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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만의 현대미술 뒤집어 보기 <14> 일본의 대표적인 전쟁 기록화가 후지타 츠구하루

최태만

처절한 태평양전쟁 실감나게 묘사


15일은 우리에겐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을 맞이한 광복절이지만 일본에선 종전일이라고 부른다. 타이완과 조선에 총독부를 세우고 1931년 류타오후(柳條湖) 사건을 빌미로 만주를 침략한 일본군은 1937년 7월 7일에 일어난 '루거우차오(蘆溝橋) 사건'으로 본격적인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마침내 1941년 진주만폭격을 통해 전선을 태평양으로까지 확대한 일본은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으로 무조건 항복하였다. 8월 15일 히로히토 일왕의 이른바 옥음방송을 통해 일본의 패전을 분명히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여전히 패전이라 하지 않고 종전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15년간에 걸친 전쟁은 일본의 미술계도 피폐하게 만들었다. 중일전쟁이 본격화되면서 그림으로 국가에 보답한다는 의미의 '채관보국(彩管報國)'의 구호 아래 육군성과 해군성 등이 조직적으로 미술가들을 동원해 작전기록화를 제작하도록 했던 것이다. 패전 직전에는 재료와 도구까지 통제, 보급함으로써 많은 미술가들로 하여금 전쟁기록화를 그리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전쟁 기간 가장 많은 작전기록화를 그렸던 화가로 후지타 츠구하루(藤田嗣治)를 들 수 있다. 1886년 도쿄에서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일본의 대표적인 근대 화가인 구로다 세이키로부터 배웠다. 1914년 26세의 나이로 파리로 가 제1차 세계대전 와중에 곤궁한 생활을 하였으나, 유백색의 누드화로 명성을 얻었던 그는 귀국 후 한동안 특이한 외모와 자유분방한 행동으로 일본 미술계에서 이국취향의 수혜자, 여성편력자로 취급되기도 했다.

1938년 10월, 해군성 촉탁으로 중국 양자강 유역에 종군하여 종군화를 제작하면서 그에게도 작전기록화 제작의 과업이 부여되었다. 초기에는 전쟁기록화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지만 군부가 국민을 고무하기 위해 큰 캔버스에 사실적인 그림을 요구하자 전장의 잔혹, 처참함, 혼란을 세부까지 농밀하게 표현한 대작들을 제출했다.

그가 제작한 작전기록화 중에서 태평양전쟁 중 처절한 전투장면을 실제상황에 필적하도록 실감나게 묘사한 것으로 '애투(Attu) 섬의 옥쇄(玉碎)'를 들 수 있다. 미합중국 알래스카에 속한 애투는 베링해 남단에 위치한 섬으로 1942년 일본군 130연대에 의해 점령됐다. 이 섬을 두고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1943년 5월 11일부터 30일까지 벌어진 전투는 미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2900여 명의 일본군 중 단 29명만 살아남아 포로가 될 정도로 처참했다.

신문보도를 통해 일본군의 옥쇄소식을 들은 후지타는 처절한 전투장면을 어두운 색조로 그렸다. 이 작품이 1943년에 열린 '국민총력결전미술전'에서 발표되자 군부조차 잔인한 장면이 국민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전투장면을 실감나게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즉 그는 처절한 전투현장을 순교의 이미지로 승화시키려 의도했던 것이다. 패전 후 미군은 일본군부가 위촉해 제작된 153점의 작전기록화에 대해 '예술이 아니라 프로파간다'라고 평가하며 몰수했는데 그중 후지타가 그린 것만 14점에 이른다.

전후 적극적으로 전쟁기록화를 제작한 미술가들에 대한 비난이 일어나자 후지타는 프랑스로 떠난 후 다시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프랑스로 간 후 그는 '내가 일본을 버린 것은 아니라 일본에 의해 버려진 것이다'라며 서운함을 표현하기도 했다. 마침 부산공간화랑 신옥진 대표가 부산시립미술관에 기증한 작품 중에 후지타가 일본을 떠난 후 제작한 작품도 포함돼 있으니 관람하면 그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국제신문 201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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