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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미술 비교] 병상의 왕을 일으킨 포도 예술 속으로 들어가다

선승혜

동아시아에 포도가 전해진 것은 언제쯤일까.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사기(史記)’ 대원열전(大宛列傳)에는 포도주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중앙아시아 동부에 위치하였던 대원(Ferghana)이라는 지역에서는 포도로 술을 담그고, 부자들이 술을 담가둔 것이 만석에 이른다. 오래되어도 맛이 변하지 않는다.’ 기록에 따르면 한나라 사신이 대원에서 포도 씨를 가지고 왔다고 돼 있다.
  
   아시아인들에게 포도는 퍽이나 이국적인 과일이었다. 동아시아의 예술품에서 포도 문양은 먼저 금속품·염직·기와의 장식 문양으로 사용됐다. 한국과 일본은 중국 당나라의 포도 문양을 다양하게 수용했다. 통일신라의 안압지에서 발굴된 기와인 ‘포도 넝쿨무늬 암막새’(국립경주박물관)에는 패턴화된 포도와 당초 문양(덩굴 무늬)이 새겨져 있다. 일본 나라(奈良)현 도다이지(東大寺)에 있는 왕실 유물 창고인 쇼소인(正倉院)에도 포도 당초 문양이 그려진 조각천이 있다. 일본의 다카마츠고분(高松塚古墳)에서 발굴된 ‘동물 포도 문양 거울(海수葡萄鏡)’도 동물과 포도로 장식돼 있다. 동물과 포도 모티프를 결합한 청동 거울은 고려시대에도 유행했다.
  
   
   왕들이 사랑한 포도
  
   포도주는 13세기 말에서 14세기에 고려 왕실에서 사랑을 받았다. 고려 충렬왕은 1298년, 1302년, 1308년에 원나라 황제로부터 포도주를 선물 받았다고 ‘고려사절요’는 기록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왕실학자로서 1324년 원나라 과거 시험에 합격한 안축(安軸·1282~1348년) 은 투루판 사람에게 포도주를 선물 받고 시로 답례했다고 전해진다. 이색(李穡·1328~1936년)은 국내에서 열린 연회에서 포도주를 마신 감상을 한시로 표현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마유(馬乳) 포도와 수정(水晶) 포도가 별도로 언급된다. ‘동의보감’은 자줏빛이 나는 것을 마유라 하고, 흰빛이 나는 것을 수정(水晶)이라고 적고 있다. 마유 포도는 오늘날의 적포도, 수정 포도는 오늘날의 청포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조선왕조실록’은 포도를 ‘왕의 약재’로 이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태조가 1398년 9월 1일 병상에서 수정 포도를 먹고 싶어하자 김정준(金廷雋)이 바쳤다고 적혀 있다. 같은 달 3일 한간(韓幹)이 수정 포도를 바치자 태조가 매우 기뻐하여 쌀 10석을 내려 주었다는 것은 포도가 매우 귀한 과일이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태조뿐만 아니라 세종도 포도를 먹고 병이 회복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성종은 1492년 8월 12일에 술과 포도를 승정원·홍문관에 내려주고 한시인 근체시를 지어 바치게 했다. 1500년 10월 14일 연산군은 마유 포도 한 가지를 승정원에 내려서 맛보고 시를 지어 바치게 했다. 연산군 1505년 7월 25일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승정원 마당에서 자라던 수정 포도를 승지들이 따서 얼음 넣은 쟁반에 담아 바치니 연산군이 직접 어제(御製)한 시구를 하사했다. 연산군이 지은 시구는 다음과 같다. ‘얼음 채운 청포도 알이 달고 시원해, 진실한 마음이 옛날 그대로인 것이 기쁘네. 포도는 몹시 취한 주독만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병든 위와 상한 간도 고쳐주겠네.(氷盤濃碧味甛寒, 自喜誠心賴舊完. 不啻可消沈酒毒, 應和病胃與傷肝.)’
  
