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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ex-media) /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자유

이선영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자유

  

이선영(미술평론가)

  

아이공에서 열리는 김현주(ex-media)의 ‘시적 기계-쉬어가기’(Poetic Machine-Pause) 전에서, ‘시적’이라는 형용사와 ‘기계’라는 명사와의 결합은 부조리함을 자아낸다. 물론 기계와 생명의 경계가 와해되고 철학적으로도 ‘욕망하는 기계’, ‘예술 기계’ 등의 개념--그것은 단순한 반복보다는 창조적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절단의 체계’(들뢰즈)가 강조된 것이다—이 회자되는 즈음, 그 연결이 반드시 부조리하고는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조합의 시적 가능성이 인지된 최초의 미술 사조는 다다나 초현실주의였다. 다다이스트나 초현실주의자에게는 이전 시대의 심미적으로 잘 조율된 예술보다는 부조리한 사물이 더 시적으로 다가왔고, 이 추세는 지금도 이어진다. 그러나 시간은 이미 많이 흘렀다. 그 때가 백여 년 전이고 시간은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 시적/기계에 전제된 생명/비생명 간의 경계 와해는 과정 중에 있다. 아직도 차이는 확연하다. 차이는 충격과 의미를 동시에 낳을 것이다. 



 

Poetic Machine_설치장면





김현주의 ‘시적 기계’는 그자체가 불확정적인 과정인 예술과 알고리즘에 의해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기계를 중첩시킨다. 이러한 중첩이 모순과 갈등을 낳고, 잘 돼 봤자 플러스 마이너스의 합이 제로인 상태를 낳을 것인가. 아니면 기계적인 것과 아닌 것의 상보작용이 더 고양된 상태로 이끌 것인가. 예술은 자유롭지만 무기력하고, 기계는 생산적이지만 지루하다. 예술과 기계 사이에 가능할 수 있는 조합 중에서 최상의 것은 자유로우면서도 생산적인 것이며, 최악의 것은 무기력하면서 지루한 것이다. 오늘날 기계도 자유로우면서 생산적인 경우가 있으며, 예술도 무기력하고 지루한 것이 있다. 스펙터클의 시대에 양자는 소비자/관객의 선택을 놓고 경쟁한다. 예술이 현대적 삶에서의 기계의 위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을 때 한가한 소일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기계가 단순한 반복에 머물 때 기대되는 생산력과 경쟁력은 현저히 떨어질 것이다. 


분명한 것은 기술이든 예술이든 진정한 새로움과 진보는 흔치 않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쉬어가야 그 기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다는 점이다. 소위 말하는 ‘허리 세대’에 속한, 생활인이자 예술가로서 피로감에 지친 김현주의의 문제의식이 여기에 있다. 과열된 기계는 오작동을 일으킨다. 최근의 의학적 연구에 의하면, 피로한 동물은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치명적인 판단을 내린다고 한다. 김현주의 기계는 자기 일을 대신해 줄법한 그러한 기능(의미)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 그자체가 의미인 시를 지향한다. 아이공의 지하 공간 한 켠의 알루미늄 구조물은 그 실체가 모호하다. 서있는 것인지 앉아있는 것이지 알 수 없는 자세의 반짝이는 기계는 어둡고 낮은 천정 아래에서 기이한 존재감을 가진다. 기계는 거울처럼 주변의 빛을 반사하면서 물리적 무게감을 줄이기도 하지만, 영상이 흘러나오는 어둑한 공간 뒤편에 드리워진 큰 그림자는 그것이 가상이 아닌 실재임을 증거한다. 








김현주가 이름에도 붙이고 다니는 확장된 매체(expanded media)란 영상과 그 이외의 것과의 관계를 염두에 둔다. 화려한 스펙터클과 밋밋한 표면을 가진 인터페이스의 시대, 영상과 영상 아닌 것으로 세상을 분류해도 크게 무리는 가지 않으리라. 바닥에 놓인 기계는 벽면의 영상을 반사하고, 교란시킨다. 좌우로 심하게 흔들리는 영상 자체가 교란적이다. 거기에는 쉬기 위해 강과 물을 찾았을 때 걸어갔던 리듬이나 카메라를 장난감처럼 이리저리 흔들고 놀았던 흔적이 있다. 로봇처럼 생긴 기계는 간혹 조금씩 움직이지만 관객은 영상과의 인과관계를 상상하게 된다. 로봇 팔들의 작은 움직임이 영상을 휘졌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뭔가 생산해야 하는 기계는 강이나 숲 등 휴식의 이미지로 다가오는 장소들이 담긴 영상과 만나면서 시적 의미를 발생시킨다. 기계는 하던 일이 무엇이든 이제 속도를 늦추고 때로 멈춘다. 이 때 기계와 인간과의 비유는 강력하다. 기계는 인간의 노동을 줄이려고 발명된 것이지만 관계는 역전됐다. 기계 및 기계를 돌리는 자본의 리듬이 인간의 리듬을 앞서 나간다. 


