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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서문) 르네상스를 꿈꾼 르네상스 다방의 화가들

이주헌

앞에 글 보기 : 둥섭, 르네상스로 가세  (1~3)


4.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은 대다수가 1950년대에 제작된 것들이다. 그러나 작가에 따라서는 1960년대, 1970년대 제작된 작품들도 일부 내걸렸다. 1950년대를 중심으로 작품에 나타난 시대 경험을 중점적으로 공유해 보는 한편 그 이후의 정신적, 정서적 경험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음미해 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이중섭의 경우 그의 50년대의 성취를 이해하기 위해 1940년대 작품도 몇 점 포함시켰다.
이중섭은 1956년에 죽었다. 그의 예술의 가장 위대한 성취가 전쟁과 전후의 후유증으로 점철된 1950년대라는 것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재료조차 구하기 힘들 정도로 작업 여건이 좋지 않았던 때, 그리고 가족들과도 헤어져 삶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때 그는 최고의 걸작들을 쏟아냈다. 무엇이 이 시절의 그로 하여금 창조적이고 독보적인 예술가가 되게 하였는가? 그것은 그가 누구보다 간절히 자기 삶의 복원, 곧 개인적인 생의 르네상스를 꿈꾸었고 그것을 작품으로 절절히 나타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이중섭의 1940년대 초 작품들을 보면, 이 무렵 그가 당대의 서구 사조에 관심을 갖고 동시대적이면서 지성적인 스타일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활 쏘는 남자> 등 마티스나 피카소를 연상시키는 선남선녀의 누드 드로잉도 인상적이지만, 추상적인 구성의 수채 작품들 또한 그가 당대의 미술사적 흐름을 선명히 의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 시기에도 개성박물관에 다니며 스케치에 몰두하는 등 우리 고유의 아름다움과 향토 소재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프랑스 유학을 꿈꿨고 일본 유학을 통해 근대의 조형에 눈을 뜬 미술학도로서 그는 이렇듯 나름의 방식으로 서구 사조를 자기화하는 과정을 밟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겪으며 이중섭은 서구 사조로부터 벗어나 철저히 개인적이고 토속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동시대 사조의 전개에는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한국전쟁 전후의 급격한 시대 변화가 그의 평화로운 삶을 붕괴시켰고, 그의 내면으로부터 무엇보다 잃어버린 옛날을 되찾고 싶다는, 되찾아야만 한다는 강렬한 욕구가 일어났다. 그것이 근원과 본향을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 곧 자신의 삶에 르네상스가 도래하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이어져 가장 강력한 조형 에너지가 되었다. <두 아이와 비둘기>, <아이들과 물고기와 게>, <새와 아이들> 등 아이들이 순진무구하게 뛰어노는 정경이나 가족이 서로 어우러져 교감하고 유대감을 나누는 풍경은 그렇게 이중섭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은지화로 그려진 아이들 모습을 보노라면 이중섭의 아픈 꿈이 하늘의 별자리가 되어 지금도 아련히 빛나는 것만 같다.
이중섭은 유능한 가장이 아니었다. 그는 경제적으로 무기력했으며, 돈이 생겨도 다른 이에게 술을 사거나 남 먼저 챙기기 일쑤였다. 그래도 원산에서 신혼살림을 차렸을 때는 집안이 넉넉해 문제될 게 없었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그 모든 기반이 사라지자 그는 끝내 가족과 유리되어 떠도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워낙 스킨십을 좋아해 아내고 아이들이고 모두 끌어안고 살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로서는 정말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의 고통스럽고 외로운 정신의 투쟁은 그의 자화상이라고까지 평가되는 소 그림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울부짖는 소, 싸우는 소, 전진하는 소의 모습에는 사랑하는 가족을 잊지 못해 적대적인 환경에서 상처투성이가 되도록 투쟁한 그의 내면이 진솔하게 담겨 있다.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황소> 역시 그의 외로운 투쟁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단단한 몸집에 곧 치받을 듯 수그린 고개가 강인한 인상을 준다. 근육과 살집이 겹겹의 터치로 표현되어 있는데, 동양화의 ‘기운생동’하는 필획이 연상된다. 이처럼 단순하지만 힘 있는 터치로 인해 그림은 폭발할 듯 내연하는 에너지로 충만하다. 결연한 의지를 느끼게 한다. 
