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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만의 현대미술 뒤집어 보기 <9> 김보현, 낙원의 이방인

최태만

아흔을 넘긴 한 원로화가가 뉴욕에 거주하며 여전히 왕성한 작업활동을 하고 있다. 김보현. 그가 우리에게 낯선 것은 1957년 미국으로 떠난 후 거의 30년 동안 한국과 교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오월, 오랜만에 고국을 방문한 그를 만났을 때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놀랄 정도로 또렷한 기억력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던 기억이 난다.
1917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미술수업을 받은 김보현은 1946년부터 조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으나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자 공산주의자로 몰려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 끌려가 전기고문도 당하고 죽음 직전까지 두들겨 맞는 고초를 겪었다.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그의 시련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감시와 사찰을 받아야만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해 학생들을 인솔하여 홍도로 사생여행을 갔었는데 경찰은 그가 이 기간에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체포해 온갖 고문을 가했으나 이번에도 무혐의로 풀려났다. 한국전쟁 중에는 그가 거주하고 있던 광주를 점령한 인민군에 의해 미군에 부역한 반동분자로 몰리는 수난을 당했다. 미군 가족에게 개인교습을 했다는 것이 빌미였다.
그런 점에서 그는 이데올로기 대립이 격심했던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체험한 대표적 인물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의 이주를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1955년 일리노이주립대의 교환교수 로 갔다 임기가 끝나자 그는 귀국 대신 불법체류자의 삶을 선택했다. 뉴욕으로 이주한 후 짧은 기간이었지만 넥타이공장에서 도안 일을 하거나 5번가의 여성의류 백화점에서 디스플레이를 하며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던 그는 1964년 시민권을 획득하고 그 이듬해에는 평생 창작의 동반자였던 실비아(Sylvia Wald)와 만나 1969년 결혼함으로써 그의 삶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이 시기는 그가 미국으로 이주한 후 추구하였던 추상표현주의로부터 결별하고 구상적인 드로잉으로 바뀌던 때와 일치한다. 그렇다고 이 시기부터 그의 삶에서든 작품에서든 고통과 절망을 대신하여 행복과 환희가 자리를 차지했던 것은 아니다. 미국에 정착한 후에도 그는 거의 십여 년간 경찰에 쫓기는 악몽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억과 감정을 지닌 인간은 그것이 물리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것이든 자신이 겪었던 고통의 상흔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의 작품은 추상표현주의시대, 사실주의시대, 서사적 표현의 시대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서로 다른 경향을 관류하는 것으로 이산의 상처와 침묵, 망각, 그리고 기억의 재생을 들 수 있다. 즉 김보현의 삶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한국에서의 정치적 박해가 그로 하여금 미국에서 자유의 상징이다시피 한 추상표현주의에 몰입하게 만들었으나 그것은 그의 작품이 비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 즉 망각에 의해 추동된 탈정치적 지향성의 산물이었다.
추상표현주의 이후 그는 낙원의 풍경을 즐겨 그렸지만 자신이 그려놓은 낙원에서 그는 주인이자 이방인이기도 하다. 그 낙원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지상에 없는 땅이기 때문이다. 지상에는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 향한 열망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마치 그가 미국에서 어려운 생활을 견뎌내며 애써 지우려 했던 마음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정작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커졌던 것처럼 말이다.
- 국제신문 2011.7.10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key=20110711.22021194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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