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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만의 현대미술 뒤집어 보기 <20> 법정에 선 예술가

최태만

일본 아방가르드 예술가 아카세가와 겐페이가 천 엔 권을 복사, 유통시키다 체포돼 실형을 언도받은 사실은 지난 글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이때 경찰이 그로부터 압수하여 유치한 물품 중에는 실제 천 엔을 크게 확대한 지폐뿐만 아니라 작은 규격으로 복사한 지폐를 연결해 포장한 서류가방과 가위, 망치, 옷걸이, 술병 등도 포함돼 있었다. 사실 기성품을 포장하는 행위는 이제 현대미술에서 결코 낯선 것은 아니다. 크리스토란 예술가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해변, 파리의 퐁뇌프, 베를린의 국회의사당을 아예 천으로 포장하기도 했지 않은가. 문제는 이 포장재가 지폐라는데 있다.


제도와 관습을 거부하는 예술가들이 벌이는 기발하고 도발적인 행위는 종종 법정분쟁까지 야기하기도 한다. 자신의 동료 샤로트 무어맨과 함께 무대에서 거의 반라인 채 자신이 제작한 전자 첼로를 연주했던 백남준은 독일에서 크게 문제 삼지 않았지만, 뉴욕에서는 공연 직후 곧장 체포되었다. 말하자면 백남준과 샤로트 무어맨은 풍기를 문란케 하는 공연을 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의해 끌려가야만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1985년 이른바 민중미술 논란을 불러일으킨 '한국미술 20대의 젊은 힘전'에 출품한 작품을 경찰이 압수하고 이에 항의하는 미술가들을 연행해 구류에 처한 일도 있었다. 이 경우 제5공화국 체제에서의 정치적 이유가 작용했지만, 아카세가와의 경우 지폐를 복사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요즘에도 일본에선 예술작품 속에 표현해서는 안 될 금기가 작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천황의 초상을 왜곡하거나 풍자하지 않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법으로 규제하고 있지 않지만 천황은 여전히 일본인들에게 신성불가침과 같은 존재이다.


어쨌든 아카세가와로부터 압수한 물건들은, 1960년 미국과 체결한 안보조약에 의해 야기된 안보투쟁과 같은 시위현장에서 압수한 헬멧, 조직폭력배들이 사용했음직한 쇠파이프, 기타 온갖 범죄에 동원된 각종 증거물들과 함께 도쿄 지방재판소 지하창고에 유치됐다. 만약 유죄판결이 나면 이 압수품들은 즉각 폐기될 수 있기 때문에 아카세가와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이 지하창고를 찾아가 압수된 자신의 '작품'을 열심히 카메라로 촬영해 두었다. 마침내 재판이 열렸을 때 피고인석에 앉아 있어야 할 아카세가와는 이 압수품들이 범죄에 동원된 증거품이 아니라 예술임을 증명하기 위해 온갖 현대미술의 예를 실연(實演)했다. 엄숙하고 진지해야 할 재판정이 예술행위를 공연하는 무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 아카세가와의 위조지폐는 사회를 혼란케 할 반사회적 목적으로 제작된 것도 아니고 천 엔 권 지폐 속에 인쇄된 쇼토쿠 태자를 풍자한 것도 아닌, 말 그대로 해프닝이자 이벤트의 의미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검사는 그를 위조지폐범으로 기소한 것이 아니라 신성해야 할 지폐를 모독함으로써 일본의 정서에 반하는 혐의로 기소했다. 이 사건이 어느 정도 수습된 후 아카세가와는 친구와 함께 일본 문화유적을 답사한 답사기와 함께 명화감상과 관련한 저술을 출판하여 문학가로서도 명성을 얻었다.

국민대학교 교수·미술평론가

-국제신문 2011.10.2
http://wcms.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1600&key=20111003.2201819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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