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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차세대 ⑦ ‘세계를 놀래킨 간판쟁이’ 이제석 소장

염태정

‘뿌린 대로 거두리라’(What goes around comes around)는 광고 전문가 이제석(30·사진)이 “가장 아끼는 작품이자 가슴속에 새기고 사는 말”이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아래 작은 사진)는 반전(反戰) 포스터다. 적을 겨냥하는 총과 탱크가 결국은 자신을 쏘게 된다는 역설의 이미지다. 2008년 가을 미국 뉴욕에 있는 광고전문대학 스쿨오브비주얼아츠(SVA)에서 공부를 마친 이제석이 동료와 함께 비정부기구(NGO)인 세계평화연합(The Global Coalition for Peace)을 위해 만들었다. 평소 이라크 전쟁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그는 어느 날 뉴욕 거리에서 무장 군인의 검문을 받았다. 그 순간 ‘미국과 이슬람권의 갈등은 보복의 악순환’이란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이는 ‘돌고 돈다’는 아이디어로 이어졌다. 당시 뉴욕은 9·11 테러의 여파로 거리에 무장 군인이 배치됐고, 외국인이었던 그는 검문을 자주 당했다. ‘돌고 돈다’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자 그는 이를 바로 스케치로 남겼고 동료들과 함께 이미지와 수십 개의 제목을 놓고 논의하는 과정을 거쳐 포스터를 만들어 냈다. 그는 이 작품으로 2009년 ‘광고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클리오 어워드에서 금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 주요 광고전을 휩쓸었다. 이제석이라는 이름을 전 세계 광고계에 알린 것이다. 

2010년 이순신 장군 동상을 수리할 때 설치했던 ‘이순신 장군님은 탈의 중’.
장애인 단체서 받은 피자 두 판에 가슴 뻐근
이제석은 현재 광고기획사인 ‘이제석 광고연구소’를 운영한다.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 위원, 경찰청 홍보자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지난해엔 광고홍보인 모임인 서울AP클럽에서 ‘올해의 광고인’으로 선정됐다. 지구촌에 한국 광고의 존재감을 알린 공을 인정받아서다. 그는 SVA 재학 시절부터 최근까지 세계 유수의 광고제에서 50여 개의 상을 받았다. 그러다 ‘광고 천재’란 별명도 얻었다. 『광고천재 이제석 - 세계를 놀래킨 간판쟁이의 필살 아이디어』(학고재)도 출간됐다. 

1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분원 공사장의 가림막. 문제가 되는 신체 부위 앞에는 진짜 나무를 심었다. 나뭇잎이 떨어질 것에 대비해 인조 나뭇잎을 만들어 붙였다. 2 이제석 소장의 대표작 ‘뿌린 대로 거두리라’(What goes around comes around). 적을 겨냥한 총구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반전(反戰) 포스터다. 그는 이 작품으로 전 세계 광고계에 이름을 알렸다. [이제석 광고연구소]
그를 둘러싸고 광고계에선 설왕설래다. 그의 재능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독특하고 까칠하다는 이야기도 있고, 대형 광고회사들과 일하기를 꺼린다는 말도 들린다. 그는 휴대전화도 거의 쓰지 않는다. 실제로 그를 인터뷰하기 전까지 연락 수단은 e-메일뿐이었다. “휴대전화가 작업에 방해가 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시장경제의 꽃인 광고를 다루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상업광고가 아니라 공익광고다. 광고연구소의 영문명(JESKI SOCIAL CAMPAIGNㆍ제스키 사회캠페인)은 이런 지향점을 보여준다. 환경재단 최열 대표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눈길 끄는 공익광고를 만드는 주목할 만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가 만든 공익광고는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서울 신문로 경찰박물관 벽면에 붙어있는 ‘빵 셔틀 운행중지-학교폭력 상담/신고 117’, 대한적십자사의 성금모금 캠페인 ‘혈액만 나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재해구호협회의 ‘구명조끼’ 같은 것들이다. 대부분 무료 또는 최소 경비를 받고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재능기부에 관심이 있는 광고인들의 모임인 ‘재능기부센터’도 운영한다. 

사회적으로 눈길을 끈 작품도 꽤 있다. 서울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을 수리할 때 동상 자리에 내건 ‘이순신 장군님은 탈의 중’, 모나리자 같은 명화 속 주인공이 벌거벗은 채로 그려져 있는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분원의 공사 가림막 같은 것들이다. 특히 ‘이순신 장군님은 탈의 중’은 역사적인 인물을 희화화한다는 반대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이순신 장군이 잠깐 자리를 비웠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 있고 동상을 의인화하는 것도 시민들이 재미있어 할 것”이라며 서울시를 설득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2009년 5월 이제석 광고연구소를 열었다. 컴퓨터 두 대 놓고 혼자 시작했다. 광고제 수상경력이 알려지면서 제작 요청이 꾸준히 들어와 지금은 직원이 10명쯤 된다. 이와 별도로 미국에 있는 광고계 지인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해 수시로 필요한 작업을 한다. 
공익광고에 끌린 이유를 묻자 그는 ‘보람’을 이야기했다. “언젠가 장애인 단체에 광고를 만들어주고 피자 두 판을 받았어요. ‘줄 게 그거밖에 없다’면서. 피자를 받는 순간 가슴에 뭐가 빡 와요. ‘이거다.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거다’라는 느낌이죠. 1억원이 통장에 들어와도 그런 느낌은 안 들죠.” 회사 운영에 어려움은 없느냐고 묻자 “공익광고와 상업광고의 비율이 8대2 정도여서 운영에 큰 어려움은 없다. 직원 월급 주고 사무실은 유지할 수 있다”고 답했다. 