현재 서울미술관의 소장품인 이 그림은 미술관 설립자인 안병광 유니온약품 회장이 2010년 서울 옥션 경매에서 구입한 작품이다. 안 회장은 대금을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과 차액에 해당하는 현금으로 지불했는데, 공교롭게도 <길 떠나는 가족>은 원소장자가 예전에 갖고 있던 작품이었다. 원 소장자가 1955년 이중섭의 작품 세 점을 구입했는데 그 중 하나가 <길 떠나는 가족>이었고, 가족을 그린 그림을 돌려받고 싶었던 이중섭이 <황소>를 가져와 바꿔달라고 간청하는 바람에 바꿔주었다는 것이다. 이중섭의 유별난 가족애를 엿보게 하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바뀐 그림이 55년 만에 원 소장자에게 되돌아갔다는 사실이 인연의 오묘한 섭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길 떠나는 가족>은 그 뒤 또 다른 컬렉터의 소장품이 되었다)
그런데 인연의 끈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30여 년 전 안 회장이 제약회사의 영업사원이었을 때의 이야기다. 비가 쏟아지는 어느 날 비를 그으려고 한 건물의 처마 밑으로 들어갔다. 건물의 쇼윈도를 통해 그림이 하나 보였다. 액자에 들어 있는 <황소>의 인쇄물이었다. 안 회장은 7천 원에 그 그림을 사서 아내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반드시 돈을 많이 벌어서 언젠가 당신에게 이 그림의 원작을 사 주겠소.”
이후 자신의 사업을 벌인 그는 밤낮없이 일했고, 30여 년 뒤 마침내 거짓말같이 그 약속을 지켰다. 이중섭의 작품 가운데 지금껏 최고 경매가를 기록한 <황소>는 그렇게 안 회장의 품으로 오게 되었다. 오묘한 인연의 고리를 돌고 돌아 <황소>와 <길 떠나는 가족>이 오고갔다. 행복했던 시절을 되찾고자 남다른 애환을 담아 그려낸 이중섭의 그림이 이처럼 인연의 수레바퀴를 타고 새로운 삶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이중섭의 사후 그의 그림을 사랑하는 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그의 예술은 신화가 되어 진정한 르네상스를 맞았다. 오늘날 그가 우리 근대 미술사에서 최고 거장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것은 그만큼 가족을 향한 순수하고 진솔한 사랑을 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사랑의 꿈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년은 널리 알려져 있듯 비극적으로 끝났다. 그는 가족과 끝내 재결합하지 못했고, 41세의 나이에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쓸쓸히 세상을 등졌다.  <돌아오지 않는 강>은 이 해 그가 마지막으로 그린 드로잉 가운데 하나다. 박고석의 부인 김순자 여사는 이 그림이 그려지던 당시의 정경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박고석의 집에 박고석과 이중섭, 한묵, 장욱진, 정규가 함께 있었다. 술을 가지고 오라 해서 김 여사가 술을 가져다주었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릴린 먼로 이야기를 하더란다. 빌어서 외상술을 가져오느라 속상한 판에 화가들이 마릴린 먼로가 좋다는 이야기나 나누니 새색시 속이 편할 리 없었다. 그렇게 떠드는 가운데 이 그림에 붙은 제목이 <돌아오지 않는 강>이다. 마릴린 먼로가 출연한 영화의 이름을 딴 것이다.
사실 그림 어디를 봐도 강은커녕 실개울조차 보이지 않는다. 집이 그려져 있고 창턱에 한 사람이 얼굴을 괴고 있다. 멀리서 여인이 머리에 무엇인가를 이고 오는 듯 지나가는 듯 걷고 있다. 어디를 봐도 마릴린 먼로나 돌아오지 않는 강과는 상관이 없는 이미지다. 술자리에서 왁자지껄 하는 가운데 정해진 제목이라 하니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림과 제목이 전혀 상관이 없지는 않은 것 같다. 이중섭은 끝내 가족과 재회하지 못했다. 그와 가족 사이에는 분명 돌아오지 않는 강이 놓여 있었다. 농담과 취흥 속에 내면의 두려움과 아픔을 그대로 녹여 놓은 제목이 아닐까 싶다.