   
   병풍·시·기와·거울·술병 속으로
  
   이처럼 조선 전기에 포도는 왕들의 사랑을 받았고 포도 그림도 매우 유행했다. 미국 클리블랜드박물관이 소장한 조선시대 전기의 ‘포도 그림’은 걸작 중 하나다. 수묵 담채로 그려진 이 작품에 묘사된 포도 알은 새콤한 즙으로 가득 차서 투명하게 잡힐 것 같다. 먹으로만 그려져 있지만, 포도 알을 투명하게 그린 기법을 보면 수정 포도라고 불린 청포도를 그린 듯하다.
  
   동시대에 조선 왕실의 대학자인 서거정(徐居正·1420~1488년)은 조선시대 문신인 채신보(蔡申保·1420~1489년)의 소장품 중에서 강희안(姜希顔·1419~1464년)이 그린 ‘비바람 속의 포도 그림(風雨葡萄圖)’과 ‘밝은 달 아래 포도 그림(明月葡萄圖)’을 감상하고 나서 한시를 썼다. 서거정의 시를 빌려 클리블랜드박물관의 포도 그림을 감상하자면 ‘포도 덩굴은 용, 포도 알은 여의주와 같으며, 포도주는 어떤 관직과도 바꾸지 않을 만큼 달콤하다’.
  
   포도 그림이 매우 생생하게 그려진 것은 화가가 포도를 직접 관찰했기 때문이다. 포도 그림을 그린 것으로 알려진 강희안은 조선 전기의 왕실 학자이자 시서화에 뛰어난 예술가였다. 그의 집안은 세종과 이질 관계로 조선 왕실과 혈연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영의정 심온이었다. 그는 ‘훈민정음해례본’이나 ‘동국정운’의 편찬에 참가한 왕실 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화훼에도 정통하여 ‘청천양화소록(菁川養花小錄·1449년)과 같은 원예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그의 ‘양화소록’은 일본에 건너가 에도시대의 본초(本草) 학자들에게 널리 읽혔다고 한다.
  
   
   18세기 제사상에 오른 포도
  

  16세기에는 포도가 한국과 일본의 공예품 장식에도 사용된다. 조선시대인 1563년 10월 26일 평안도 관찰사 임열이 명종에게 헌상한 8매의 벼루에는 용·매죽문과 함께 포도 문양도 그려져 있었다. 나전칠기함에 포도 문양을 사용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가마쿠라시대 초기인 13세기경에 가이노쿠니(甲斐國·현재 야마나시현)에서 포도 재배를 시작했다고 한다. 무로마치시대에 일본 선승들이 지은 한시인 오산문학에는 포도를 정원에서 기르는 즐거움과 포도 그림에 대한 감상 등이 세련된 어구로 묘사돼 있다. 동시기에 제작된 ‘포도 문양 칠기 술병’은 포도 문양을 흑색 칠기 바탕에 주색 칠로 그린 것으로, 포도와 포도주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명품이다. 포도주는 17세기 조선과 에도시대의 외교사절단 연회에서도 사용됐다. 1636년 조선통신사의 부사로 일본에 파견된 김세렴(金世濂·1593~1646년)은 기행 일기 ‘해사록(海槎錄)’에서 ‘1637년 2월 18일 대마도에서 열린 향례에 포르투갈에서 가지고 온 포도주가 준비되었다’고 기록했다.
  
   18세기에는 포도와 포도주가 제례에도 사용됐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조가 제사에 올리는 과일 중에서 건시(乾枾)는 계절이 이르고, 밤은 껍질을 벗겨 오랫동안 두면 색이 쉽게 변하므로, 건시 대신 홍시를 쓰고 밤 대신 포도를 쓰도록 허락한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제례에서 포도가 밤 대신 사용되면서, 민간에서 포도는 다산과 번영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와 함께 포도 그림 병풍도 민간에서 유행했다.
  
   이육사의 시처럼 포도는 ‘먼 데 하늘이 꿈꾸면 알알이 들어와 박혀, 두 손을 함뿍 적셔가며’ 먹고 싶은 과일이다. 우리나라 왕들의 포도 사랑을 멋진 예술 작품과 함께 만끽하기를 권한다.

 

-주간조선 [2155호] 2011.5.9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155100027&ctcd=C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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