 전략 위해 네트워크에 주목”그러나 역시 이때까지만 해도, 큐레이터 김희진의 ‘색깔’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 후 아트선재센터에서 1년여 동안 근무하면서 그녀는 점점 미술기관의 공공성과 윤리의식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고, 이전부터 간헐적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해 왔던 인사미술공간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이것이 그녀의 두 번째 전향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개안에 가까운데, 이때부터 소위 사회참여적 미술, 실천적 방법론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된 것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소속인 인사미술공간은 전시공간은 협소했지만, 컨텐츠로 보자면 한국미술에 끼쳤던 영향력은 지대했다. 특히 김희진이 인사미술공간에서 맡았던 역할은 주로 국제교류 및 워크숍이었다.
“전시장 규모로 보자면 아르코미술관이나 기타 국공립미술관에 비할 바 못된다. 한계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자체가 인사미술공간의 환경이고, 차별성이 되는 전략을 찾기 위해 전시 자체보다도 네트워크에 주목했다.”
5년 동안 인사미술공간과 아르코미술관에서 일하면서, 《2006화두: 생각은 입에서 만들어진다》, 《Dongducheon: A Walk to Remember, A Walk to Envision》 《욘 복 개인전》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특히 괄목할 만한 성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Museum As Hub’ 프로젝트이다. 2006년 뉴욕 뉴뮤지엄은 미국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대륙별로 5개의 현대미술 기관이 협업하는 장기 프로젝트 ‘Museum As Hub’를 운영했는데, 네덜란드의 반아베미술관, 이집트의 타운하우스갤러리, 멕시코 뮤제오따마요, 한국에서는 인사미술공간을 초대했다. ‘이웃’이라는 주제로 각 기관별 전시가 이뤄졌고, 2009년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뮤제오따마요의 공동 주최로 《정복되지 않는: 한국에서의 비판적 시각들》전이 열렸다. 김희진의 기획으로 1980년대 이후 현실 참여적 시선을 갖고 있는 작가 김범, 김상돈, 박찬경, 배영환, 임민욱을 소개했다.
김희진과 대안공간 풀이 만나세 번째 전향은 지금으로부터 약 1년 전에 일어났다. 5년간의 ‘철밥통’을 내던지고 나와 대안공간 풀의 디렉터로 온 것이다. 그런데 달리 보면, 이는 김희진의 전향이 아니라 대안공간 풀의 전향이기도 하다. 대안공간 풀은 1999년 당시 작가, 평론가, 기획자 등으로 이루어진 20여 명의 공동 발기인이 참여하여 설립된 국내에서 보기 드문 단체이다. 풀은 미술제도의 권력과 시장 경제가 경색시킨 예술에서 일탈하는 작업을 지켜내기 위해 작가들이 자생적으로 형성시킨 한국 대안공간 가운데 선발주자였다. 그간의 디렉터만 보더라도 박찬경, 황세준, 고승욱 등으로 작가 중심의 공간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여자 큐레이터’를 디렉터로 영입한 것은 대안공간 풀의 정체성에 있어서 대단한 변혁을 꾀하고자 하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올해 4월에 드러났다. 우선 이름을 대안공간 풀이 아닌, 그냥 ‘풀’로 바꿨다. 또한 건물도 대대적인 보수 및 리노베이션 작업을 했다. 공사 과정 역시 작가들의 예술로 승화시켰다. 작가 최정화와 함께 권용주, 김상진, 김상돈, 이수성이 ‘하하하 下下下 low low low’라는 이름으로 공간 재구성 프로젝트로 진행한 것이다. 기획 협업 파트너십을 맺은 신생공간 꿀이 위치한 이태원과 구기동 풀 두 곳에서 《긍지의 날》이라는 제목의 개관전을 대대적으로 개최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현실적인 과제는 예산 확보였다. 1999년 창립 이후, 400여 명의 회원이 지난 10년간 풀을 후원했는데, 김희진이 디렉터로 왔을 때는 겨우 4명만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다시 회원제를 정상적으로 가동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현재로서는 회원이 96명으로 늘어났고, 연간 회비 수입만 1천 3백만 원이 확보됐다. 또 작가 양혜규가 매년 500만 원씩 기부를 해 주고 있다. 그 외에도 기금 마련 전시 때 작품을 구입해 주는 등 “제발 살아남아 달라”며 직간접적으로 후원해 주는 사람들이 많아 큰 힘이 된다고 한다.
