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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연희의 옛 그림 속 인물에 말을 걸다 (2) 이방운의 ‘사인암(舍人巖)’ - 조(趙)대감의 단양(丹陽)나들이

고연희

충청도 단양(丹陽)을 유람한 조선의 선비는 무수하게 많았지만 유람하는 그 모습이 그림으로 전해진 예는 매우 적다. 소개하는 그림 속 가마 탄 인물을 보라. 보란 듯 그림으로 기록된 유람의 주인공이다. 드문 예의 하나이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그가 누군지 검토된 바 없다. 그는 ‘조(趙) 대감’이 분명하니, 이 글에서 그를 조 대감이라 부르겠다. 그는 우리 역사나 문학사에 특별한 공헌을 남긴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이 그림에 대한 관심으로 그의 삶을 추적하고, 숨어있던 한 선비의 곁으로 다가가 보려고 한다.

유머러스 조 대감 

조 대감의 관하에서 일을 보는 윤 씨는 친밀하게 지내는 기생이 있었다. 그런데 그 기생이 또 다른 관리와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이를 안 윤 씨는 보란 듯이 그녀를 멀리했다. 행여 연회장에서 그녀와 마주치면 고개를 숙이고 옷깃을 바짝 여미어 그녀의 눈길이나 옷깃이 그에게 닿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 모습이 마치 윤 씨가 그녀를 존경하여 쩔쩔매는 것 같았다. 조 대감이 이를 보고 소리 내어 놀렸다. 

“어허! 형수로 예우하다니, 그 예법이 특이하구나!” 

기생과 첩으로 문제가 많던 시절에 윤 씨의 행동은 본보기가 될 만한 사례였다고 한다. 조 대감의 농담은 주변의 웃음을 터지게 했고, 윤 씨의 단정함은 세상에 선포됐다. 이 에피소드는 다산선생 정약용(丁若鏞)의 기록으로 전한다. 조 대감의 빈번한 익살에 정약용은 눈이 동그래져 탄복하곤 했다. ‘놀라지 마십시오. 조 대감의 해학이 원래 심하십니다.’ 그 당시 정약용이 들은 귀띔이었다. 



의리 있던 조 대감

왕조실록에서 조 대감을 찾아보면, 고을에 자비를 베풀어 포상을 받았다는 기록은 딱 한 번 나온 뒤로, 그 나머지는 깡그리 암행어사에게 고발되어 감직 혹은 파직을 당했다는 기록뿐이다. 왜 그랬을까. 그의 관할에서 화재가 나서 군사서류가 잿더미가 된 일이 그 하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민사재판을 군법에 적용하여 다스렸다는 재판소동이 또 다른 소동이었다. 실로 ‘엉뚱한 일’이라고 ‘홍제전서’에 기록돼 있다. 아마도 조 대감은 죄질의 파렴치에 화가 났던 모양이다. 그렇기로서니 민간인을 군법으로 다스리다니! 국가적 위법이다. 그는 청풍부사를 지내다가 또다시 암행어사에게 고발되어 파직당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청풍마을에서 의로움(義)을 원하는 이들이 모두가 조 대감을 그리워한다”는 기록이 함께 전한다. 보나 마나, 조 대감은 군사재판 못지않은 엉뚱한 짓을 또 저질렀고 그것은 의리와 인정에 부합하는 일이었다. 그 후 조 대감은 금산부사가 되었다. 역시나! 고발되고 파직되었다. 



자는 안숙, 이름은 조영경. 

조 대감의 이름은 조영경(趙榮慶·1765년 생년시 합격). 할아버지 조태채(趙泰采·1660∼1722)가 명신(名臣)으로 이름이 높았고, 아버지 조관빈(趙觀彬·1691∼1757)이 대제학에 올랐으니, 명문가 출신이다. 조선시대 양반가에서는 아들이 성인이 되면 이름을 그만 부르고 자를 지어 불렀다. 조영경이 관(冠)을 쓰고 성년식을 치를 때, 아버지 조관빈이 글을 지어 축복했다. “사랑하는 나의 막내아들이여, ‘안숙(安叔)’이라 자(字)를 삼느니, 세상을 편안(安)하게 다스리는 인물이 되거라!”

조영경은 명신 조태채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종종 품계를 올려 받았다. 고발되어 파직되더라도 다시 번듯한 군수자리를 얻었다. 옛 신하의 후손을 보살피는 국왕 정조(正祖)와 헌종(獻宗)의 배려 덕분이었다. 게다가 조영경의 형이 일찍 죽었기에 나라에서 주는 음복은 모두 조영경의 차지였다. 

