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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현대미술 이야기](6) 개념미술

진중권

ㆍ음악의 재료가 소리라면, 미술의 재료는 개념이다

작품을 전시회에 출품하는 게 아니라 잡지에 기고하는 화가들이 있다. ‘개념미술가’라 불리는 이들이 그들이다. ‘개념미술’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헨리 플린트. 1961년에 쓴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개념예술은 무엇보다도 개념을 재료로 하는 예술이다. 음악의 재료가 소리인 것처럼 말이다. 개념들은 언어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개념예술은 언어를 재료로 하는 예술형식이라 할 수 있다.” 플린트의 말은 묘하게도 예술의 종언을 말하던 헤겔의 어조를 닮았다. 


■ 예술의 종말론 

헤겔에 따르면 예술은 필연적으로 물질성에서 정신성으로 이행한다. 가령 고대 오리엔트를 대표한 것은 피라미드와 같은 거대한 건축물. 이때 정신은 아직 육중한 물질에 눌려 있었다. 이어서 등장한 그리스 예술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은 장르는 역시 조각이었다. 헤겔에 따르면 예술의 본질은 ‘정신적 이념을 감각적 물질로 구현’하는 데에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정신과 물질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적절히 조화를 이룬 그리스 조각에서 예술이 정점에 도달했다고 보았다. 그 다음은? 

정신은 더 성장하여 이제 물질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장르는 회화였다. 회화는 조각보다 더 정신적이다. 현실의 한 차원을 접어 공간을 평면으로 환원시키기 때문이다. 회화의 재료 역시 육중한 돌을 사용하는 조각에 비해 물질성이 한결 약하다. 17세기는 음악이 그 역할을 이어받게 된다. 음악의 재료인 소리에는 거의 물질성이 없다. 19세기 이후의 주도적 장르는 시. 이제 예술은 마침내 물질성을 완전히 벗고 학문과 똑같은 재료, 즉 개념(=언어)을 사용하게 된다. 

다 자란 정신에게 예술의 물질성은 그저 거추장스러운 옷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 헤겔은 예술의 종언을 선언한다. 예술이 ‘물질적’ 매체를 통해 존재하는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20세기 예술의 경향을 보면, 적어도 예술이 물질을 벗고 정신으로 상승하리라는 이 철학자의 예언은 적중한 것으로 보인다. 다다이스트 뒤샹의 말이다. “다다는 회화의 물리적인 면에 대한 극단적 항거이자 일종의 형이상학적 태도였다. 다다는 은밀하게 그리고 의식적으로 문학과 연관되었다.”

헤겔의 예언을 글자 그대로 실현한 것은 개념미술이 아닐까? 이 사조의 근원은 멀리 뒤샹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0년대 말 뒤샹은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는 선언과 함께 그림을 그리지 않는 최초의 화가(?)가 된다. 그 후 그는 오직 ‘개념’만으로 작품을 만들어왔다. 가령 그 유명한 ‘샘’(1914)은 시장에서 구입한 변기에 가짜 사인을 한 것이다. 이 작품으로써 뒤샹이 창조한 것은 물질적 오브제로서 작품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관념, 즉 예술에 대한 새로운 ‘정의’(定義)였다. 


■ 오브제에서 개념으로 

개념미술의 직접적 단초는 미니멀리즘이었다. 미니멀리스트들이 만든 작품은 ‘사물’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굳이 ‘작품’을 제작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작품이 다른 요소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면, 왜 그것을 만드느라 애씁니까?”(빅터 버긴) 여기서 미니멀리즘은 개념미술로 진화한다. 

“개념미술에서는 생각이나 관념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 된다. 예술가가 예술의 관념적 형식을 사용할 때, 그것은 모든 계획과 결정이 미리 만들어지고 실행은 요식행위임을 의미한다. 생각이 예술을 만드는 기계가 된다.”(솔 르 위트)

그 유명한 ‘벽 그림’(wall drawings)을 제작할 때 미니멀리스트 솔 르 위트는 반복적으로 기하학적 형태를 만들어내는 데에 사용되는 공식만 제시했다. 공식에 따라 벽에 그 문양을 그리는 작업은 물론 고용된 인부들에게 맡겼다. ‘죽다’(1962)라는 작품을 제작할 때 토미 스미스가 한 일 역시 공업사에 전화를 걸어 지시를 내린 것뿐이었다. 창작과 실연이 분리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작업방식은 차라리 음악을 닮았다. 음악에서는 작곡가가 곡을 쓰고, 실연은 연주자에게 맡겨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아예 실행 자체를 포기하는 데에 이르게 된다. 1963년 개념미술가 에드 키엔홀츠는 제작에 따르는 비용과 시간이 아까웠던지 ‘개념 타블로’(concept tableaux)라는 것을 만들었다. 구매자는 먼저 개념(을 적은 종이가 담긴 액자)을 사고, 이어 구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드로잉을 사고, 마음에 들면 더 많은 돈을 내고 작품의 제작을 주문할 수 있었다. 물론 키엔홀츠가 물질적 실현 자체를 포기하려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대부분 실현되지 않은 관념으로 남았다. 

