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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만의 현대미술 뒤집어 보기 <3> 부산 피란시절 김환기가 그린 '피난열차'

최태만

서정적으로 묘사한 전쟁의 고통
한국 현대사에서 최대의 비극인 6·25전쟁을 겪은 한국인으로서는 해마다 유월이 오면 전쟁을 기억할 수밖에 없다. 1953년 휴전으로 전투는 끝났을지언정 분단의 고착과 남북대립이 지속되고 있기에 전쟁은 아직 끝났다고 할 수 없다.
전쟁 중 임시수도로 전국에서 피란민이 몰려들었던 부산은 전쟁의 애환과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도시임이 분명하다. 급속한 경제성장과 도시의 팽창으로 전쟁의 흔적이 대부분 지워졌다고 해도 부산은 여전히 영도다리에서 '굳세어라 금순아'를 목놓아 불렀던 '삼팔따라지'들이 이산의 아픔을 간직한 도시이다.
부산이 마지막 피란처가 되었던 때는 1·4후퇴 직후였다. 이때 국군과 미군의 북한주민 소개령(疏槪令)에 따라 많은 북한주민도 남쪽을 선택했다. 전쟁 초기에는 수원,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떠밀려온 많은 미술가가 주로 부산·경남지역 출신 미술가들과 함께 문화예술인 단체인 문총이 조직한 구국대와 국방부 정훈국 소속의 미술대원 또는 종군화가단의 일원으로 전선에 나서 전황을 스케치했다. 1·4후퇴로 다시 부산으로 내려간 미술가는 일차 피란 때보다 더 길고 힘든 생활을 하며 전쟁의 현실을 기록한 그림을 그렸다.
그들 중에는 한국의 정서를 가장 훌륭하게 구현했다고 평가받고 있는 수화 김환기도 있었다.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불과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을 때 서울에 잔류했다 9·29 서울수복 후 부역자로 몰려 곤욕을 겪었던 그는 1951년 정월 초하루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달항아리' 등을 모두 남겨두고 한강을 넘어 남하했다.
당시 서울, 북한 등지에서 부산으로 밀려온 많은 미술가들은 낮에는 밀다원, 르네상스와 같은 다방에서 진을 치고 있다 밤이면 술로 시름을 달래는 것이 일과였다. 부산 피란시절 김환기는 영도 남항동에 있던 화가 이준의 다락방에서 1여 년 동안 기거했다. 김환기는 이 다락방에서 '피난열차', '판잣집', '항아리와 여인', '달과 항아리', '정물' 등을 그렸다. 해군종군화가단 소속이던 김환기는 1951년 대도회다방에서 열린 제2회 해군종군화가단 전시는 물론 이준, 한묵 등과 함께 후반기 동인전에도 참가했으며, 1952년에는 뉴서울다방에서 제3회 개인전을 갖기도 했다.
부산에서 김환기가 그린 작품 중에서 전쟁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피난열차'가 있다. 화물열차에 시루 속의 콩나물처럼 빼곡하게 들어찬 채 피란을 떠나고 있는 사람들을 그렸는데, 어둡고 비극적인 색조를 제외하면 이 사람들이 피란민인지 막연한 부분이 있다. 즉 이 작품은 객차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남부여대 지붕에까지 올라타거나, 더러는 객차의 연결부위에 매달려서라도 황급하게 피란을 떠나야만 했고 수시로 검문을 받아야 했던 급박하고 초조하며 위험한 피란열차 탑승의 경험을, 낭만적으로 그려놓음으로써 전쟁의 공포는 물론 피란의 절박함을 표현하지 못했다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단순하며 서정적인 필치와 평면적인 색채, 대상을 단순하고 도식적으로 포착한 점, 동일한 형태의 반복적 구성 등이 두드러진 이 작품에서 김환기 특유의 초기양식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렇듯 부산은 각지에서 피란해 온 미술가들이 어려운 환경에서 간신히 작업할 수 있던 마지막 도시였다.
다음 글에서도 전쟁 중 피란지 부산에서 제작했던 작품과 일화를 소개고자 한다.
- 국제신문 2011.5.29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110530.2202120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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