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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현대미술 이야기](8)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진중권

ㆍ팝아트·소비 자본주의에 반기…68년 혁명의 정신적 기폭제로

모더니즘은 예술운동이자 동시에 정치운동이었다. 가령 미래파, 초현실주의, 구축주의, 바우하우스가 사회주의 운동에 동조했던 것을 생각해 보라. 하지만 종전 후 모더니즘의 중심이 미국으로 옮겨가면서, 예술은 이 정치적 급진성을 잃는다.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현대미술은 자신이 위험한 좌익의 예술임을 부정해야 했다. 트로츠키주의 좌파였던 그린버그 역시 전후에는 ‘아방가르드’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게 된다. 그 대신에 그가 내세운 ‘모더니즘’은 정치성이 결여된 순수 형식주의적 기획에 가까웠다. 

■ 팝아트 vs 상황주의 

이로써 사라진 것은 ‘삶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삶 속에서 예술을 실현한다’는 아방가르드의 유토피아 기획이다. 다다와 초현실주의는 이미 오래전에 미술계의 주류로 제도화한 상태였다. 다른 한편, 아방가르드 운동들이 한때 연대를 했던 사회주의는 이미 매력이라기보다는 환멸의 대상으로 전락해갔다. 특히 히틀러-스탈린 동맹은 아직도 진보의 가치를 믿는 지식인들에게는 커다란 지적 충격을 주었다. 소련이라는 현실사회주의 역시 그들이 원하던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기 드보르, ‘벌거벗은 도시’(The Naked City), 1957. 종이에 채색된 심리지리학 지도 33×48㎝


그러는 사이에 전후의 자본주의는 새로운 발전단계에 접어든다. 전후의 경제 붐을 통해 ‘소비’ 자본주의로 모습을 바꾼 것이다. 공장에서 생산을 하던 혁명적 ‘노동자’는 마트에서 쇼핑을 하는 순응적 ‘소비자’가 되었다. 이 변화를 반영하는 예술이 바로 팝아트다. 체제에 저항했던 모더니즘 예술과 달리 팝아트는 처음부터 체제에 순응적이었다. 이 점에서는 앤디 워홀을 대표로 하는 미국의 팝아트나, ‘인디펜던트 그룹’이 주도하던 영국의 팝아트나 차이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팝아트는 ‘포스트모던’하다. 

하지만 정치적 아방가르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57년에 결성된 상황주의 인터내셔널’(SI: Situationist International). SI 그룹의 업적은 전후의 변화된 환경 속에서 “소비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문화정치학”을 제공해 준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이야말로 팝아트의 진정한 안티테제였다고 할 수 있다. 결성 초기에 상황주의는 예술적 아방가르드로 활동했으나, 1962년 이후 정치적 아방가르드로 변신해, 그 유명한 68년 학생봉기의 정신적 기폭제가 된다. 


■ 문자주의와 이미지주의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모태는 두 개의 예술가 조직이었다. 하나는 프랑스의 기 드보르가 이끄는 ‘문자주의 인터내셔널’(Lettrist International). ‘문자주의 그룹’에서 분리된 좌익들이 1952년에 결성한 이 조직은, 찰리 채플린의 기자회견을 방해하거나 에펠탑의 폭파를 공언하는 등, 부르주아 사회에 충격을 주는 일련의 스캔들을 연출했다. 에펠탑을 폭파하려 한 것은 밤마다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이 침실로 흘러들어와 수면을 방해했기 때문이란다. 이는 문자주의 인터내셔널이 다다의 전통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자주의 그룹은 텍스트와 이미지를 해체하는 콜라주 작업을 해 왔다. 이 역시 전형적인 다다의 기법이다. 문자주의 그룹이 이 작업을 순수 예술적 관점에서 수행했다면, 거기서 분리되어 나온 문자주의 좌익(LI)은 그것을 정치적 목적에 전용하려 했다. 그들의 목표는 “전복적 상황의 구축을 통해 일상생활을 비판”하고, “여가에 대한 전투를 통해 계급투쟁을 진척”시키는 데 있었다. 1953년 드보르는 거리의 벽에 “일하지 말라”고 쓴다. 이 전설적 낙서는 훗날 68운동의 슬로건이 되어 돌아온다.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또 다른 축은 덴마크의 아스게르 요른이 이끄는 ‘이미지주의 바우하우스 국제운동’(Imagist Bauhaus)이다. 이 그룹의 모태가 된 것은 ‘코브라’(CoBrA) 그룹이었다. 이 단체의 멤버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지만, 동구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경멸했고,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와도 거리를 취했다. 구상도 아니고 추상도 아닌 이들의 탈구상(disfiguration) 회화는 초현실주의에 가까웠으나, 이들은 초현실주의의 무의식이 너무 ‘주관적’이라 거부하고, 집단적-사회적 원리를 추구하는 공공의 기획을 강조했다. 

