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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의 중심 유럽에서 만난 거장들 <하> 타다시 가와마타의 '관계'

임은정

   
프랑스와 일본을 오가며 설치미술을 선보이는 타다시 카와마타가 파리 아틀리에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임은정 기자
- 부산선 생선상자 3600개 
- 대구선 사과상자 8000개…

- 페인팅 우세하던 1980년대
- 도시·현지인에 대한 기억 쌓듯
- 물건 쌓아 구조물 만들어 주목

- 2007년 日 떠나 佛교수 재직
- '조각과 건축 사이' 작업 늘어
- 죄수·실업자·노인 할 것 없이
- 현지인과 공동 작업 즐겨

지난 봄, 부산에서는 갤러리 전체를 생선 나무 상자 3600개로 뒤덮는 파격적인 전시가 있었다. 부산의 명물, 자갈치의 역사성을 담은 소재로 바닥부터 천장까지, 한 치의 틈도 없이 꽉꽉 쌓아올린 작품이다. 당시 작가는 '사람들은 작품 밖에서 보는데 그치지만 나는 작품 안에 들어가 그 속을 통과하면서 풍경을 보기를 원한다. 생선 대신 사람을 상자 안에 넣고 싶다'라고 말했다. 

   
지난 달 파리에서 열렸던 피악 아트페어(세계3대 아트페어)에 소개된 그의 작품.
지난 8월, 작가는 대구미술관(8월 14일~11월 4일)으로 무대를 옮겼다. 이번에는 사과를 담는 나무 상자 8000개였다. 작가는 경상북도 각지의 사과 재배 농가를 수소문해 방치된 사과상자를 모아 흥미로운 작업을 했다. 실내 전시장에서는 사과나무 과수원을 연상시키는 작품을, 미술관 외부 기둥에는 까치집을 연상시키는 작은 설치작품과 우르르 쏟아져 내릴 듯한 대형 작품을 만들었다. 미술관 김선희 관장은 '작가의 작업은 권위적이고 딱딱한 공간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그 곳이 속한 도시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밝혔다. 

주인공은 프랑스와 일본을 오가며 설치미술을 선보이는 타다시 카와마타(59). 일본 홋카이도에서 태어나 도쿄예대를 졸업한 작가는 1982년, 29세 젊은 나이에 제40회 베니스비엔날레 일본관 작가로 초청됐다. 그는 페인팅 작업이 우세하던 1980년대, 물건을 쌓아 구조물을 만드는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후 카셀도큐멘타(독일), 요코하마 트리엔날레(일본), 부산비엔날레 등에서 초대 작가와 전시감독으로 활약했다. 2007년 이후 지금까지 파리 '에꼴 드 보자르' 교수로 재직 중이다.

파리의 아틀리에를 옮긴 그를 지난달 15일 현지에서 만났다. 1층 작업실, 2층 가정집으로 쓰고 있는 그의 아틀리에는 100㎡ 정도였다. 나무 책상을 중심으로 작품 몇 점이 오른쪽 벽면에 설치돼 있었다. 프로젝트 중심으로 현장 작업을 하기에 사무실 형태의 작업실을 만들었다.

대구 전시 얘기부터 꺼냈다. 그는 '부산(갤러리 604) 전시를 본 미술관 관장과 6월에 만나 7월에 결정하고 8월에 전시를 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굉장히 빨리 전개된 전시였다'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언제부터 파리에 둥지를 틀었을까. '요코하마 트리엔날레 전시감독을 끝내고 5년 전 파리로 이사를 했다. 도쿄 사무실은 정리했다. 아이 학교와 가까운 곳을 찾다가 지난해 12월 아틀리에와 집이 붙어있는 이곳을 찾아냈다. 파리가 정말 좋아서 거주한다기보다는 우연히 그렇게 됐다.' 

하지만 그는, 일본과 달리 주말은 가족과 함께 보내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파리가 '생각·창조의 공간'임을 강조했다. 일본이 에너지를 방전하는 곳이라면 파리는 충전하는 곳이라는 것. 작가는 '이곳에서는 주로 계획을 짜고 작은 모형을 만든다. 인터넷에서 정보도 구한다'면서 '모든 아이디어의 산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젊어서 일찍 결혼했다면 양육을 위해 일을 했을 텐데 쉰이 넘어 결혼하다보니 라이프스타일이 그대로다. 아내도 기자 출신이어서 일에 대한 이해를 잘 해 준다. 주로 아이들이 자는 밤에 작업을 하다보니 낮밤이 바뀌었다'고 소개했다. 요코하마 트리엔날레 당시 인연을 맺은 기자와 늦깎이 결혼을 하게 된 카와마타는 번잡한 파리 중심부에 있으면서도 자녀 학교와 가깝고, 매우 조용하다며 만족해했다. 그는 '150여년 전 집주인도 아틀리에로 사용했다'고 얘기했다. 