“근본적 진화는 창작의 작동원리에서부터”김희진 디렉터는 작가를 초대해 동시대적 관점에서 아카이브를 발굴하고, 재구성함으로써 역사성-동시대성을 획득하고, 결과적으로 자료와 창작을 수평적으로 연결하는 활성화 프로젝트 ‘아직도 낯선 그들’ 시리즈를 진행했다.
“부족한 예산과 인력으로나마 할 수 있는 수준의 아카이브 사업을 시작했다. 우선 [포럼에이]를 비롯한 2천여 항목의 인쇄물을 정리, 목록화 하는 작업을 했고 그중 관훈미술관, 그림마당민, 서울미술관, 이십일세기화랑, 한강미술관 등 현장에서 명멸한 기관에서 기증해 준 250여 항목의 스페셜 아카이브를 추출하는 작업을 했다. 근접한 미술사를 접할 길이 없는 동시대 현장 및 학계에 황당함과 분노를 느끼는 관객들을 보면서, 동시대 미술 현장에 대한 공적, 학술적 책임으로 아카이브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내년에는 또한 [포럼에이]를 출판사로서 부활시키고, 근현대 한국미술비평선을 홍콩의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Asia Art Archive)와 함께 연계해 번역, 배급할 계획이 있다. 그녀는 왜 이렇게 아카이브와 워크숍에 집착하는 것일까?
“근본적인 진화는 창작의 작동 원리에서부터 고려되어야 하는데, 거기에는 작가 개인의 창작적 논제와 현실에서의 성찰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근현대 미술사의 계보가 채 100년에 못 미치는 토대에서 작가나 큐레이터들이 현실의 생계에 부딪히며 스스로 논제를 세우는 일은 매우 어렵다. 따라서 기관에서 이러한 일을 인큐베이팅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미련할 정도로 ‘순수’하고 ‘관능’적인한때 대안공간에 대한 논의가 뜨거웠던 적이 있다. 그러나 ‘대안’의 의미는 시시각각 변화해야 한다.
“당시는 여러 대안공간들 각각의 차별성에 민감하지 못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풀은 지역의 역사, 정치, 경제적 현실과 공공에 대한 후기 식민주의적 사유에 입각하여 시각언어가 구사할 수 있는 화두와 담론을 강조해 왔다. 나는 풀만이 갖고 있는 정신적 유산을 토대로 지금, 여기에 꼭 필요한 공간으로 세우고 싶다.”
마지막으로 변화하는 동시대 미술 환경에서 유효한 큐레이터십에 대해 물었다.
“1990년대 대안미술 운동가들 사이에서 ‘포스트-낀(post in-between)’ 세대 큐레이터인 나의 역할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할까, 그리고 국제 미술계에도 소통될 수 있는 지역미술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자문해 본다. 이 시대의 큐레이터는 가이드이자 나침반, 코스모폴리탄 에이전트이자 멀티조정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큐레이터는 미련할 정도로 ‘순수’하고 ‘관능’적인 동기를 갖고 연대를 다지며 프로젝트 진행을 체화하고 책임지는 운동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필자소개
호경윤은 동덕여대 큐레이터과를 졸업하고, 현재 미술전문지 월간 [아트인컬처](art in culture)의 수석기자로 재직 중이다. [네이버] [주간동아] 등에 고정으로 글을 쓰고 있으며, 전시《출판_기념회》(2008, 갤러리팩토리)를 기획한 바 있다. 블로그 트위터 @sayho11
-위클리@예술경영
http://www.gokams.or.kr/webzine/01_issue/01_01_veiw.asp?idx=663&c_idx=&page=&searchString=김희진&newsYear=&newsMonth=&newsCategory1=&newsCategory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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