이미지주의 바우하우스 결성의 계기는 1953년 막스 빌이 바우하우스의 재건을 위해 요른을 찾은 것이었다. 요른은 기술과 예술을 통합한다는 발상은 막스 빌과 공유했지만, 그의 기능주의와 실용주의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막스 빌)는 회화나 상상의 탐구나 환타지, 기호, 상징이 없는 아카데미를 만들기를 원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기술 교육이다. 하지만 나는 실험예술가의 이름으로 이미지주의 바우하우스를 위한 국제운동을 창설하려 한다.” 요른에게 기술과 예술의 통합은 실용이 아니라 실험이어야 했다. 


■ 예술의 폐지와 실현 

1957년 이 두 단체가 통합해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이 출범한다. 상황주의 운동은 마르크스주의를 갱신하고, 아방가르드를 부활시켜, 소비자본주의라는 변화한 환경 속에서 양자를 다시 통합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팝아트는 소비자본주의의 생활방식을 순진하게 긍정한다. 이에 맞서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은 인간을 소외시키는 이 소비주의 생활방식에 대한 ‘대안’을 기획한다. 예술의 수단으로 진정한 욕망을 실현하는 데 적합한 환경을 창조하는 것. 이를 그들은 “상황의 구축”이라 불렀다. 


주세페 피노 갈리지오, 산업회화(Rotolo di pittura industriale), 1958

상황주의 운동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것은 기 드보르의 저서 <스펙터클의 사회>다. “근대예술의 종말을 나타내는 두 흐름은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였다. 이들은 …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마지막 대공세와 그 시기를 같이했다. 그리고 이 운동의 실패로 이 두 흐름은 이전에 그들이 죽었다고 선언한 그 예술 속에 갇히게 됐다. 이것이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가 무력화한 근본적인 이유다. … 다다이즘이 예술을 실현하지 않고 폐지하려 했다면, 초현실주의는 예술을 폐지하지 않고 실현하려 했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종언을 고했다. 아울러 그와 연대했던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역시 실패로 끝났다. 필요한 것은 낡은 마르크스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혁명이론과,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예술운동이다. 이 두 흐름은 예술을 ‘폐지’하지도, ‘실현’하지도 못한 채 그냥 ‘예술’ 속에 갇혀 버렸다. 새로운 예술은 삶 속에서 자신을 실현하는 가운데 폐지해야 한다. 그리하여 “예술은 필연적으로 아방가르드적이고, 그런 예술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다. 예술의 전위는 그 자체의 사라짐이다.” 

다다는 예술을 삶에서 실현하지 못한 채 예술계를 공격하다가 역설적으로 스스로 예술이 되어 버렸다. 초현실주의 역시 예술을 삶에서 실현하지 못한 채 스스로 예술계로 들어가 그 안에서 하나의 ‘양식’이 되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상황주의는 예술의 변증법적 지양을-예술의 ‘실현’이 곧 예술의 ‘폐지’가 되는 상황을-추구한다. 

혁명적인 예술은 삶 속에 실현되는 가운데 더 이상 자신이 삶과 구별되지 않는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이 목표를 이루는 데 상황주의 운동은 크게 네 가지 전략을 사용한다. 


■ 상황주의의 전략들 

첫째는 ‘표류’(de+'+rive)의 전략이다. 드보르는 이렇게 정의한다. “몇 미터의 공간 안에서 거리 환경의 급격한 변화. 상이한 심리적 분위기를 갖는 지대들로 도시를 명확히 분할하는 것. 자동적으로 가장 저항이 덜한 길을 택해 정처 없이 걷는 것.” 가령 보들레르의 만보객(flaneur)처럼 할 일 없이 도시를 방황할 때, 우리는 평소에 물리적으로만 접하던 도시를 새로이 심리적 환경으로 체험하게 된다. 여기에는 뭔가 전복적인 측면이 있다. 그 방황을 통해 환경 전체가 내 안에서 심리적으로 재코드화되기 때문이다. 