‘조상 덕’에 팔자가 좋았으니 그럴 만하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가문의 영광이나 제 몸의 출세를 위하여 처세에 급급하지 않고 의리와 소신으로 버티며 호탕한 유머를 터뜨렸던 선비 조 대감. 호감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사인암’에 이르다. 

이제 다시 그림을 보라. 해학과 의리의 조 대감이 가마를 타고 단양나들이를 나섰다. 그림 속 조영경은 나이 지긋한 청풍부사 시절이다.

조 대감이 이른 곳은 ‘사인암(舍人巖)’이다. 충청도 단양의 풍취에서도 최고라 일컬어진 바위언덕이다. 바위이름이 사인암이라니 이상하다. 집 사(舍)와 사람 인(人) 이의 조합으로 그 뜻을 알 수 없다. 여기서의 사인(舍人)은 ‘사인’(捨人)을 대신한다. 버릴 사(捨)와 사람 인(人)이다. 옛 한자사용에서 흔히 보는 방식이다. 따라서 그 뜻은 ‘사람을 버리다’가 되고, ‘사람의 세상을 버리다’가 된다. 세상 살던 사람이 세상을 버리기 쉬운가. 그래서 이름이 ‘사인’이다. 그리하고 싶을 만큼 사람들의 넋을 잃게 하는 바위란 뜻이다.

사인암의 모습은 무어라 형용하면 좋을까? 다산선생 정약용은 “바위벽이 대패로 깎아놓은 듯”하다 했고, 청장관 이덕무(李德懋)는 “붓에다 유황을 찍어 죽죽 내리그은 듯하다”고 했다. 사인암은 분명히 자연이건만 도대체 자연스럽지 않으니 그리들 표현하신 게다. 

그림 속 사인암은, 실로 대패로 깎아낸 듯 붓으로 내리그어 기이하게 세워져 있다. 그 앞에 흐르는 맑은 물은 바위의 풍취를 배가시켜 준다. 만약에 사인암이 깊은 산 속에 있었다면 절경으로 꼽히지는 못했을지 모른다. 그래서이다. 사실 이 그림은 사인암과 너른 물이 어울린 풍광을 그리고자 사인암 뒤의 나무와 언덕을 모두 제거했다. 사인암과 너른 물은 서로 반대방향에서 그렸다. 그러나 단양의 사인암을 실제로 본 사람이라도 이 그림의 속임수를 단숨에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사인암과 물 배경의 인상만이 우리의 기억에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화가는 사인암을 마주 보고 서서 사인암을 뚝 떼어 그린 뒤, 뒤돌아서 사인암 앞의 맑을 물을 그렸다. 바위와 푸른 물길 어울린 정취를 이 한 폭에 전달하기 위함이리라. 

사인암 아래로 조 대감의 유람이 당도했다. 해학이 심했다는 조 대감. 가마 위에 올라 앉아 멋진 산천 들이키고 흥에 잔뜩 취했으니, 그 해학이 툭툭 터져 나왔으리라. 머슴들은 웃다 행여 힘이 빠질까 가마라도 흔들릴까 조심조심 키득키득. 조 대감의 단양유람이 무르익는다.



‘한벽루’에 올라 눕다.



사군(四郡)산수가 묵은 빚이 되어, 

꿈에 본 지 오래 되었더니.

수령 행장이 홀연히 동으로 나서, 

청풍으로 나아가 벼슬을 나왔구나.

한벽루(寒碧樓)에 높이 올라 누운 것은,

가을 여물어 백성 다스릴 일 없기 때문이지.



조 대감이 유람의 입장을 밝힌 시이다. 사군산수란, 단양일대는 네 개 마을이다. ‘단양사군(丹陽四郡)’이라 불렸다. 단양, 청풍, 영춘, 제천을 말한다. 태백산과 소백산 줄기가 이어지는 곳으로 큰 바위와 반석이 즐비하고 강원도 영월에서 강물이 흘러들고 남한강 상류의 너른 물이 흐르니, 수석(水石)이 길고 높은 곳이다. 

청풍댐 건설로 이 일대가 물에 잠기면서, ‘한벽루’는 청풍문화단지로 옮겨 놓았다. ‘금병산(金屛山)’에 그려진 누각이 한벽루다. 오른편 누각에 올라앉아 비스듬히 누울 듯한 포즈의 인물이 조 대감이다.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리고자 단양유람 묵은 뜻을 가을이 늦도록 미루었더니, “물가 난초 산의 국화가 모두 시든 것이 애석하도다”라고 한다. 이들의 유람은 음력 9월, 국화가 모두 시든 늦가을이었다.



