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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현대미술 이야기](10) 플럭서스

진중권

ㆍ연극·음악·회화적 ‘창작 흐름’이 곧 작품… 백남준이 대표적 작가

1950년대 말 폴록의 죽음과 함께 미국의 모더니즘 운동도 종말을 맞기 시작한다. 모더니즘에 대한 그린버그의 관념은 오로지 순수 추상만을 모더니즘의 적자로 인정하는 매우 협소하고 독단적인 것이었다. 생명을 다한 모더니즘의 대안으로 부상한 것은 재스퍼 존스에서 시작하여 앤디 워홀에서 완성되는 팝아트. 추상표현주의의 주도자들이 정치적 급진주의자였다면, 팝아트는 소비 자본주의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매우 체제 순응적인 운동이었다. 플럭서스는 이 두 흐름의 대안으로 등장했다. 

■ 뒤샹과 케이지 

추상을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이 종언을 고하면서, 다다가 아방가르드의 새로운 원천으로 부상한다. 이 네오다다의 흐름에 예술적 영감을 준 것이 바로 마르셀 뒤샹. 특히 1957~1959년 사이에 뉴욕의 뉴 스쿨에서 실험음악을 가르친 존 케이지는 뒤샹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그의 수업에는 조지 마키우나스, 조지 브레히트, 라 모테 영, 딕 히긴스 등 훗날 플럭서스의 멤버가 될 이들이 참가했는데, 케이지를 통해 뒤샹에게로 주목하게 된다. 플럭서스는 자신을 ‘네오다다’로 의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네오다다’라는 발상은 곧바로 원조 다다이스트의 반대에 부딪힌다. 마키우나스가 보낸 편지에 라울 하우스만은 이렇게 답했다. “독일의 네오다다이스트에 관한 당신의 언급에 대해 기꺼이 논평하죠. 나는 미국인들도 ‘네오다다이즘’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네오’라는 말은 아무 의미도 없고, ‘이즘’이라는 말은 구식이니까요. 왜 그냥 ‘플럭서스’라고 하지 않죠? 내게는 그게 더 나아 보여요. 그것은 새로운 것이고, 다다는 이미 역사 속에 들어갔으니까요.” 

‘플럭서스’라는 말은 ‘흐르다’는 뜻을 가진 라틴어 ‘fluere’에서 비롯됐다. 마키우나스는 이 말을 사전을 들춰보다가 우연히 찾아냈다고 한다. 이는 물론 사전에 칼을 찔러 그 칼끝이 닿은 데에 있는 낱말(‘다다’)을 운동의 이름으로 골랐다는 그 유명한 전설의 반복이다. 일찍이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유전하기에, 우리가 같은 강에 두 번 몸을 담을 수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플럭서스의 이벤트들(events)은 이 강물의 비유가 함축하는 우연성, 일회성, 일시성의 이미지와 일치한다. 

1961년 마키우나스는 갑자기 뉴욕을 떠나 서독에 주둔 중인 미 공군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기 위해 비스바덴으로 이주한다. 그곳에는 이미 하인츠 슈톡하우젠을 따르는 전위적 음악가들이 존재했고, 1958년에는 케이지가 다녀간 바도 있어, 실험음악과 관련한 행위예술에 대한 관심은 이미 지대한 편이었다. 마키우나스는 해외 거주 미국인과 라인란트와 네덜란드의 작가들을 끌어 모아 이제는 전설이 된 일련의 이벤트를 개최한다. 이것이 플럭서스의 창세기다. 



백남준, ‘머리를 위한 선(Zen for Head)’, 1962. 잉크와 토마토 주스가 들어있는 통에 머리를 담갔다가 이를 붓처럼 사용하여 긴 종이에 선을 그은 퍼포먼스 작업.


■ 정신병자들이 탈출했다 

1962년 9월1일부터 23일까지 마키우나스는 요셉 보이스와 볼프 포스텔의 도움을 받아 비스바덴에서 플럭서스 페스티벌(festum fluxorum)을 개최한다. 여기에는 히긴스, 브레히트, 백남준을 비롯한 여러 작가들이 참여했다. 가장 악명 높은 것은 필립 코너가 작곡한 ‘피아노 활동’. 이 곡의 악보는 ‘뽑거나 두드리라’ ‘물건을 떨어뜨리라’ ‘음향판을 때리라’ 등의 명령어로 이루어졌다. 연주가 끝났을 때 피아노는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서독의 언론은 이 사건을 “정신병자들이 탈출했다”고 보도했다. 