이는 자연스레 ‘심리지리’(psychogeography)로 이어진다. 드보르는 심리지리를 “의식적으로 조직된 것이든 아니든, 지리적 환경이 개인의 감정과 행동에 끼치는 특수한 효과에 관한 연구”로 규정한다. 평소에 다니던 것과는 다른 경로를 취할 때, 도시는 우리에게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다. 심리지리는 이렇게 “도시를 탐험하기 위한 재미있고 창의적인 전략”을 연구한다. 드보르의 ‘벌거벗은 도시’(1957)는 파리의 열아홉 구역을 연결해 그런 심리지리적 배회의 가능한 경로를 가설적으로 제시한다.

표류와 심리지리는 ‘통합적 도시주의’(unitary urbanism)로 나아가게 된다. 앞의 두 가지가 도시의 심리적 의미를 찾아내는 발견적 기획이라면, 통합적 도시주의는 거기에 기초해 바람직한 환경을 구축하는 창조적 기획이라 할 수 있다. 표류와 심리지리가 주로 문자주의 계열에서 발전시킨 전략이라면, 통합적 도시주의는 ‘예술과 기술의 통합’을 추구한 바우하우스에게 더 친근한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콩스탕의 ‘바빌론’(1958)은 유목적 이동과 대중적 유희를 가능하게 하는 통합적 도시주의 기획의 구체적 예를 보여준다. 

마지막은 ‘변환’(de+'+tournement)의 전략이다. 이는 ‘스펙터클’이라는 매스미디어 문화에 대항하는 카운터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일찍이 브레히트는 자본주의적 대중문화의 요소를 혁명적 실천의 도구로 전환하는 ‘기능 전환’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변환은 자본주의의 상업적 광고와 정치적 구호를 뒤집어, 자본주의 체제를 공격하는 데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팝아트가 대중문화의 아이콘들을 그대로 전용했다면, 상황주의자들은 지배문화의 요소를 ‘탈(脫)가치화’한 후, 혁명적 목적을 위해 그것을 ‘재(再)가치화’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 매체의 상황주의적 사용

“상황주의적 회화나 음악은 있을 수 없다. 오직 매체의 상황주의적 사용만이 있을 뿐이다.” 초현실주의는 물론이고 심지어 다다마저 하나의 ‘양식’이 되었지만, 상황주의 예술에 양식은 있을 수 없다. 그저 ‘사용’이 있을 뿐이다. 피노 갈리지오의 ‘산업회화’(1959)는 이를 잘 보여준다. 언뜻 보기에 ‘산업회화’는 추상표현주의 작가의 작품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그림은 실은 모조 조립라인에서 자동으로 생산된 것이다. 한마디로 제작방식이 공장적 생산을 추구한 팝아트를 닮은 셈이다. 

“지난 목요일, 파리 비엔날레의 프리뷰가 있던 날, 현대미술관의 두 건물을 가르는 골목길에 이상한 기계-페인팅 머신-가 돌아가고 있었다. 길다란 종이 두루마리가 풀려나오면, 진동하는 파이프가 그 위로 잉크 방울과 선을 뿌려댔다. 혼란스럽게 돌아가며 윙윙거리는 소음을 내는 칼날이 완성된 작품을 작은 부분으로 절단했다.” 

상황주의 회화나 음악은 없다고 하니, 주목해야 할 것은 매체의 “상황주의적 사용”이리라. 갈리지오는 이 작품을 추상표현주의라는 고급예술과 팝아트가 전용하는 대중문화를 조롱하는 데 사용한다. 갈리지오는 이 작품을 마치 공장에서 생산된 두루마리 옷감처럼 미터 단위로 잘라 팔 생각이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의 방식을 들여다가, 그것으로 자본주의적 소비와 방식을 조롱하는 데 전용한 셈이다. 이를 앞에서 우리는 ‘변환’이라 부른 바 있다. 

‘산업회화 선언’에서 갈리지오는 이렇게 말한다. “자동화와 더불어 전통적 의미에서 작업도, 더 이상 잔업 시간도 없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반(反) 경제적 에너지를 해방시키는 자유로운 시간뿐이다.” 언뜻 듣기에는 자동화가 약속하는 미래에 대한 찬양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바탕에 깔린 것은, 아무리 자동화를 해도 인간에게 결코 여유를 주지 않는 자본주의에 대한 조롱이다. 상황주의는 1972년 완전히 해체된다. 그 후로 우리는 더 이상 현대미술에서 ‘아방가르드’라는 말을 듣지 못한다.

- 경향신문 2012.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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