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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 소녀와 재혼한 53세 루벤스…활기넘친 명작으로 `회춘`

정석범

그림 속의 세 여인이 저마다 두 팔로 서로의 몸을 정겹게 감싸며 둘러서 있다. 미소 가득한 표정 속에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가득하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삼미신(三美神)이다. 이들은 아름다움, 매력, 다산(多産) 등 인간의 미덕을 대표하는 여신으로 보통 세 명이 짝을 지어 신체를 맞대고 마치 원무를 추는듯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렘브란트와 함께 플랑드르 바로크를 대표하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1640)가 그린 이 그림은 보티첼리, 라파엘로 등 선배들이 그렸던 삼미신에 비해 풍만한 신체와 다이내믹한 율동감이 두드러진다. 뿐만이 아니다. 선배들이 그린 삼미신은 서로 다른 세 인물을 모델로 한 것이지만 루벤스의 그것은 한 여인을 모델로 해서 그려졌다. 얼핏 보기에 헤어스타일과 색깔에는 차이가 있지만 실은 같은 인물이다. 바로 자신의 둘째 부인인 엘레나 푸르망이다. 엘레나를 각기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모습을 한데 조합한 것이다. 

엘레나는 53세의 루벤스가 사랑하는 이사벨라 브란트와 사별 후에 얻은 둘째부인으로 이제 겨우 소녀티를 벗은 열여섯 이팔청춘이었다. 그는 직물상인 다니엘 푸르망의 딸로 루벤스는 그의 언니의 초상화를 그려준 적이 있었다. 루벤스는 이사벨라의 죽음 후 슬픔을 잊기 위해 외교활동에 전념했는데 슬픔을 잊게 해주기는커녕 비정한 정치세계의 혼탁함은 환멸감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그럴수록 이사벨라에 대한 상실감은 깊어만 갔다. 이때 주변에서 중년의 귀부인과의 재혼을 권했다. 그 역시 더 이상 외로움의 포로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기왕이면 중년의 귀부인보다는 평범한 가문의 젊은 여인과의 결혼을 원했다. 유럽의 모든 왕후장상이 경의를 표하는 대화가로서의 명성에다 기사 작위를 가진 왕의 특사라는 귀족 신분 앞에 안 될 일은 없었다. 

문제는 주위의 시선이었다. 아무래도 딸 같은 신부와의 결혼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는 친구 페이레스크에게 편지를 써 자신이 재혼을 결심한 것은 독신으로 지내며 금욕적인 생활을 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솔직히 고백한 뒤 부르주아 가문의 여성을 선택한 것은 귀족 여성이 갖게 마련인 허영심이 싫어서였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그가 재혼을 결심한 진짜 이유는 신부인 엘레나 푸르망의 남다른 미모에 있었다. 스페인 국왕 필리페4세가 주문한 ‘파리스의 심판’을 살피기 위해 루벤스의 집에 들렀던 왕의 동생 페르난도 추기경이 엘레나를 “안트베르펜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단언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림 속의 엘레나는 귀염성 있는 얼굴이긴 해도 그다지 예쁜 얼굴로 보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몸매는 과체중을 넘어 비만에 가까운 모습이다. 

물론 루벤스 그림에 나오는 여인들은 한결같이 풍만한 육체미를 과시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는 바로크시대 네덜란드인들은 깡마른 여인보다는 살집이 있는 여성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엘레나는 예쁘기만한 게 아니라 총명한 여인이기도 했다. 그는 박학다식하기로 유명했던 루벤스의 대화 파트너가 되기 위해 열심히 교양을 쌓았고 실제로 그는 교양있는 여인이라는 평판을 얻기도 했다. 그렇게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엘레나는 루벤스의 말년을 행복한 삶으로 인도했다. 그는 외교관으로서의 출세를 단념하고 엘러웨이트에 스텐성을 구입, 그곳에서 엘레나와 달콤한 전원생활을 즐겼다. 

그는 엘레나와 함께 한 10년의 세월 동안, 무려 다섯 명의 아이를 뒀다. 기가 막힌 것은 그가 세상을 뜬 직후 막내 콘스탄스가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뜨겁게 사랑을 불태운 정열적인 예술가였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말년의 루벤스 그림은 온통 축제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그는 더 이상 무거운 종교적 주제를 그리지 않았다. 마치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 나선 듯 신화의 세계에 몰입했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엘레나는 때로는 비너스의 모습으로, 때로는 아테나의 모습으로 등장, 신들의 향연의 주인공이 됐다. 루벤스에게 엘레나가 없는 신화의 세계는 허망함 그 자체였다. 

루벤스는 또 농민의 삶을 즐겨 묘사했던 피터르 브뤼헐의 계승자가 되어 플랑드르 농민의 즐거운 일상을 묘사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예전보다 그림 속의 사건을 묘사하는 스케일이 커졌다는 점이다. 대자연을 배경으로 한 광활한 전원에서의 생활이 그로 하여금 더 큰 무대를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예전에는 사건의 요점만을 보여주는 협소한 묘사가 지배적이었지만 이제는 사건이 벌어지는 무대를 적극적으로 의식하기 시작했다. ‘플랑드르의 축제장터’ 같은 그림에서 우리는 예전에 보지 못한 한편의 시각적 서사시를 본다. 그는 또 ‘무지개가 뜬 풍경’ 같은 서정적인 작품처럼 풍경화의 선구적인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젊은 부인 엘레나와의 삶이 가져다 준 풍성한 수확이었다.

루벤스가 말년에 중년의 귀부인과 결혼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우리는 아마도 그의 말년의 역작들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예술가에게 한창 피어나는 여인의 젊음은 아마도 영감의 원천이었던 것일까. 피카소가 그랬던 것처럼.

- 한국경제 2012.9.1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208312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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