5.
피난지 부산에서 이중섭의 가장 가까운 친구는 한묵과 박고석이었다. 한묵은 서울 출신이지만, 일제 말 금강산 온정리에 머물면서 원산에서 살던 이중섭과 자주 왕래했다. 부산으로 피난 와서는 더욱 믿고 의지하며 가깝게 지냈다. 박고석은 피난 시절 다같이 어려운 처지였으나 더욱 어려운 처지인 이중섭을 따뜻한 우정으로 살뜰히 살폈다. 이렇듯 가까운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각자 지향하는 그림의 방향은 무척 달랐다.
한묵은 타고난 조형예술가였다. 그는 일찍부터 시각적인 조화에 매우 민감했다. 서정적인 주제를 표현할 때도 공간 구성과 색채 배합의 효과에 대해 본능적으로 신경썼다. 이중섭이 내면의 정서를 표현주의적으로, 거의 즉자적(卽自的)으로 분출한 데 반해, 한묵은 대상과 공간을 자신의 조형 의지에 따라 재구성하고 정서적인 요소가 그 의지와 구성에 따라 적절히 드러나도록 의도했다. 이지적인 표현의 길을 추구한 것이다. 이런 그의 지향은 훗날 그가 한국 추상회화의 선구자로, 기하추상의 대부로 불리는 원인(遠因)이 되었다.
한묵이 1976년 개인전에 즈음해 쓴 ‘또 하나의 시(詩) 질서를 위하여’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문학적인 표현, 철학적인 의미성을 강조하여 그것을 작품내용으로 삼는 경향은 시각예술이 걸어야할 본도(本道)와는 거리가 먼 방계적인 것에 불과하다. 어디까지나 시각예술은 시각언어로써 이야기해야 하며, 시각성을 내용으로 해야 한다고 본다. 회화는 색과 선이라는 표재(表材)만으로도 무진장한 이야기가 가능하다. 그것을 어떻게 구사하느냐에 따라 정신적일 수 있고 또는 한낱 물질화로 끝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즉 눈으로 쓰고 눈으로 읽게 하자. 차라리 과학적인 실험을 통해 순수시각언어와 어법의 발견으로 시각예술의 독자적이고 객관성을 지닌 대화를 만인과 나눌 수 있도록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한묵의 말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림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고, 철학도 담겨 있다. 그러나 미술은 어디까지나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수한 시각적, 조형적 요소에 대한 이해가 보다 중요하다. 시각적, 조형적 요소에 대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접근과 실험을 통해 회화 고유의 본성에 보다 충실한 작품을 만들자.’
1950년대 한묵의 그림은 이런 의지의 원형질로 충만하다. 초기의 구상에서 후기의 추상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 동안 그가 회화의 시각적 문법을 최우선적인 관심사로 일관되게 유지해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55년 작 <모자상>을 보면, 엄마와 아이의 피부빛깔을 포함해 화면 전체가 푸른색으로 충만하다. 그 대상과 공간을 어둡고 둔중한 선으로 구획했는데, 그로 인해 관객은 엄마와 아이 사이의 애정이라는 내용적 측면보다 푸른 색채의 구성이라는 조형적 측면에 더 관심을 갖고 보게 된다. 사람의 표정과 인상, 제스처보다는 면의 구성과 색채 배합, 터치의 질감 등을 더 주목해 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조형적인 측면에 주목해 보게 될 때 우리는 이들 조형 요소의 자율적 원리에 따라 다양한 연상을 하게 된다. 이를테면 푸른색은 바다, 나아가 심연을 연상시켜 세계의 본질에 다가가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어둡고 둔중한 윤곽선은 근원적인 자연의 질서를 부지불식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요소들은 결국 본향을 향한 우리의 회귀 정서를 자극하고, 이는 주제인 모성과 결부되어 궁극의 숭고함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한묵은 추상의 미학이 갖는 힘을 일찍부터 제대로 보여주었다. 이 그림이 그려진 9년 뒤 그가 <푸른 구성>이라는 제목의, 보다 본격적인 추상화로 나아간 것은 그러므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전개 과정이라고 하겠다.
