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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민화의 세계]중국 풍경을 한국 산수로 승화시킨 ‘소상팔경도’

정병모

상상력 넘치는 기하학적 표현, 현대회화 보는 듯

자연풍경을 그린 민화의 소재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무엇일까. 금강산? 관동팔경? 단양팔경? 모두 아니다. 정답은 소상팔경(瀟湘八景)이다. 소상팔경이란 중국 후난(湖南) 성의 샹장(湘江·이하 상강)과 둥팅후(洞庭湖·이하 동정호)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 여덟 가지를 일컫는다. 여덟 가지 절경은 샤오수이(瀟水·소수)의 물줄기와 상강 상류지역이 만나는 곳에 내리는 밤비(瀟湘夜雨·소상야우)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소상(瀟湘)이란 이름이 붙었다. 한반도와 거의 같은 크기의 후난 성에서 동정호는 심장에, 상강은 동맥에 해당한다.

경치를 여덟 가지로 한정한 것은 중국에선 8자가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숫자 8은 재물을 얻는다는 뜻의 파차이·發財의 앞 글자와 발음이 비슷함) 아직까지 우리 조상들이 소상팔경에 다녀갔다는 흔적은 찾기 힘들다. 아마 중국에서도 이름난 유배지인 데다 우리나라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에 위치한 탓일 것이다.

○ 풍부한 문화와 역사가 담겨 있는 자연 

중국의 소상팔경도가 우리에게 전해진 때는 고려시대인 12세기다. 대표적인 것이 송나라의 문인화가인 송적(宋迪)의 팔경시(八景詩)와 팔경도(八景圖)다. 고려 명종은 이인로(李仁老)와 진화(陳P) 등 문신들에게 소상팔경시를 읊게 했다. 또 고려의 대표적인 화원 이녕(李寧)의 동생 이광필(李光弼)에게 소상팔경도를 그리게 했다. 아쉽게도 이들의 작품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소상팔경은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800여 년간 우리나라 산수화의 대표적 소재로 자리 잡았다.

소상팔경도의 인기는 민화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민화 산수화 중 금강산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 아니라면, 눈을 감고 그냥 소상팔경도라고 해도 십중팔구는 맞을 정도로 그 비중이 높다. 민화뿐만 아니다. 도자기, 문방구, 가구, 자수, 심지어 도장에 이르기까지 생활 곳곳에서 소상팔경의 이미지를 만날 수 있다.

이렇게 광범위한 소상팔경의 인기는 남한에만 100여 곳의 ‘팔경’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소상팔경을 본떠 관동팔경 관서팔경 단양팔경 등 전국 곳곳을 팔경이란 이름으로 치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옛 사람들은 왜 소상팔경에 열광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소상팔경의 ‘역사적 풍광’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당나라 두보(杜甫)와 이백(李白·이태백), 송나라 범중엄(范仲淹) 같은 쟁쟁한 문인과 송적, 미불(米(불,비,패)) 등의 유명 화가, 그리고 현대의 마오쩌둥(毛澤東)…. 이렇게 수많은 인물이 문학 회화 서예로 이 지역 경관의 아름다움을 찬탄했다.

그런데 필자가 실제 소상팔경을 탐방해보니 경치가 그렇게 빼어난 편은 아니었다. 차라리 같은 후난 성에 있는 장자제(張家界)나 위안자제(袁家界), 광시좡(廣西壯)족자치구의 구이린(桂林) 등의 경치가 훨씬 특이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이들에겐 소상팔경 같은 풍부한 인문학적 콘텐츠가 없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힘이요, 문화의 힘인 것이다. 

○ 독특하고 자유분방한 민화 소상팔경도

소상팔경도만큼 중국적인 주제도 없다. 그러나 이것을 가장 한국적인 그림으로 전환시킨 이는 무명의 민화작가들이다. 소상팔경도가 갖고 있는 시적인 상상력에다 민화 특유의 자유로움이 보태지면서 매우 독특하고 자유분방한 조형세계가 창출됐다.

일본민예관에 소장된 ‘소상팔경도’ 중 평사낙안(平沙落雁·모래톱에 내려앉는 기러기 떼)은 민화 산수화 중에서도 걸작에 속한다. 산을 보면 현대화가 유영국의 작품을 연상케 할 만큼 기하학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구불구불한 윤곽선을 톱니바퀴처럼 디자인하고, 산들이 겹친 모양은 삼각형 패턴으로 구성했다. 산속의 질감은 마치 옹기장이들이 환치듯이 자유로운 곡선으로 휘갈겨 표현됐다. ‘동정추월(洞庭秋月·동정호에 뜬 가을 달)’은 또 어떤가. 이태백이 강에서 뱃놀이를 즐기는 중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져 죽은 장면을 해학적으로 표현했다. 산수화임에도 불구하고 스토리텔링까지 집어넣은 것이다.

평사낙안과 동정추월이 한 화면에 조합된 작품도 있다. 일본 구라시키민예관 소장 ‘산월과안(山月過雁)’이다. 둥근 보름달은 동정추월을 나타내는 도상이고, 줄지어 내려오는 기러기 떼는 평사낙안의 특색이다. 이러한 융합은 민화에서만 가능한 기발한 착상이다. 작가의 ‘도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쏜살같이 내리꽂히는 기러기 떼의 모습에는 해학이 충만하다. 아울러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춤을 추는 산 위 나무에서는 흥겨운 분위기가 넘실댄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 한비자(韓非子)는 “귀신을 그리기는 쉬워도 개는 그리기 어렵다”고 했다. 귀신이야 눈에 보이지 않으니 어떻게 그려도 되지만 개는 우리와 친근한 동물이기에 잘 그렸는지 못 그렸는지 누구나 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상팔경은 쉽게 가볼 수 있는 경치가 아니기에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가 많다. 민화작가는 둥근 보름달, 기러기 떼, 비바람에 휘날리는 대나무 등 팔경을 나타내는 최소한의 특징만 살려둔 채 나머지는 자유롭게 그렸다. 소상팔경도의 인기가 높은 만큼이나 표현도 다양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 동아일보 2012.8.25
http://news.donga.com/3/all/20120824/488618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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