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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人] 윤재갑 베니스비엔날레 커미셔너

윤태건

당분간은 백수다!
윤태건 _ THE TON 대표

미술계의 아웃사이더였던 윤재갑이 베니스비엔날레 커미셔너 자리를 꿰찾을 때 많은 사람이 놀라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한국미술의 주류는 대부분 서구에서, 특히 영미권에서 유학한 사람들이었다. 큐레이터, 평론가는 물론 작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의 커미셔너 선정은 그동안 한국미술계가 일방적인 서구 편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오지로 향한 발길늦었지만 커미셔너 선정을 축하한다.
진짜 많이 늦었다. 벌써 전시 오픈한지 한참 지났다.(웃음)

커미셔너로 선정된 것을 놀라워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들었다.
운이 좋았다.

너무 겸손한 거 아닌가?
작년에 베니스비엔날레 커미셔너를 선정하는 위원회가 열렸었다. 선정위원회에서 그동안 커미셔너가 하나같이 미국 유학파였음을 인정하면서 이제부터라도 아시아 쪽으로 눈을 돌려 균형감을 찾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들었다. 내가 선정된 이유가 그거다. 타이밍이 좋았을 뿐이다.

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경제학과에 입학하자마자 때려 치고, 뒤늦게 미술 쪽으로 전향(?)한 것도 그렇고, 홍익대 예술학과에 재입학해서는 전공공부는 뒷전이었다. 학점이 C와 D사이를 오가면서도 소설과 시, 철학과 역사, 인문학에 더 심취했었다. 더구나 그가 유학을 갔었던 90년대 중·후반의 중국과 인도는 말 그대로 국제미술계의 변방을 넘어 오지였었다. 대부분은 미국이나 영국으로, 나머지는 프랑스, 독일, 일본 등으로 유학을 가던 시절이었다. 그는 벼락처럼 중국으로 떠났고 잠시 후 그가 다시 인도로 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갑자기 중국에 가게 됐는데?
1995년 대학 졸업식 다음날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특별한 계기라도?
지금 생각해보면 반은 치기였고, 반은 모험이었다. 한국미술을 알려면 중국미술을 알아야 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었다.

당시만 해도 중국과 인도로 유학 가는 한국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랬다. 특히 미술 쪽에는 거의 없었다. 우선 의사소통 때문에 베이징 제2외국어대학에서 중국어부터 배웠다. 그러고 중앙미술학원에서 중국근현대미술사를 전공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베이징 외곽에 통다오라는 술집을 열기도 했다.

무명화가와 술집 사장과의 상관관계
통다오?
통다오는 한문으로 통도(通道)다. 이치가 통하고, 길이 통한다는 뜻이다. 원래 중국인이 운영하던 술집으로 자주 혼자 술 마시러 가던 곳이었는데 내가 인수했다. 술집이름은 마음에 들어서 그대로 두고, 내부 인테리어를 전위적인 스타일로 싹 바꿨다. 지금에서야 베이징, 상하이에 가면 많이 볼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중국에서는 정말 아방가르드 했다. 통다오는 이름처럼 내 삶의 새로운 문이 되었다.

문화예술인이 많이 왔겠다.
주말이면 자리가 모자랄 지경이었으니…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싶은 욕구가 강했던 문화예술인들이 특히 많이 왔다. 유에민준(Yue Min Jun), 장샤오강(Zhang Xiaogang), 팡리쥔(Fang Li Jun), 양샤오빈(Yang Shaobin) 같은 작가들이 매일 같이 찾아왔었다.

하나같이 지금은 중국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이다. 소더비, 크리스티 경매에서 수십, 수억원을 호가하는 국제적인 대스타들이다.
그때만 해도 무명의 가난한 화가였다. 나는 유학생이자 술집 사장이었으니 공짜 맥주를 주곤 했다.

그때 술 값 대신 작품을 받았으면 지금은 부자가 됐겠다?
하하 그랬을 것이다. 그들과는 밤새도록 술 마시며, 싸우고 그렇게 지냈다. 문화혁명 이후 중국 아방가르드가 막 태동하던 시기였다. 작품들이 워낙 힘이 좋고 독창적이어서 잘 될 거라고 생각했다. 다들 기대 이상의 대스타가 되었다.

갑자기 또 인도로 갔는데?
중국미술을 공부하다보니 중국문화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인도가 궁금해졌다. 마침 가난한 반체제 예술가들이 모여드니 공안의 압박도 심해지고, 개인적인 일도 있어서 내친김에 인도로 가게 됐다. 1997년의 일이다.

인도에서도 여러 예술가들을 사귀었다고 들었다.
중국에서 알게 된 인도 친구들 덕택에 인도의 철학자, 예술대학 교수, 언론인, 예술가 등을 소개받았다. 타고르대학에서 인도미술사를 전공했는데, 평범한 유학생 신분이었다면 만나기 힘들었을 인도의 여러 분야의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인도 뉴에이지 그룹의 모든 멤버들이 친구였다.