물론 아직 구상 형식을 추구하던 1950년대에는 그가 내용과 주제 자체가 갖는 정서적 호소력을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그런 정서적 호소력을 일부러 의식해 그린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일월(日月)이 있는 정물>에서 비쩍 마른 채 입을 벌리고 있는 북어는 자유에 대한 갈구를 상징한다. 이 무렵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태양이나 램프는 희망을 나타내곤 했다. 그러나 이런 ‘문학적 상징성’이 주는 재미보다 회화의 조형 요소가 우리 두뇌에서 벌이는 지각 놀이의 즐거움과 이미지에 따른 직관과 연상의 작용에 그는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지적인 회화를 고집스럽게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의 진취적인 기상을 읽을 수 있다.

박고석은 ‘산의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산을 즐겨 그렸다. 설악산, 치악산, 백암산, 도봉산, 수락산, 북한산 등 숱한 산들이 그의 화포 위에 의연히 자리를 잡았다. 그 산들은 대부분 거칠면서도 질박한 터치로 제 형상을 얻었다. 그만큼 뚜렷한 표현주의적 지향을 엿볼 수 있는 그림들이다. 표현주의적 측면에서 본다면 그는 이중섭과 상당한 친연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가족과 산이라는 소재의 대비에서 알 수 있듯 이중섭의 표현주의성과 박고석의 표현주의성은 차이가 있다. 이중섭은 개인사적 비극으로 인한 정서적 갈등을 표현의 주된 에너지로 삼았다. 하지만 박고석은 자연이라는 보편적인 대상, 혹은 특정한 존재가 아닌 보편적인 존재로서 인간이나 정물에 관심을 두면서 이들 대상에 대해 우리가 갖는 일반적인 정서의 작용을 표현의 주된 에너지로 삼았다. 그래서 에너지의 운동 측면에서 보면 박고석의 그림이 이중섭의 그림에 비해 보다 담담하고 두터우며 유장한 저류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
물론 1950년대 박고석의 주된 소재는 산이 아니었다. 산이 그의 주요 모티프가 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의 일이다. 하지만 산 그림이나 그 전의 인간, 정물, 바다, 섬 그림이나 그의 그림에서 ‘시종여일’한 것은 예의 두터운 윤곽선이다. 모든 사사로운 감정과 변덕을 다 집어삼킬 듯 흘러가는 그 묵직한 선은 그가 그리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과 그의 예술이 염량세태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 거라는 사실을 잘 전해준다. 그의 이름[古石]이 시사하듯 그는 일찍부터 오래 풍화되어 꿈쩍도 하지 않는 돌 같은 그림을 그렸다.
흥미롭게도 이번 전시에는 그렇게 널리 알려진 그림들 말고 그동안 거의 공개가 되지 않았던 그림들이 선보인다. <부산>과 <서울 풍경> 등 1950년대의 도시 풍경 드로잉과 두툼하면서도 힘찬 필선이 인상적인 드로잉 <말과 소년>, 그리고 <비온 뒤>, <소> 등 그의 작품 가운데 드물게 보게 되는 추상화가 그것이다.
추상화의 제작은 그의 그림 이력 가운데 매우 예외적인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그리 일탈적인 시도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 역시 한묵처럼 현대미술의 조형 원리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상의 형태를 단순화하고 선과 구성, 색채 등의 조형요소를 부각시킴으로써 감상자에게서 직관적인 반응을 일으키려는 태도는 그에게도 매우 중요했다. 다만 표현주의적인 성향으로 이런 지향이 거칠게 나타나고, 또 산처럼 구체적인 사물의 형태가 주는 정서적 환기력을 추상적인 조형요소 못지않게 중시해서 그렇지, 그는 근본적으로 현대미술의 조형원리에 정통하고 늘 이를 활용해 작업한 화가였다. 1950년대 말, 때마침 우리 화단에서 현대미술의 바람이 거세지고 그와 주변 동료들이 ‘모던 아트 협회’를 조직하게 되면서 그의 시도는 본격적인 추상화의 제작으로까지 나아갔다.