멜 보크너는 최초의 개념미술가로 일컬어진다. 1966년 그는 동료 작가들의 드로잉과 작업구상을 담은 종이를 여러 번 복사하여 네 권의 파일노트에 끼워 조각의 받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거기에는 솔 르 위트와 댄 플래빈의 작업 스케치, 저들의 작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담은 송장, 존 케이지가 작곡한 악보가 포함되어 있었다. 파일의 첫 장은 화랑의 도면, 그리고 마지막 장은 복사기의 조립도면이었다. 이 전시회를 찾은 관객들은 작품을 ‘보는’ 게 아니라 파일을 넘겨가며 ‘읽어야’ 했다. 


■ 안티 모더니즘 

이렇게 말로 하는 명령, 문서로 된 작업지시, 행동을 지시하는 스코어가 예술이 될 때, 미술은 문학에 가까워진다. 이제 화가는 작품을 전시회에 출품하는 게 아니라 아예 잡지에 기고하게 된다. 조지프 코수스는 ‘예술-언어’라는 잡지에 작품을 기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예술가로서 내 역할은 작품의 출판과 더불어 끝난다. 나는 출품의 형식을 바꾸어 잡지에서 공간을 얻었다. 이런 식으로 나는 작품의 비(非)물질성을 강조하고, 그로써 회화와 모든 연결을 끊으려 한다.” 

개념미술은 그린버그의 모더니즘에 대한 안티테제라 할 수 있다. 이 유명한 비평가는 모더니즘의 정신을 매체에 대한 반성에서 찾았다. 즉 현대회화는 ‘순수회화’, 즉 다른 장르에서 온 이질적 요소들을 배제한 ‘회화’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념미술에 이르러 회화는 물감과 화폭을 버리고 다른 매체, 말하자면 행위를 지시하는 악보, 언어를 재료로 한 문학이 된다. 이로써 그린버그의 모더니즘도 종언을 고한다. “‘그린다’는 말이 꽃, 여인, 에로틱, 일상 환경, 예술, 다다, 정신분석, 베트남 전쟁을 그리는 것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화가가 아니다.”(다니엘 뷔랑) 

1960년대 말에 미술이 이렇게 개념적으로 변한 데에는 배경이 있다. 때는 마침 지식계에서 ‘텍스트로의 전환’(textual turn)이 이루어지던 시기. 기호학은 사진 이미지에 숨은 이데올로기를 드러내 언어로 보여주었다. 이것이 형상을 거부하고 언어를 재료로 하는 미술의 관념으로 이어진 것이다. 게다가 화가들 사이에는 아직 제도미술을 거부하는 아방가르드적 제스처가 남아 있었다. 그 결과 상업화를 거부하기 위해 아예 팔릴 수 없는 작품을 만들자는 발상을 하게 된 것이다. 

개념미술은 미니멀리즘에서 갈려나왔으나, 딱히 어디까지 미니멀리즘이고 어디부터 개념미술인지 뚜렷한 경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코수스는 미니멀리즘의 전사(前史)에 속하며, 솔 르 위트 역시 미니멀리스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미니멀리즘에서 개념미술에 이르는 도정을 되돌아보자. 저드에게 작품은 아직 ‘사물’이었다. 모리스에게 작품은 이미 ‘지각’이었다. 솔 르 위트에게서 작품은 마침내 ‘개념’이 된다. 미술은 더 이상 망막적(retinal)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적(mental) 현상이다. 


■ 개념 예술의 형식 


솔 르 위트가 ‘아트포럼’이라는 잡지에 기고한 ‘개념예술에 관한 패러그래프들’(1967)은 오늘날 개념미술의 강령으로 여겨진다. 거기서 그는 개념미술의 본질을 이렇게 규정한다.