케이지의 실험음악에서 출발했기에, 플럭서스의 작업은 ‘개념미술’에 ‘해프닝’을 결합한 것에 가깝다. 실제로 헨리 플린트는 플럭서스 예술을 “개념예술”로 규정하기도 했다. 라몬테 영의 작품(‘밥 모리스에게 보내는 콤퍼지션 1960 #10’)은 단 하나의 문장으로 되어 있었다. “직선을 하나 그리고 그것을 따라 가라.” 연주는 백남준이 맡았다. 그는 기다란 종이 두루마리를 바닥에 깔아놓고, 먹물에 머리를 담근 후 바닥에 엎드려 잉크 묻은 머리로 종이 위에 긴 선을 그렸다. 이는 물론 해프닝의 요소라 할 수 있다. 

백남준은 자신의 퍼포먼스에 ‘머리를 위한 선(禪)’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악보와 실연이다. 물리적 오브제로서의 작품(기다란 선이 그려진 종이)은 별 의미가 없다. 퍼포먼스가 끝난 후 종이는 사실 내버려도 무방할 것이다. 보존해도 기껏해야 기록으로서의 의미만을 가질 것이다. 플럭서스는 고급예술은 물론이고, 일상생활에 속하는 레디메이드마저 해체시켜 버린다. 이 점에서 그것은 누보리얼리즘과 구별된다. 플럭서스의 ‘작품’은 사물이 아니라 흐름, 글자 그대로 플럭서스로 존재한다. 

14회의 연주회로 이루어진 플럭서스 페스티벌은 ‘인터미디어’(intermedia)라는 플럭서스의 본질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다시 백남준의 퍼포먼스로 돌아가 보자. 우선 여기에는 악보와 연주, 말하자면 음악적 요소가 있다. 하지만 그 악보가 문장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퍼포먼스의 문학적 성격을 말할 수 있다. 한편 머리에 잉크를 묻혀 종이 위에 선을 그린다는 점에서 거기에는 회화적 요소가 있다. 게다가 관객 앞에서 신체를 이용해 연기를 하는 것은 명백히 연극적 요소다. 

■ 다다와 레프 

“모든 것이 예술이고 누구나 예술을 할 수 있다.” 예술과 생활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아방가르드의 오랜 꿈이다. 마키우나스는 흥미롭게도 이를 소비에트 아방가르드의 가장 급진적 날개인 ‘레프’(LEF·예술의 좌익전선)와 연결시킨다. 레프는 인민의 삶과 유리된 예술을 포기하고 인민의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기 위해 아틀리에를 떠나 아예 공장으로 들어간 바 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레프의 생산주의 노선은 예술을 생활 속에 실현하려는, 미술사에서 가장 급진적인 시도였다. 

“사회에서 예술가의 지위를 비전문적으로 만들기 위해 예술가의 불필요성과 관객의 자족성을 증명해야 하며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고 누구나 예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따라서 예술-오락은 단순하고, 재미있고, 꾸밈이 없으며 … 아무런 기술도 수많은 리허설도 필요로 하지 않아야 하며, 어떠한 상품 가치나 제도적 가치도 갖지 않아야 한다. 제한을 없애고, 대량생산하고,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결국 누구나 생산할 수 있게 만듦으로써 예술-오락의 가치를 떨어뜨려야 한다.” 

이 언급은 다다의 장난스러운 오락과 레프의 진지한 생산주의 노선을 하나로 결합시킨다. 이 결합이 한편으로 플럭서스를 체제 순응적인 팝아트와 구별시켜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팝아트에 근접시켜 주기도 한다. 생각해 보라. 워홀 역시 아틀리에를 ‘공장’이라 부르고, 작품 제작을 대량생산에 맡기고, 고급예술과 일상생활의 위계를 무너뜨리고, 예술가의 주체성을 부정했다. 워홀이 꿈꾸는 사회 역시 “대중이 제작한 실크스크린이 내가 만든 것과 구별되지 않는 사회”가 아니었던가. 



구보타 시게코, ‘버자이너 페인팅(Vargina painting)’, 뉴욕, 1965. 구보타는 속옷 가랑이 사이에 붓을 달고 바닥에 놓인 종이에 붉은 물감을 칠했다. ⓒ Shigeko Kubota | VAGA, NY and SACK, Seoul, 2012

■ 플럭서스의 모순 

플럭서스가 “상품이야말로 예술이 생산되고 지각될 수 있는 유일한 오브제 유형이자 유통”이라 정의한 것도 판단을 어렵게 한다. 실제로 마키우나스는 뉴욕에 플럭서스 숍을 열어, 플럭서스 작가들이 만든 오브제들을 판매하려 했다. 물론 거기에 진열된 상자나 기계장치, 대량생산된 싸구려 작품들은 하나도 팔리지 않았다. 이렇게 상업적 유통방식을 흉내 낸 것이 과연 예술을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인지, 자본주의적 유통을 비판하려는 농담인지 구별하기 힘들다. 