몬드리안이나 반 되스부르그 혹은 프란츠 클라인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그의 추상화는 ‘클래식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면서도 왠지 ‘한국적이다’, ‘토속적이다’ 하는 느낌도 준다. 본질로 뚝심 있게 나아가는 그의 성정이 서구 현대미술의 본질과 우리 전통 미학의 본질을 순식간에 한데 꿰뚫어 보여주기 때문이다. 두툼한 선의 맛이나 그것들이 오가고 이어지는 양상, 그로 인해 발생한 면들의 안정적인 조화는, 균제와 균형을 중시하는 작가의 내면을 그대로 전해준다. 산 그림처럼 우직하고 단단한 존재감이 돋보이는 그림들이다. 하지만 이런 추상화들을 제작한 뒤 그는 수 년 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자신의 그림이 얼마나 주체적인 것인가에 대한 남모를 회의가 있었던 것 같다.
현대미술에 대한 자신의 태도와 관련해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서구적인 궤적에 대한 동경, 선망이나 동양적인 유산 속에 도취, 자부하는 개념 위에, 먼저 절박하고 진지한, 현실과 대결하는 용기와 경건한 주체의식을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드로잉 <말과 소년>은 추상화의 형식을 띠고 있지는 않지만, 이 그림 또한 매우 모던한 느낌을 주는 걸작이다. 디테일은 과감히 생략하고 거칠게 형태를 잡는 한편 무엇보다 동세의 직관적인 포착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역시 박고석의 ‘쿨’한 태도를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아래는 그의 ‘쿨’함을 드러내주는 에피소드의 하나다.
부산 피난 시절 박고석의 집에 이중섭이 기거한 적이 있었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방 불을 때지 못하자 박고석이 아내에게 “중섭이 방에 연기라도 한 번 내 봐라”고 당부했다. 아무 것도 없는 형편에 어떻게 불을 피우라는 말인가 싶어 화가 난 김순자 여사는 다들 나간 뒤 방에 들어가 쓰레기처럼 쌓여 있는 것을 들고 나왔다. 땅콩 껍데기 등 너저분한 쓰레기에 은지화와 드로잉 등이 여러 점 뒤섞여 있었다. 그것들을 아궁이에 넣고 몽땅 태웠다. 수십 년 뒤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하며 “그때 수억 원을 태웠다”고 하니 묵묵히 듣고 있던 박고석이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잘했다!”

6.
이번 전시를 통해 이봉상의 그림이 무려 15점이나 한 자리에서 선보이게 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중요한 우리 근대미술의 대가 가운데 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대중들이 그의 그림을 잘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85년 가나화랑에서 열린 15주기 기념 유작전 이후 아주 드물게 극소수의 그림이 몇 차례의 단체전에 소개된 적은 있지만, 이렇게 15점이나 되는 작품이 한자리에 모여 대대적으로 선보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어쩌면 이번 전시가 앞으로 그의 작품을 보다 본격적으로, 또 보다 자주 보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그의 예술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르네상스가 도래하기를 고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봉상은 리더십과 지사(志士)적인 문제의식을 지닌 화가였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데 그치지 않고 국전의 문제점 등 1950~60년대 우리 미술계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늘 날카롭게 비판했다. 완전히 재야에 머물지는 않았지만, 미술 제도권 안에서 강직한 비판자의 역할을 기꺼이 떠맡았다. 그의 차남 이명주 선생의 어릴 적 기억에 따르면, 이봉상이 국전 심사위원을 맡아 심사하던 초기, 하루 이틀 갔다 오더니 그의 목이 완전히 쉬어버렸다고 한다. 