“생각 혹은 개념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다. 예술가의 목표는 제 작품을 관찰자에게 정신적으로 흥미롭게 만드는 것. 따라서 그는 작품이 정서적으로 건조하기를 원한다. 눈의 지각에 호소하는 예술은 개념적(conceptual)이라기보다는 지각적(perceptual)이다. 시각화되지 않은 생각도 완성된 산물 못지않은 작품이다. 어떤 이들은 새 재료를 새 생각으로 혼동한다. 위험한 것은 재료의 물질성을 너무 중시해 그것을 작품의 콘셉트로 삼는 것이다. 생각은 숫자, 사진, 낱말 혹은 그 어떤 것이라도 좋다.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지만, 개념미술은 일반적으로 네 가지 형식을 취한다. 첫째는 ‘레디메이드’(ready-made)로, 뒤샹의 변기처럼 일상의 사물을 예술로 선언하는 것이다. 둘째는 ‘개입’(intervention)으로, 오브제나 이미지를 엉뚱한 맥락에 옮겨 놓는 것이다. 가령 다니엘 뷔랑은 모든 곳을 미술관으로 만들기 위해 줄무늬 간판을 등에 지고 파리의 거리를 활보했다. 셋째는 ‘자료형식’(documentation)으로, 위에서 언급한 보크너의 작업 스케치 전시가 거기에 속한다. 

‘개념미술’의 가장 보편적 형식은 ‘언어’(language)를 사용한 것이리라. 플린트가 개념예술을 “언어를 재료로 하는 예술형식”으로 규정했던 것을 기억해 보라. 한나 다보벤은 숫자와 글자, 낙서를 계열적으로 늘어놓음으로써 회화가 글쓰기라는 관념을 표현했다. 일본의 작가 온 가와라는 매일 6, 7시간에 걸쳐 캔버스에 그 날의 날짜를 적어 넣고, 그 아래 그날 벌어진 사건을 보도한 신문을 첨부했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예로는 LED를 이용한 제니 홀저의 작업을 꼽을 수 있다. 


■ 세 개의 의자 

미술사에서 개념미술의 아이콘처럼 통하는 작품은 아마도 코수스의 ‘세 개의 의자’(1965)이리라. 여기서 우리는 실제의 ‘의자’와 의자의 ‘사진’과 의자의 ‘정의’로 이루어진 3중의 동어반복을 본다. 여기에는 ‘레디메이드’(실제의 의자)와 의자의 ‘자료형식’(의자의 사진)과 의자라는 ‘언어’(사전 항목의 복사)가 존재한다. 게다가 의자가 미술관에서 작품의 자리에 놓인 것은 뒤샹의 변기처럼 ‘개입’(의자의 맥락일탈)의 요소라 할 수 있다. 개념미술의 네 형식이 다 들어 있는 셈이다. 

전시 후에 의자는 디자인과(科)에, 의자의 사진은 사진과에, 그리고 ‘의자’라는 낱말의 정의가 담긴 사전의 복사물은 도서관에 보관되었다. 보존을 위해 작품을 해체한 셈이다. 이 개념미술의 기념비가 기존의 장르분류법에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일화가 의미하는 바는 크다.

장르의 구별이 매체의 차이를 근거로 이루어진다면, 매체를 포기한 이상 장르의 구별도 흐려진다. 회화의 독립성을 강조한 그린버그의 모더니즘도 여기서 종언을 고한다. 헤겔이 말한 예술의 종언은 동시에 미국 모더니즘의 죽음을 의미했다. 

60년대 말에 등장한 개념미술은 70년대 말이면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현대미술 전체가 ‘개념미술’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현대미술은 ‘개념미술’ 이전에도 개념적이었고, ‘개념예술’ 이후에도 여전히 개념적이다. 오늘날의 예술은, 그것이 물질을 얼마나 많이 사용하든지 관계없이, 어느 정도로는 모두 개념적 배경을 갖는다. 이는 예술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오늘날 ‘콘셉트’라는 말은 이미 예술의 범위를 넘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사용되는 일상용어가 되어버렸다. 

개념미술을 통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한마디로 창작은 ‘제작’의 의무에서, 작품은 ‘재료’의 감옥에서, 수용은 ‘지각’의 관례에서 해방되었다. 헤겔은 이를 ‘예술의 종언’으로 규정했다. 그의 말대로 예술은 죽었다. 아니, 예술의 육신은 죽고, 영혼만 남았다. 예술은 마침내 비물질성(immateriality)에 도달했다.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 신체를 버리고 영혼이 되어야 하듯이, 물질을 떠난 예술도 과연 우리의 영혼처럼 결코 파괴될 수 없는 불멸성(immortality)에 도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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