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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만의 현대미술 뒤집어 보기 <21>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책을 씹어 먹은 사나이

최태만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미국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미술평론가로 잘 알려져 있다. 1939년 '아방가르드와 키치'를 시작으로 미술평론가로 활동한 그린버그는 '더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 '모더니스트 회화' 등의 글을 통해 평면성을 회화의 존립근거로 내세우는 규범적이고 교조적인 모더니즘 미술이론을 펼쳐나갔다. 1961년 자신이 썼던 글을 모아 출간한 '미술과 문화'는 미국은 물론 모더니즘을 추종하는 유럽의 많은 미술가들에게 필독서와도 같은 영향력을 미쳤다. 이 책에 그린버그 모더니즘미술론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모더니스트 회화'는 수록하지 않았으나 당시 미술가들에게 이 책이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그런데 그린버그의 책을 씹어 먹은 사나이가 영국에서 나타났다. 1921년 잠비아에서 태어난 존 라삼으로, 영국으로 이주한 후 오랫동안 개념미술가로 활동하다 2006년에 사망한 작가이다. 이론물리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예술, 과학, 사회학을 융합한 평면시간(flat time)이란 개념으로 작업을 하는가 하면 책을 찢어 붙이거나 불태우는 등의 분서(焚書)작업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오래된 책을 캔버스에 붙이고 이를 태우고 수정하여 만든 '스쿱 타워'란 제목의 부조작업을 발표한 적이 있다. 스쿱이란 알쏭달쏭한 단어는 책(books)을 거꾸로 쓴 글자로서,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지만 뒤집어 읽으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라삼을 일약 유명인사로 만든 사건이 1966년 그가 조각가 배리 플레이너건의 도움을 받아 기획한 '정지와 씹기(Still and Chew)'라는 이벤트였다. 당시 그는 런던의 세인트 마틴 미술대학에 시간강사로 출강하고 있었다. 어느 날, 대학도서관에서 그린버그의 유명한 '미술과 문화'를 대출한 다음 자신의 수업을 듣는 학생과 손님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라삼은 초대받은 손님들 앞에서 그린버그의 책을 찢어 나눠주고 그것을 껌처럼 질겅질겅 씹은 후 자신이 미리 준비해 놓은 플라스크 속에 뱉어 내도록 했다.

마치 현대미술의 권위 있는 이론에 대한 우상파괴와도 같은 이 이벤트에 참가한 사람들은 신나게 책장을 찢어내 씹은 후 자신의 타액과 함께 그것을 플라스크에 저장했다. 이상한 의식을 치른 라삼은 타액에 의해 해체된 책의 파편 속에 이스트를 넣어 발효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용기 속의 물질 중에서 펄프는 침전하고 타액은 투명한 액체로 분리되었다.

1년 쯤 지나자 대학도서관에서 책의 반납을 독촉했고, 몇 차례 독촉장을 받은 라삼은 책장이 찢겨나간 남은 책과 유리용기를 들고 도서관으로 가서 도서관 직원에게 책으로 인정해달라고 떼를 썼다. 물론 사서가 그것을 접수할리 만무했고, 이 일로 라삼은 더 이상 세인트 마틴 미술대학에 출강할 수 없었다.

그러나 뉴욕근대미술관(MoMA)은 가죽 케이스에 담긴 이 이상한 액체와 파손된 책을 미술작품으로 인정해 소장했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미술평론가의 저서를 훼손한 이 작품을 미국의 대표적인 미술관이 소장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사건'이 오브제로서 현대미술관 속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에서 미술관의 탐식증이 거침없음을 알 수 있다.

-국제신문 2011.10.17
http://www.pusannews.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11017.2202119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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