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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만의 현대미술 뒤집어 보기 <19> 위조지폐인가? 예술인가?

최태만

도쿄올림픽이 한창이던 1964년 10월 16일, 흰색 가운을 입고 가정에서 사용하는 청소도구를 든 여섯 명의 젊은이들이 도쿄의 중심가 중 하나인 긴자에 나타났다. 당시 일본은 올림픽을 위해 온 나라가 청결을 강조하고 있었는데 토요일 오전부터 하루 종일 방 빗자루, 설거지할 때나 쓰는 스펀지, 수세미 등을 이용해 도로에 걸레질을 했다.


관청에서 제작한 듯한 분위기가 나는 '청소중'이란 입간판을 세워놓았을뿐 아니라 하얀 가운에 붉은색 완장을 찬 이들의 청소하는 모습이 너무도 진지하고 성실했기 때문에 누구도 해괴한 행위로 보지는 않았다. 심지어 경찰조차 이들을 격려하며 차도는 위험하니 조심하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들은 '수도권 청소정리 촉진운동에 참여하자'란 전단을 인쇄해 배포하는가 하면 많은 단체로부터 협찬을 받기도 했다. 거리청소란 행위예술을 주도한 이들은 20대의 일본 전위예술가들이 조직한 '하이레드센터'의 멤버들이었다.

1962년 8월 또는 1963년 5월 어느 날 일본의 젊은 전위예술가인 다카마쓰 지로(高松次郞), 아카세가와 겐페이(赤瀨川原平), 나카니시 나쓰유키(中西夏之) 세 명이 모여 단체를 결성하고 자신들의 이름 첫 글자에 착안하여 모임의 이름을 '하이(高) 레드(赤) 센터(中)'라고 붙였다. 이들은 도쿄의 제국호텔 340호에 투숙하며 발가벗은 자신들의 뒷모습을 촬영한 사진을 등신대로 확대하여 벽에 걸어놓고 안내장을 보고 찾아온 관객들에게 그 앞에서 사진을 찍도록 요구하기도 했다. 물론 관객들은 옷을 벗지 않았지만.
그런데 이 전후 일본 전위예술을 주도하던 한 작가가 화폐 위조범으로 기소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37년 요코하마에서 태어난 아카세가와는 1963년 천 엔권을 복사하여 전시하고, 300여 장을 유통시켰다. 그는 복사한 지폐로 가방, 가위, 망치, 옷걸이 등과 같은 기성품을 포장하기도 했다. 마침내 경찰이 이 '물건'들을 아직 사용하지 않은 사제(私製) 지폐와 함께 압수하고 위폐를 제조한 아카세가와와 복사를 도운 동료들을 위조범으로 기소했다.

위폐사건에 대한 제1차 공판이 1966년 8월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렸다. 지금까지 자신들의 행위를 '예술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던 이들에게는 지폐를 복사한 것이 예술인지 범죄인지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스스로 변호해야 하는 위기의 순간이 왔다. 부르주아 냄새가 나는 예술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며 해괴하고 기상천외한 행위를 통해 반예술을 실천하고자 했던 아카세가와는 자신이 범죄자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공소를 제기한 검사와 판결을 내릴 판사 앞에서 이 위조지폐가 예술임을 주장해야만 했다.

그는 회화나 조각과 같은 전통적인 장르, 그것도 풍경이나 인물을 재현한 것만이 진정한 예술작품이라고 믿고 있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반예술을 추구하던 동료 작가들이 발표했던 노끈 등을 증거로 제시하여 법정을 졸지에 예술의 개념과 경계에 대해 숙고하는 토론장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방청객이던 니지마란 한 청년의 얼굴은 물론 온 몸을 빨래집게로 결박하여 '이것도 예술이다'라고 강변했다. 말하자면 니지마란 청년의 몸은 캔버스이고 빨래집게는 그 위에 남긴 예술가의 붓질과도 같은 것이었다. 긴장이 감돌아야 할 법정에 일순 폭소가 터져 나왔다.

그렇다면 법원은 어떤 판결을 내렸을까. 1970년 대법원은 아카세가와에게 3개월의 중노동형을 선고했다. 이 희대의 위폐사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도 소개하고자 한다.

국민대 교수·미술평론가

-국제신문 2011-9-26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10926.22021185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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