심사위원들 중에서 수준 낮은 작품을 정실로 입상시키려는 사람들이 있어 이에 거세게 항의하고 따지느라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지사적인 성품에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쓰고 베푸는 것을 좋아하니 그의 주위에는 늘 사람이 들끓었다. 전쟁 뒤에 오랫동안 친인척들이 더부살이로 들어와 살고, 한묵, 박고석, 이종무 같은 친구들과 박서보, 김창열, 정상화 같은 제자, 후배들이 빈번히 그를 찾았다. 그의 아내는 이들을 위해 먹을 것, 마실 것 챙기느라 바빴다. 늘 돈이 떨어져 봉지쌀을 사거나 연탄을 열 장 단위로 사들여, 주위로부터 “저 집 주인 양반, 홍대 교수가 맞나?” 하는 소리를 들었고, 콩나물에 비지로 죽을 쒀 먹던 아들은 “넌 비지만 먹고 사냐?”는 친구와 대판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 좋은 이봉상은 없으면 없는 대로 나누기를 좋아했다. 그림도 그런 그의 성정을 따라 단순하고 검박하면서 따뜻하고 다감하다. 1950년대 사실성이 두드러지던 그의 그림은, 50년대 말 ~ 60년대 초 구성적인 성격이 강해지고, 60년대 중후반에는 보다 추상화한다. 그림의 양식은 변해갔지만, 절제와 풍요가 공존하는 양가적인 미학은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1956년 작 <초상>은 묵묵히 어려운 살림을 건사한 그의 아내를 그린 그림이다. 꾸밈없이 담담하게 처리했지만, 아내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신뢰의 눈길을 느낄 수 있다. 조형적인 측면에서 보면, 인상파 화가들의 붓놀림처럼 재빠르고 과단성 있는 터치가 인상적이다. 이렇게 빠른 터치는 보는 이로 하여금 여인의 외형에서 내면으로 급속히 관심을 옮기게 한다. 차분한 표정 뒤로 의연하고 심지 굳은 여인의 내면이 보인다.
가족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가난한 화가의 아내로서 윤동길 여사는 자녀들이 화가가 되는 데 대해 극력 반대했다고 한다. 아들이 화가가 되고 싶어 하면 “어느 집 규수 데려다가 고생시키려고 하느냐”고 말렸고, 딸이 화가가 되고 싶어 하면 “팔자 사나워진다”고 말렸다. 화가의 아내로서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 엿보게 하는 일화다. 다른 화가들의 예에서도 보듯 어쩌면 우리 근대 미술의 영광은 화가 자신의 노력을 넘어 그들의 부인과 가족이 치른 희생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볼수록 그런 사실을 되새기게 만드는 작품이다.
이 작품 외에 이번 전시에 출품된 1950년대 작품으로는 <자화상>, <나부>가 있다. <인물>은 1961년 작이지만, 사실성을 중시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다른 50년대 작품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그림이라 하겠다. 이런 사실적인 그림에서 보다 구성적이면서도 서정성과 시정(詩情)이 풍부한 작품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형제>, <소녀와 고양이>, <하늘, 산, 숲> 등이 보여준다.
<형제>는 앞에 해바라기 꽃들이 커다랗게 보이고 뒤로 형제가 수줍은 듯 모습을 드러낸 그림이다. 해바라기 뒤로 숨었지만, 형제는 또 다른 해바라기처럼 보인다. 아이들이 저 해바라기같이 밝고 화사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화가의 마음이 담겨 있는 듯하다. 구도나 표현 방식이 단순하기 때문에 그림은 그만큼 맑고 순수하게 다가온다. 다소 투박한 듯 거친 터치도 아이들의 천진함을 상기시키고, 노란 윤곽선은 아이들의 그림에서 보게 되는 노란 크레파스 윤곽선을 연상시킨다. 그만큼 순진무구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그림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순수한 표현 사이로 세련되게 구사된 회색이 드러나고, 추상적 구성과 구상적 묘사가 조화롭게 엮이어 지성미도 함께 전해준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이봉상의 양가적인 미학에 대해 언급했지만, 이렇듯 이봉상은 순진무구와 지성 같은 서로 다른 가치를 한데 어울리게 하는 독특한 재주가 있다. 그의 그림은 그래서 따뜻한 듯 서늘하고, 화려한 듯 검소하며, 거친 듯 부드럽고, 순진무구한 듯 지성적이다. 곱씹으면 씹을수록 더욱 깊은 맛에 빠져들게 되는 매력이 있다.