마키우나스는 다소 자조적인 목소리로 플럭서스를 “전위(avant-guard)와 ‘한 발 앞서는 경쟁을 하고 싶은 충동도 없는 후위(rear-guard)’ ”라고 규정한 바 있다. 하지만 1963년에 그가 작성한 ‘플럭서스 선언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추방: 부르주아의 병폐와 지적이고 전문적이며 상업화한 문화를 추방하라. 죽은 예술, 모방, 인위적 예술, 추상적인 예술, 환영적인 예술, 수학적인 예술의 세계를 추방하라. ‘유럽주의’ 세계를 추방하라.” 거의 미래파를 방불케 하는 아방가르드의 구호다. 

할 포스터는 이와 더불어 또 다른 모순을 지적한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플럭서스는 “우연적 이벤트와 일시적 오브제를 미학적 표준”으로 만들려 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 자체는 “무한한 상품들 속에서 다른 모든 사물과 함께 예술적인 대상도 덧없고 일회적이며 폐기 가능한 영역으로 좌천시키는 뚜렷한 사회적 경향을 맹목적으로 지지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 말하자면 플럭서스가 하려던 그 일을, 문화산업이 이미 부정적인 맥락에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 플럭서스 이후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플럭서스는 이후에 펼쳐질 어떤 경향들의 맹아를 보여주었다. 플럭서스는 동양과 서양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만난 최초의 예술운동이었다. 플럭서스의 인큐베이터였던 케이지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선(禪)에 심취해 있었고, 로베르 필리우는 1950년 한국부흥위원단(UNKRA)의 일원으로 한국에 배치되어 아시아 문화를 처음 접했다. 거기에 백남준을 비롯하여 구보다 시게코, 오노 요코, 시오미 미에코 등 한국과 일본의 작가들이 참여함으로써 플럭서스는 진정한 의미의 국제적 운동이 될 수 있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여성주의 예술의 맹아로 볼 만한 요소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플럭서스 퍼포먼스 중에서 시각적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외려 여성 작가들의 것이었다. 가령 후에 존 레논의 부인이 된 오노 요코는 도쿄에서 ‘자르기 작품’(1964)이라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무대에 다소곳이 앉은 그녀는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이 걸친 옷을 가위로 조금씩 잘라내게 했다. 그보다 충격적인 것은 후에 백남준의 부인이 되는 구보다 시게코의 ‘버자이너 페인팅’(1965)으로, 여성이 성기에 붓을 꽂아 그림을 그린다는 내용이다. 

플럭서스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요소는 바로 ‘인터미디어’의 경향이다.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이 참가했기에, 플럭서스의 작업은 자연스레 매체와 매체를 넘나드는 경향을 띤다. ‘플럭서스’라는 명칭 자체가 응고된 ‘작품’(work)보다는 시간 속에 흘러가는 ‘실행’(perform)을 지시한다. 그 결과 물리적 대상을 만드는 작업이었던 미술이 연극성과 음악성 사이에 있는 어떤 지점으로 이동하게 된다. 사실 오브제를 만들 때조차도 플럭서스의 작업에서는 언어학적 생산과 시각적 생산의 차이는 흐려진다. 

화가나 조각가나 사진가의 구별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오늘날의 작가들은 더 이상 매체에 구애받거나, 그것의 고유성을 고집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필요하면 드로잉을 하거나 페인팅을 할 수도 있지만, 필요하면 펜이나 붓 대신에 언제라도 카메라나 비디오를 잡을 준비가 되어 있다. 혹은 일상의 오브제로 설치 작업을 하거나, 혹은 자신의 신체로 퍼포먼스를 할 수도 있을 게다. 매체의 고유성과 순수성에 집착하던 모더니즘의 붕괴를 이보다 더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있을까? 

공교롭게도 이는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아날로그 매체들 사이에 존재하던 질적 차이를 지워버리는 오늘날의 기술적 조건과도 맞아 떨어진다. 플럭서스의 작가들은 텍스트와 이미지와 사운드 사이를 자유로이 오갔다. 그 세 가지 모드로 상호 변환될 수 있는 것이 또한 디지털 매체의 특성이 아닌가. ‘플럭서스’는 그 이름이 함축하는 것처럼 문학적, 음악적, 연극적, 조형적으로 덧없는(ephemeral) 예술이었다. 디지털의 이미지 또한 그러하다.

- 경향신문 2012.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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