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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미술 비교]폭포의 물줄기 따라 이백의 詩가 흐른다

선승혜

선승혜 클리블랜드박물관 한국·일본미술큐레이터
여름 휴가철이 다가오고 있다. 휴가지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폭포이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 물줄기를 보면 가슴속까지 시원해진다. 논어에 보면 ‘인자한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仁者樂水)’라는 구절이 있다. 장대한 폭포는 아름다움을 초월하여 숭고함을 느끼게 한다.

동아시아 문인들이 애호한 폭포의 대명사는 중국 장시성(江西省)에 있는 여산폭포이다. 그 배경에는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701~762)의 ‘여산의 폭포를 바라보다(望廬山瀑布)’라는 시가 있다. ‘향로봉에 햇빛이 비치자 보랏빛 안개가 피어오르고, 멀리 폭포는 긴 강에 매달린 듯하다. 나는 듯 흐르는 강줄기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삼천 척이나 되어, 마치 은하수가 우주에서 쏟아지는 듯하다(日照香爐生紫煙, 遙看瀑布掛長川, 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 이 시는 폭포를 은하수에 비유한 백미로서, 한·일 문인들은 여산을 직접 여행하지 않고도 이백의 시를 통해 폭포의 이미지를 공유하였다.

아홉 마리의 용과 같은 금강산의 폭포

한국에서는 두 가지 계통의 폭포 그림이 제작되었다. 하나는 이백의 시처럼 중국풍의 복식을 입은 문인이 폭포를 바라보는 동아시아의 공통 도상이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의 폭포를 특정화하여 그린 한국의 고유 도상이다. 동아시아에서 공유된 폭포 그림은 조선 전기에 제작되었다. 서거정(1420~1488)은 고향이 같은 신윤종(申允宗)을 위해서 10폭의 그림에 시를 써 주었다. 이경윤(1545~1611)의 ‘관폭도’(고려대학교 박물관) 속의 인물도 중국풍의 복식으로, 이백이 여산에서 은거한 것처럼 살고 싶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고유 도상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폭포를 그린 것이 금강산의 구룡폭 그림으로 발전했다. 한 가지 예가 바로 클리블랜드박물관이 소장한 한운평의 ‘구룡폭’이다. 화면 하단에 승려가 두 명의 양반을 이끌고 폭포를 안내하고 있다. 불교적 의미를 암시하는 것일까?

그 해답은 세조(1417~1468)의 금강산 애착에서 찾을 수 있다. ‘세조실록’을 보면, 그가 왕이 된 1466년 윤 3월 28일 일본 국왕에게 보내는 글에서 금강산을 불교의 성지로 소개하고 있다. 금강산 그림은 세조의 주도하에 제작되어, 중국 명나라에 선물로 보내지기도 했다. 세조에 이어 예종도 1469년 명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한 사절단에 금강산도를 선물로 보냈다.

정조가 시로 애찬한 구룡폭

17세기에는 금강산의 풍경 중에서 구룡폭이 독립된 장면으로 등장한다. 금강산 그림은 송시열(1607∼1689)을 추종한 유학자들에게는 특히 그 의미가 각별하다. 송시열은 77세가 되던 1683년 4월에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구룡폭에 들렀다 한다. ‘숙종실록’에 보면 송시열이 1685년 9월 30일 ‘이이(1536~1584)가 젊은 시절 금강산에 들어갔으나 환속하여 유학에 전념하였다’고 변론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부응하듯 화가 정선(1676∼1759)은 금강전도와 병행하여 구룡폭을 단독 도상으로 제작했다.

불교에 관대했던 정조(1752~1800)는 1796년 6월 10일 세조의 위패를 모신 금강산 표훈사의 원당을 보수하도록 명한다. 같은 해 8월 25일 공명 승첩 250장으로 표훈사와 여주 신륵사를 수리하는 일에 원조해 주었다. 정조는 신하가 금강산을 유람한 기록을 보내오자, 구룡폭을 언급한 시로 화답했다. “수많은 계곡들이 모두 헐성루를 조회하는데, 구룡폭포는 하늘에 치솟아 흐른다. 기이한 경관은 비로봉 정상에 많이 있으니, 모름지기 노력하여 반드시 위에서 구하도록 하라(衆壑皆朝歇惺樓, 九龍飛瀑入天流, 奇觀多在毗盧頂, 努力須從上面求)’는 시가 ‘홍재전서’에 기록되어 있다. 구룡폭은 이처럼 왕이 시로 노래할 정도로 상징적 장소로서 18~19세기 화가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일본 선승들이 사랑한 이백의 한시
일본의 폭포 그림 역시 이상화된 풍경과 일본의 폭포를 그린 그림이 공존한다. 가마쿠라시대인 13~14세기경에 제작된 ‘나치 폭포’(네즈미술관)는 와카야마현에 위치한 폭포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이 폭포 그림은 부처가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 것으로 이해한 일본의 종교적 수용방식을 배경에 두고 있다.

15~16세기의 무로마치시대에는 선승 사이에서 한시가 유행하면서 이백의 ‘여산의 폭포를 바라보다’가 회자되었다. 아시카가 장군의 예술고문 역할을 한 게이아미(藝阿彌·1431~1485)의 ‘관폭도’(1480·네즈미술관)에는 이백의 시를 인용한 시가 곁들어져 있다. 동 시대의 선승 게이조 슈린(景徐周麟·1440~1518)은 ‘이백이 폭포를 바라보는 그림’을 보고 ‘황제가 은하수로 술을 빚어 술 연못을 만들고, 이백이 이 연못을 보고 술에 관한 시를 짓도록 부탁하였다. 한 잔으로 삼천 척이 다 없어지니, 진정으로 황제의 수건으로 입을 닦는 것 같다(帝釀銀河作酒池, 要看李白醉題詩, 一盃吸盡三千尺, 正是龍巾拭吐時)’라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한시를 소재로 한 전통은 에도시대 문인화가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다. 클리블랜드박물관이 소장한 다니 분초(谷文晁·1763~1841)의 ‘관폭도’는 중국풍의 복식을 한 문인이, 구름과 같이 뭉글뭉글 솟아오른 산의 정상에서 폭포를 내려다보는 구도로 무로마치 수묵화와는 다른 감각으로 이상적인 풍경을 완성시켰다.

같은 시기에 일본의 폭포에 관심을 기울인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1760~1849)는 다색판화(우키요에)를 통해 전국 각지의 폭포를 담은 ‘전국 폭포 순회(諸國瀧廻り)’를 드라마틱한 구도와 채색으로 제작하였다. 호쿠사이는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일본 최고의 화가이다.

예술이란 동아시아에서 상징적 도상을 공유한 것처럼 국제성과 향토성이 공존한다. 올 여름 휴가에서 폭포를 만난다면 이백의 시를 읊조리면서 옛 예술가들의 마음이 돼 보는 것도 좋겠다.
-주간조선 [2159호] 2011.06.06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159100028&ctcd=C09&c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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