그가 말년에 집중한 추상화는 대체로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에 앵포르멜의 정서가 덧대어져 우리 내면으로의 여행을 유도한다. <미분화시대 이후 2>나 <원형질> 같은 그림이 그런 그림이다. 그런가 하면 반추상적인 <수지>나 <무제>는 하늘과 산, 호수 같은 자연의 원초적인 형상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 반추상화들 역시 근원을 향해 회귀하고자 하는 화가의 의지를 전해준다. 이로 미뤄 볼 때 그는 후년으로 갈수록 현상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보다 본원적이고 본질적인 세계를 탐구하고자 했음이 분명하다. 화단의 문제점에 대해 크게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고, 벗과 후배들과 어울려 왁자하게 술을 즐겼어도, 그 스스로 이젤 앞에 서면 이처럼 세속의 모든 파노라마를 넘어 청정무구해지고 싶은 열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모습을 아들은 이렇게 기억한다.
“하루 종일 이젤 앞에 계신 것 같은데, 보면 아무 것도 그려진 게 없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며칠 지나서 보면 갑자기 채색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게 어느 날 보면 또 전부 지워져 있었다. 또 그리고 다시 그리고…, 그렇게 그리셨다.”

7.
손응성은 기조 동인전 참여 작가 중 가장 보수적인 화풍을 견지한 화가라 할 수 있다. 다른 화가들이 표현주의나 야수파, 입체파, 추상파의 영향을 받는 동안 그는 초지일관 사실적인 구상회화로 일관했다. 그가 우리나라 구상회화 동인그룹의 중추격인 목우회의 창립에 일조하고, 목우회 탈퇴 뒤 한국사실작가회를 결성한 것은, 그의 지향으로 보아 예견된 경로였다.
그의 그림은 단정하고 차분하다. 차분하다 못해 적막한 정서가 느껴질 정도로 정연하다. 그는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다른 소재를 과감하게 생략하고 주제와 배경이 단독으로 맞서는 구성을 선호했다. 꼼꼼한 사실적 표현과 맞물려 이런 구성은 그의 예술이 엄격하고 고전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만큼 성실하고 고집스런 그의 성격을 반영한다 하겠다.
미술평론가 윤범모는 이와 관련해 이런 평을 했다.
“그의 필치에는 주어진 대상을 파고 들어가 분석해내는 정교한 묘사력이 있다. 정돈된 그의 화면은 최대한도로 절제되어 있는 조형세계를 지니고 있다. 특정 소재의 비슷한 구도는 일종의 동어반복식으로 꾸준히 재생산되어 나왔다. 그 속에는 결벽주의자적인 절제가 뒤따라 군더더기를 용납하지 않았다. 냉혹하리만큼 질서정연한 화면효과를 추구했다.”
손응성은 대상을 그릴 때 고착증이라고 할 만큼 그리는 대상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의 그림의 진정한 주제는 그려진 대상이 아니라 대상을 향한 몰입의 정신이라고 할 만하다. 손응성이 즐겨 그린 소재는 인물, 풍경, 정물 등 다양한데, 풍경 중에는 비원, 정물 중에는 고가구와 고서, 석류, 백자가 특별히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이번 전시에는 <백자 항아리>, <석류>, <배냇저고리> 등이 출품되었다.
그의 남다른 집착증을 잘 보여주는 일화로, 비원을 그릴 때 그는 늘 망원경을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정자의 기와 한 장, 나무의 나뭇잎 하나, 그렇게 꼼꼼히 관찰해 그렸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석류를 그릴 때는 석류나 고추장만 먹고, 백자를 그릴 때는 소뼈를 다린 곰국만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작품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계속 한 가지 음식만 먹어야 하는 고행 아닌 고행을 겪기도 했다.
그림이 잘 안 풀린다고 그림의 대상을 연상시키는 음식만 줄기차게 먹는다는 것은 보통 열의와 집념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태도에서 비로소 대상을 제대로 통찰하는 능력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대상을 단순한 형상 이전에 우리와 교감하는 중요한 상징체로 봄을 의미했다.
석류를 즐겨 그린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선 색감이 그렇고, 또 오랜 인고 끝에 열매를 맺는 그 과정이 한국인의 역사와 상통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석류를 먹는 것은 석류의 실체에 대한 이해를 보다 심화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한국인의 역사에 대한 정서적 감응을 얻는 중요한 계기이기도 한 것이다. 손응성에게 그림은 그런 교감을 위한 중요한 매개물이었다.