광고계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내비쳤다. “물건이 안 팔리면 광고 탓이고 잘 팔리면 제품이 좋아서고…. 우리 광고계가 막대한 모델료를 지급하는 ‘스타’에 너무 의존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 공익광고를 주로 하지만 그는 상업광고로도 꽤 인정받았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한 오레오(OREO)의 제품 광고, 물개 사이에 살찐 고양이를 그려 넣은 ‘고양이용 다이어트 사료’ 등이 대표작이다. SVA 재학 시절, 그리고 졸업 후 1년 반 정도 그는 인턴 또는 직원으로 미국의 대표적인 광고업체인 JWTㆍBBDOㆍFCB 등에서 근무했다. 한마디로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현대자동차ㆍLG전자 등의 광고도 만들었다. 

4.47점 수석 졸업에도 취업전선 찬밥
자신의 일에 대한 자신감은 ‘거만’ 수준이다. 그는 한 번도 기업체 상업광고의 경쟁 프레젠테이션(PT)에 참여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도 일감은 꾸준히 들어온단다. “명품 만드는 장인에게 ‘당신 제품 한번 써보고 살지 말지 결정하겠다’ 이러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장인의 제품을 믿고 사는 것이죠. 저는 그렇게 하고 싶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광고전문가로 인정받고 있지만 그도 예전에 ‘루저’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광고천재 이제석』에서 자신을 소개한 말이다. ‘한때 루저였다. 중학교 다닐 때는 수업태도 불량으로 숱하게 얻어터졌다. 고등학교에서는 그림으로도 4년제 대학에 갈 수 있다는 말에 죽도록 그렸다. 계명대 시각디자인과에 입학했다. 4.5점 만점에 4년 평점 4.47로 수석 졸업했다. 졸업 후 수십 군데에 지원서를 넣었지만 아무 데서도 오라고 하지 않았다. 스펙이 밀린다는 걸 알고 간판쟁이 일을 시작한다. 어느 날 동네 아저씨에게 굴욕을 겪고 미국 유학을 결심한다.’

대학 졸업 후 취직을 못한 그는 2005년 대구 대명동에서 작은 간판업체를 했다. 열심히 일하던 어느 날, 단골 국밥집 간판을 바꿔 달게 하려고 ‘영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다른 간판집 아저씨의 ‘10만원이면 할 수 있겠다’는 말에 자존심이 무너졌다. 자신이 제시한 가격의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이런 취급을 받다니…. 광고나 한번 제대로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후 1년 동안 대구에 있는 미군 부대에서 그림을 가르쳐 주며 유학을 위한 생활 영어를 배우고 돈을 모았다. 그리고 2006년 가을 SVA에 3학년으로 편입했다. 

미국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헛간 같은 작은 방에서 살며 무료급식소 밥을 먹기도 했다. 방도 좁은데 밤에 불 켜놓고 일을 자주 해 ‘같이 잠을 못 자겠다’는 룸메이트의 성화에 밀려 복도에 나와 밤 새워 과제물을 만들어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미국 사회에서 ‘오원춘’ 같은 존재였던 것 같아요. 외로운 이방인이죠. 그래도 나 같은 사람한테 세계적인 광고회사에서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사회 분위기는 배워야 할 것 같아요. SVA는 한국 사회에서 인정해 주지 않는 계명대 학점을 보고 장학금까지 줬습니다.”

그는 한국 사회가 “실질과 실력보다는 형식, 간판, 스펙을 중시하는 사회”라고 꼬집었다. 그는 ‘광고천재’란 별명을 부담스러워 했다. “천재는 아니고, 한 우물을 파 천재가 되기 위해 노력은 하는 정도”라고 했다. ‘좋은 광고를 만들기 위해선 ‘선입견이 없어야 하고,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무엇이든 궁금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다. 스스로 안다고 자신하는 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새로운 것이 많은데, 선입견이 있으면 그걸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과 같은 ‘루저’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고 했다. 공부 못하면 낙오자 취급받는 분위기를 바꿔 보고 싶다는 것이다. 자살이 많고 폭력이 난무하고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많은 우리 사회의 문제를 푸는 도구로 광고를 활용하고 싶다는 희망도 갖고 있다. 그의 꿈은 당찼다. “나이 육십쯤 될 때 노벨상을 받는 것”이라고 했다. 어느 분야의 노벨상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묻자 “아마도 평화상? 꼭 어느 분야라기보단 인류 발전에 기여한 문화 콘텐트를 제작한 공로를 인정받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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