‘도담’을 돌아 ‘석문’으로 흘러가다.

또 한 폭을 펼쳐보자. 제목이 ‘도담(島潭)’이다. 조 대감을 태운 배가 물 위 세 봉우리를 슬슬 돌아 난다. 조영경의 단양유람은 여덟 면의 그림으로 그려지고 시문까지 더하여져 화첩(앨범)으로 만들어져 있다. 여기서는 그 가운데 ‘사인암’을 보았고, 한벽루가 그려진 ‘금병산’을 보았고, 이어서 석문이 함께 그려진 ‘도담’을 보고자 한다. 

‘도담’이란 ‘섬이 있는 못’이다. 세 봉우리라서 ‘도담삼봉(島潭三峯)’이다. 모습이 기이하니 이야기도 무성하다. 정도전의 호 삼봉(三峯)이 도담삼봉에서 나왔다는 사연이 전한다. 혹은, 그 모습이 한 지아비에 본처와 첩의 세 사람 같다 하며, 세 개 바위섬의 애증이 드라마로 펼쳐진다. 조영경의 시는 다정하다. “배에는 손님이 세 분이고, 강에는 섬이 세 개로다.”

‘도담’에는 ‘석문(石門)’이 함께 그려져 있다. 이 화면 왼편 상단에 선 돌문이 그것이다. 사인암을 그리듯이 석문 주변의 흙더미와 무성한 초목들은 모두 걷어치우고 개선문이나 독립문처럼 돌문만을 깔끔하게 그려놓았다. 그림 속 석문의 변조에서 화가의 발칙한 용기를 볼 수 있다. 볼 것은 석문이니 석문만을 떼어보자는 방식이다. 게다가 이왕이면 제대로 된 석문으로 그리노라 깎아 만든 양 반듯한 돌문을 그려놓았다. 원래 도담의 물가에 자리한 석문은 수목에 파묻힌 양 두루뭉술 큼지막한 바위구멍이다. 



화가 이방운

그린 이가 누구인가. 문인화가 이방운(李昉運·1761∼1815년 이후)이다. 몰락한 양반의 자제로 그림으로 생계를 꾸린 전문적 화가였다. 그의 그림은 색조가 밝고 붓질이 경쾌하여 옛 그림 같지 않은 화사함이 감돈다. 간혹 보는 이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묘한 독특함이 있다. 이러한 이방운의 발랄한 화풍이 조영경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이방운이 조영경의 단양유람을 그려드린 그림들과 조영경 및 그의 벗들이 더하여준 시문이 합하여져 서화첩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온전한 모습으로 현재 국민대박물관에 전한다. 그 제목은 ‘사군강산삼선수석(四郡江山參僊水石)’이다. 



단양으로 간 선비들 

퇴계선생 이황이 단양을 보고, ‘노닐 만한 곳’이라 한 기행문이 유명하여 조선의 글 읽은 문사라면 모두 이를 읽었다. 선비들의 단양나들이는 퇴계선생이 인정해준 일, 놀아도 좋은 떳떳한 놀이였다.

선비들은 남북을 오갈 때 단양을 거치려고 했다. 다산선생 정약용은 울산 계신 아버님께 문안하고 한양으로 돌아올 때는 길을 바꾸어 단양을 둘러보았다. 과거에 낙방한 선비들이 스스로를 위로하고자 찾는 곳도 한양에서 멀지 않은 단양이었다. 충청도에 고을을 살러 가면 단양유람이 가장 좋은 일이었다. 이 그림 속 조 대감은 청풍부사가 되었으며 농사일 모두 끝난 늦가을을 맞았으니 단풍지는 단양풍취를 구경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단양산천은 의구한데 단양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사연과 방법은 다양하다. 나는 십여 년 전 공부하던 여러 선생님들과 단양을 찾았다. 도담삼봉 선명한 모습이 신기하였는데 쾌속정이 물살을 가르며 굉음으로 달리는 데 놀랬던 기억이 뚜렷하다. 그 여행에 동참했던 한 분은 이방운의 이 그림을 학계에 소개해 주었다. 

조 대감의 가을풍취를 올해 안에 즐기려면 서둘러야 할 것이다. 혹은 이방운의 이 그림을 다시 펼쳐 그 옛날의 가을풍취와 조 대감의 너스레를 상상해 보면 어떨까. ‘나의 자가 안숙(安叔)이라 세상을 편안하게 다스려야 할 터인데, 허허! 내 한 몸만 편안하군. 가마꾼, 뱃사공, 수고시켜 미안하네!’


- 문화일보 2012.11.16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2111601033130025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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