정규는 다방면으로 유능한 미술가였다. 유화뿐 아니라 목판화와 도예, 미술비평에서 두루 출중했다. 그는 기조전 동인들에 비해 나이가 어렸지만, 그들을 비롯한 선배들과 잘 어울렸고, 그들에게서 재능을 인정받았다. 1946년 금강산에서 결혼식을 올린 정규는 이중섭 부부가 살고 있던 원산에 신접살림을 차려 이중섭과 가까워졌다. 박고석, 한묵, 이봉상과는 모던아트협회 활동을 같이하며 창조의 교감을 나눴다. 그런 그에 대해 박고석은 “서구미술에 대한 투철한 이해 위에 우리나라 민속성에 크게 집착하는, 진취적이면서 동시에 토착성, 풍토성이 담긴 멋진 작가”라고 평했다.
수화 김환기는 정규의 개인전을 보고 이런 글을 남겼다.
“겨울은 춥고, 눈이 내리고, 만물이 꽁꽁 얼고, 미물들이 얼어 죽고, 잎도 떨어지고, 그리하여 정결한 것들만 남으리라. 우리 규 형의 그림 위에는 실로 남을 것만 남아서 깨끗하고, 아름답고, 사는 게 기쁘도다.”
김환기가 지적한 것처럼 정규의 그림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무제>, <함> 등의 작품에서 보듯 그는 초가집이나 함, 항아리 같은 것을 가장 단순한 형태로 추상화해서 구성과 색채의 묘미를 음미하게 한다. 그 형태의 원형이 우리의 토속 이미지라는 점에서 더더욱 정이 간다. 거기에 중후한 느낌의 마티에르가 더해져 구수하고 은근한 정서가 시나브로 풍겨 나온다. 이처럼 토속적인 일상에서 추상의 아름다움을 찾고 그것을 현대적인 조형언어로 표현한 것과 관련해 정규는 이런 말을 한 바 있다.
“우리가 알기 쉬운 것으로는 서(書)란 틀림없이 ‘압스트랙 아트(추상미술)’이다. 또한 우리들은 어려서 어머니 또는 누나들이 종이를 가지고 접어준 상자니, 지갑이니, 학이니 하는 입체 기하학 형태의 조형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압스트랙 아트’인 것이다.”
정규는 모던 아트의 서구적 기원에 이렇듯 토속적이고 일상적인 우리네 빛깔을 더했다. 그로 인해 된장 냄새가 나는 클레나 미로의 작품 같은 독특한 추상화가 탄생했다.
안타까운 것은, ‘장르의 벽을 깬 미의 사냥꾼’으로 불릴 정도로 다채롭고 활발한 창작활동을 벌이던 그가 1971년 48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미인박명’이라는 말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게 한 불의의 상실이었다. 다방면으로 미술의 세계를 섭렵하면서 우리 미술의 르네상스, 특히 도예의 르네상스를 열정적으로 꿈꾸었던 그는 그렇게 꿈이 현실이 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은 오늘 우리 미술과 도예의 활발한 전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8.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간다. 과거 한국전쟁과 피난 중에 예술을 논한다는 것은 사치 중에서도 최상의 사치였을 것이다. 하지만 포화에 짓이겨지고 굶어죽더라도 그림만은 그려야 한다고 생각한 예술가들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지출은 제쳐놓더라도 그들의 작품을 사줘야 한다고 생각한 컬렉터들이 있었다. 또 작가들이 작품을 발표할 마땅한 공간이 없자 그들을 위한 전시장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다방들이 있었다. 그렇게 미술은 고난의 한 시대를 살아남았다. 
이 전시에 내걸린 작품들은 오늘날의 미술가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환경에서 창조의 불씨를 지켜낸 선배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자랑스러운 유산이다. 그렇게 불씨를 후대에 넘겨주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위대한 프로메테우스라고 할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감쳐둔 불을 훔쳐 그것을 인간에게 넘겨줌으로써 문명의 탄생이 가능하게 만든 티탄이다. 제우스의 분노를 사 갖은 고생을 했지만, 그것은 선구자가 감당해야 할 불가피한 운명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근대 화가들은 프로메테우스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우리 미술의 르네상스는 그렇게 그들의 희생 위에서 이렇듯 찬란한 꽃으로 피어났다.  

이주헌 (서울미술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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