화가로 출발한 그가 어떻게 설치미술로 유명해졌을까. 작가는 1987년이 '건축으로 가는 출발점'이었음을 강조했다. '캔버스에서 틀(이젤)만 떼내 교량을 쌓아올린 작품이었는데, 그때 프레임(frame)에서 자유로워졌다. 아티스트로서 건축과 예술 사이에서 자유롭게 작업하게 됐다.' 

조각과 건축 사이에서 작업하는 일이 많다는 작가는 미국 일본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지의 대학에서도 건축학과 학생들을 상대로 워크숍을 한다. 일반인이 참여하는 워크숍 형식의 프로젝트 작업도 많다. 때로는 알코올 중독자, 죄수, 실업자, 노인 등이 작업에 같이 참여하면서 정신적·육체적 치료 효과를 보기도 했다. '현지 주민들과의 공동 작업(co-work)을 중시한다. 짧게는 한 달, 길게는 1년가량 그 지역에 머무르면서 현지인과 협업하는 방식이다. 미술관 외부와 도시의 아웃사이더, 그 현장을 연결하는 것이 좋다.' 작품 속에 담아온 그의 생각이다. 

예술가로서 파리의 의미를 물었다. '이곳은 작가에게 관대하고, 작가를 존경하는 나라다. 어느 나라에서 왔든, 여자든 남자든 작가라는 사실만으로 존경을 받는다. 미국 뉴욕이 예술의 도시지만 엄격한 계급이 주어진다면, 파리는 리버럴(liberal)하다.' 물론 그의 답은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작가에게 비친 '파리'의 오늘일지도 모른다. 


# 장 피에르 레이노

- '빨간 화분' 오브제作 유명, 50년 간 화살에 꽂혀있어

   
프랑스의 조형미술가 장 피에르 레이노가 파리 작업실에서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

부산 광안리 해변 서쪽 끝에 붉은 동백꽃을 연상시키는 대형 화분 작품이 있다. 몇 년 전 부산시의 '야외 빛 미술관' 프로젝트에 선정된 프랑스의 조형미술가 장 피에르 레이노(73)의 '생명의 원천'이다. 1962년 첫 선을 보인 '빨간 화분'은 이제 레이노 예술의 상징이 됐으며, 파리 퐁피두센터, 중국 자금성 등에서 볼 수 있다. 

지난달 19일, 파리에서 그의 아틀리에를 찾았다. 파리 몽파르나스 고급 주택가에 위치한 작업실은 두 개층을 하나로 뚫어 사용 중이었다. 파리 작업실에는 작품 사진과 미니 화분, 오랜 작업의 주제인 해골 사진 등이 걸려 있었다(파리에서 80㎞ 외곽에 다른 작업실이 있다). 침대 옆에는 중국 팝아티스트 작가 왕광위의 작품과 수백 년 된 분재가 놓여 있었다. 

그는 최근에 선보였던 '화살' 작업을 소개했다. '부산 바닷가 화분(높이 6m)보다 5배나 큰 화살(금속 소재, 가로 2m50㎝×세로30m)을 벨기에 바닷가에 설치했다. 미국의 엔지니어링 기술자들이 포인트 하나를 찍어 땅에 박아넣었는데 엄청난 기술을 요했다. 수직의 화살을 심는다는 의미는 '신처럼 내가 이 장소를 택했다'는 것이다.' 올해로 화살 작업을 한 지 50주년이 됐다는 그는 왕성한 체력을 자랑하며 100주년 때 기념행사를 하겠다는 농담을 건넸다. 1993년 이탈리아 베니스비엔날레 프랑스관을 2만4000개의 뇌(세라믹 소재)로 가득 메운 작업 얘기도 들려 주었다. '뇌를 죽음과 연계시키지 않고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시대를 넘어 다른 시대 사람과 입을 맞추는 그런 작업이다. 예술은 자유다.'

그는 천안문 광장이나 평양광장, 판문점 등에서 각 나라의 국기를 들고 사진을 찍는, 다소 정치적인 작업도 즐겨 했다. 2006년 서울 전시에서는 오브제로서의 남북한 국기를 병치시키는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내 국기는 가슴에 품거나 저주하는 상징물이 아니다. 동시대를 사는 한 예술가의 현실 참여적인 개념에서 탄생한 심리-오브제 성격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 국제신문 2012.11.07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21107.2202219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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