만났던 작가들이 중국과 인도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국제적인 작가로 성장했다. 그때 쌓았던 네트워크가 대단하다.
운이 좋았을 뿐이다

개념 없는 개념주의는 싫다또 겸손이다. 좋은 작가를 알아보는 안목은 좋은 큐레이터의 기본이 되는 것 아닌가?
베니스비엔날레 커미셔너를 맡은 것도 그 덕택이었던 것 같다.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에 대해 평가가 좋다고 들었다.
사실 부담감이 많았다. 다행히 현지 언론 및 미술계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베니스 현지 코디네이터가 그동안 한국관 전시가 이렇게 좋은 반응을 얻은 적이 없었다는 귀띔을 했을 때 사실 기쁘기도 했다.


한국관 전시 제목이 서정적이다.
전시 타이틀이 《사랑은 갔지만 상처는 곧 아물겠지요》(The Love is gone, but the Scar will heal)>다. 총감독 비체 쿠리거(Bice Curiger)가 제시한 베니스비엔날레 주제는 '일루미네이션즈'본지 132호 칼럼 '2011 베니스비엔날레 탐방기' 보기 이다. 비체 쿠리거는 이것을 'ILLUMI-nations'으로 일루미와 네이션을 따로 쓰면서 국가별 이슈와 정치적 문제를 건드렸다. 즉 경제적 공동체와 단일 국가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문화적 보편성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동안 유럽 문명의 여러 가지 문제점과 국가 그림자를 한꺼번에 망라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한국적 상황하고는 조금 안 맞는 것 같은데.
그렇다. 분단국가로서의 한국과 계몽주의 발생지이자, EU로 통합된 유럽공동체의 상황은 맞지 않다고 보았다. 우리는 식민주의 종주국이 아니므로 고민의 출발점부터가 다른 셈이다. 거기다가 사회역사적 맥락이 삭제된 개념 없는 개념미술의 형식주의도 싫었다.

한국관은 항상 공간이 문제였다. 이번에도 같은 어려움을 겪었나?
역대 커미셔너 중에 공간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겠나. 건축물로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전시장으로는 별로다. 한국관이라는 공간을 그대로 두면서 가장 맞춤인 작가에 대해 고민했는데 이용백이 답이었다. 그룹전으로 하지 않고 단독 작가로 간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럼 가버린 사랑은 혁명, 미술의 사회적 발언, 이제는 퇴색한 개념미술에 오마주로 해석될 수도 있겠다.
해석은 읽는 사람의 마음이다. 좀 더 다층적인 의미를 갖고 있으니까. 어쨌든 시간이 지나면 상처는 아물지 않겠나.

앞으로의 계획은?
베니스비엔날레 커미셔너 일이 끝났다. 물론 아직 마무리할 것이 남았지만. 이젠 다시 백수다.

스타가 되고 싶냐고
파주로 간다고 들었다.
당분간은 백수다. 일단 비용을 줄여야 한다. 아무래도 서울보다는 경비가 적게 든다. 내가 애가 3명이다. 한명은 왼쪽 어깨에, 한명은 오른쪽 어깨에, 막내는 머리에 얹고 다닌다는 느낌이다.

아시아미술 쪽에 네트워크도 튼튼하고, 루프(대안공간)와 아라리오(상업화랑) 운영 경험도 있는데다, 베니스비엔날레 커미셔너까지 했으니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이다. 스폰서가 되겠다는 사람도 있지 않나?
없지는 않다. 하지만 스폰서라는 게 대체로 상업적인 목적이 강하다. 함부로 받기가 힘들다. 친하게 지냈던 쟝사오강 같은 중국작가들이나 수보드 굽타(Subodh Gupta) 같은 인도작가들은 초기에는 미술을 통해 사회적 발언을 했다. 하지만 스타가 되는 순간 이미 작품의 내용과 그 작품의 쓰임은 완전히 달라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문화혁명 과정에서 부모를 잃은 일곱, 여덟 살짜리가 혼자 지내면서 느꼈던 슬픔, 분노, 그리움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술로 표현됐다. 장샤오강 얘기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경매에서 수십억 원에 거래될 때 이미 그의 예술은 유효하지 않게 되는 거다.

미술로 돈을 번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일이라는 얘기인가?
나도 스폰서 제안을 받아들이는 순간, 혹은 전적으로 미술시장에 들어가는 순간 그렇게 될 것이다. 아직은 좀 더 다른 실험들을 하고 싶다. 파주에 들어가는 이유다.

미술경영 지망생과 작가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자본가와 임금노동자로 양분화 됐다. 그런데 미술경영, 특히 작가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왔다갔다 한다. 이 일은 회색지대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힘들 수밖에 없다.

좀 희망적인 얘기를 해줄 수는 없나?
버텨야만 이 일도 할 수 있다. 단지 이왕 해야 하는 것이라면 즐기길 바란다. 좀 더 긴 호흡을 갖고….

필자소개
윤태건은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학사, 석사과정을 마쳤다. 삼성문화재단 환경미술팀과 카이스갤러리 디렉터, 아르코주빈국조직위원회 사무국장, 미술은행 운영위원, 국립현대미술관 평가위원 등을 역임한 바 있다. 현재 THE TON 대표 및 동덕여대 큐레이터학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본지 편집위원이다.
theton01@hotmail.com


-위클리@예술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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