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김형진의 미술관 속 로스쿨 <31>종교와 문화재 파괴

김형진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려고 계유정난을 일으켜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한 1453년은 서양에서도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해다. 비잔틴 제국이라고도 불리며 천년 동안이나 화려한 위용을 자랑하던 동로마제국이 오스만투르크에 무너진 것이다. 동로마제국은 수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이 포위된 상태에서도 완강히 저항했지만 치열한 전투 끝에 수도가 함락되면서 마침내 멸망했다.


이때는 유럽 땅에서 기독교를 믿는 나라와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들이 몇 백 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 등과 같이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서로 간에 살육과 학살을 서슴지 않았던 시대였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채 적국 수도를 함락시킨 오스만투르크는 그 화려한 도시를 어떻게 했을까?

전쟁이 끝나고 500년이 훨씬 지난 오늘날 터키에서는 많은 기독교 유적을 볼 수 있다. 특히 아야소피아에 가면 누구나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거대하고 멋진 건물은 4세기에 그리스정교회의 성당으로 지어진 것으로, 오스만투르크의 지배에 놓이기 전에는 천년 동안 동로마제국의 종교적 상징이었을 만큼 그 규모와 내부 디자인이 뛰어났다. 아야소피아는 런던의 세인트폴 대성당이나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세워지기 수백 년 전에 세워진 성당으로 건축학적 가치가 대단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오스만투르크는 이 건물뿐 아니라 대부분의 기독교 시설들을 파괴하거나 해체하지 않았다. 단지 건물 내부만 조금 고친 다음 이슬람교 사원으로 계속 사용했다. 심지어 아야소피아의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기독교 벽화들조차 긁어내거나 벗겨내지 않았다. 단지 그 그림들이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가리기만 했을 뿐이다.

그뿐만 아니다. 20세기에 오스만투르크의 뒤를 이어 들어선 터키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지난 500년 동안 이슬람교의 중심 사원으로 사용되어온 이 건물을 국립박물관으로 삼았다. 이는 아야소피아가 터키나 이슬람교의 재산이라기보다는 인류 공동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므로 어느 특정 종교의 사원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국립박물관으로 탈바꿈한 아야소피아는 단장을 끝내고 그동안 가려져 왔던 찬란한 비잔틴 벽화들을 외국인들에게도 보여주게 되었다. 아야소피아에 있는 그 멋진 벽화 중에서도 예수와 성모 마리아 그리고 세례자 요한을 그린 디시스 벽화는 가장 유명하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아들 예수를 쳐다보는 큰 눈동자를 가진 성모 마리아의 쓸쓸한 얼굴은 천 년 전에 유럽 사람들이 생각한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격렬한 전쟁을 치른 오스만투르크가 전쟁이 끝난 후에 적이었던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벽화들을 보존해온 덕분에 오늘날 이런 멋진 벽화가 종교를 떠나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있다.

이처럼 오스만투르크와 그 뒤를 잇고 있는 터키는 이슬람교의 나라이지만 사람마다 서로 다른 종교나 인종의 차이를 인정하고 용서와 관용의 정신으로 인류의 다양한 문화 유산을 잘 지켜왔다. 16세기부터 시작된 유럽의 종교개혁운동 도중 기독교를 믿는 나라들조차 그동안 전해온 자기 나라의 기독교 성화와 조각들을 대규모로 파괴한 것을 보면 오스만투르크의 관용 정신이 얼마나 멋진 것인지 알 수 있다.

물론 1990년대 아프간의 탈레반 정권이 이슬람 정신에 맞지 않는다며 불교문화유적을 마구 파괴했듯 이슬람 정권이라고 해서 전부 마음이 넓은 것은 아닐 것이다. 탈레반의 경우처럼 어떤 정권은 종교에 관계없이 과거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조직적으로 자기 땅의 문화재를 파괴한다. 오늘날 우리 옆 나라들이 우리 민족의 소중한 유적들을 감추거나 그저 방치하기도 하고 혹은 찬란했던 한반도 문화의 흔적을 왜곡하기 급급한 것을 보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이처럼 자기 땅에 있는 외국 문화의 흔적을 고의적으로 파괴하지는 않더라도 정부가 앞장서서 문화의 흔적을 왜곡하거나 감추는 일은 매우 흔하다. 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는 2003년 아프간 정부의 바미얀 석불 파괴와 같은 의도적인 문화유적 파괴를 규탄하는 선언서를 채택했다. 하지만 이렇게 각국 정부가 자기 땅 안에 있는 문화재를 파괴하거나 왜곡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강제력을 가진 국제법은 아직 없다.

편협한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존한 고마운 마음씨 덕택에 우리는 터키에서 천 년에 걸친 멋진 비잔틴 미술품을 지금도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터키는 인류 문화유산 보존에 큰 공헌을 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때도 우리나라에 상당한 병력을 파병해 뛰어난 전공을 세운 고마운 나라이기도 하다. 10월 24일은 국제연합기념일이고 10월 29일은 건국 영웅 케말 파샤가 터키공화국을 세운 터키의 건국 기념일이다. 우리말로 “고맙습니다”는 터키말로 “사울른”이라고 한다. 사울른 터키!

- 중앙선데이 2011.10.23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3536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