기계와 인간이 어느 때보다도 가까워진 현재, 이제 기계가 쉬어야 인간도 쉴 수 있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바쁨에 시달리는 인간에게는 쉼 그자체가 시이고 예술인 것이다. AI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미래 시대의 어느 날, 인간은 수 천 년 간의 기계적 노동으로부터 면제받고, 온 사회의 구성원이 로봇으로부터 나온 세금으로 기본소득을 받으며 예술이나 놀이 등 문화적 활동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또한 분배정의가 실현되어야 하는 문제이니, 최소한 그 과도기에 놓인 시대의 사람들에겐 할 일이 많다. 기계는 단순히 기계가 아니라 자본처럼 그 기계를 소유한 자의 것이고, 역사를 볼 때 다수를 억압하는 소수의 기득권이 ‘자연스럽게’ 사라진 경우는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정보화된 빛의 무리가 흘러가는 작은 공간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기계는 여러 개의 손이 있고, 그것이 때로 움직여서 언뜻 곤충처럼도 보이지만, 어떤 대상을 흉내 낸 것은 아니다. 작가는 그것이 그냥 기계로 보여지 길 바랬다. 그것은 기능적 단위가 연동되어 움직이는 기계의 상징인 것이다. 








그렇지만 누군가 입력한 코드대로 움직이고 있는 이 기계는 ‘로봇’이라는 단어 자체가 ‘일하다’에서 온 것임을 잊지 않게 한다. 수많은 팔은 바쁨을 상징할 터인데, 그렇게 생긴 만큼 많이 움직이지는 않는다. 특히 그 동작은 무엇을 위한 것이지 불확실하다. 관객의 다가감에도 소심하게 반응하며 팔/발을 조금씩 까닥거릴 뿐이다. 가운데가 푹 파여 있으며 중력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아무런 기능이 없는 행위를 반복하는 기계는  생산적(건설적)인 것과는 비교된다. 사선이지만 속도감과는 무관한  다리들은 수직과 수평의 중간에 어중간하게 걸쳐있다. 2분에 한 번 씩, 그래서 잊을만하면 움직이는 동작은 주의 깊지 않은 관객에게는 제대로 포착되지 않을 것이다. 기계는 대부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작가의 표현으로는 ‘가끔 숨 쉬듯 꿈쩍거리는’ 정도이다. 관객이 가까이 가면 상호작용하는데, 그것도 마치 ‘지렁이가 꿈틀하는 듯한’ 반응이다. 


타워크레인처럼 대지 위에 우뚝 서서 어떤 목적을 위해 뺑뺑 돌아가는 건설적인 기계의 움직임과 비교해 본다면, 그것은 ‘뭔가 해보려다가 축 쳐지는’ 맥 빠진 동작을 연상시킨다. 여기에 휴식의 장소와 관련된 이미지가 쏟아진다. 간혹 영상이 꺼지는 순간 조명이 꺼진 무대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기는 하지만, 영상은 기계의 간헐적인 움직임에 활력을 부여한다. 휴식은 죽음과도 같은 정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5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진, 15분 분량의 영상에는 자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도시의 야경도 있다. 자연도 원초적 자연이라 할 만 한 곳이 아니라, 작가가 사는 동네의 뒷산이다. 멋진 자연을 찾아다니는 것도 커다란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기에 근린 자연은 휴식의 적절한 장소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작업실이 있는 한강 근교의 풍경에서 뒤편의 고층 건물보다는 흐르는 강물의 비중이 크다. 작가는 저녁이나 밤 시간대에서 휴식을 본다. 노동의 주기가 다른 사람은 저녁이나 밤이 휴식으로 다가 오지 않을 것이다. 






Poetic Machine_part2_black water



인류가 전기를 통해서 밤의 어둠을 정복한지는 그다지 오래되지 않기 때문에 보다 오래된 인류의 상상계에서 밤은 휴식의 의미를 가진다. 밤과 휴식, 그리고 휴식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려준 문학가는 장 그르니에이다. 그는 [일상적인 삶]에서 ‘나는 우리들을 자신에게 중요하지 않은 모든 것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으로서의 자정을 사랑하며, 우리에게 자신을 정오에 실현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제공하는 것으로서의 자정을 사랑한다’고 말한 바 있다. 밤이 휴식이라면 낮은 노동이다.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낮은 태양과 함께 떠오르고 태양과 함께 끝을 맺는다. 낮을 지칠 줄 모르는 것, 근면한 것, 창조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바로 이것이 낮을 낮의 끊임없는 일로 만드는 것이다. 낮은 자기 자신의 정복이며, 노동이다. 낮은 그 임무들을 성취함에 있어 한발자국 한발자국씩 밖에는 전진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러한 부산한 낮의 패러다임은 밤까지 넘본다. 24시간 영업이라고 붙여진 가게들은 하나둘 늘어만 가는 것이다.


장 그르니에는 곧 ‘우리들의 문명이 가진 특징 중의 하나는 빛의 증가현상이다’라고 하면서 진정한 밤/휴식의 사라짐을 예견한다. 시적 인간에게 밤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는 태양 아래서 우리의 자리를 선택할 수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밤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리를 창조해 낼 수 있기’(장 그르니에) 때문이다. 밤은 낮과 달리 통합적이다. 김현주의 작품에서 통합의 이미지는 블랙이 담당한다. 작품의 시간대인 밤은 모든 것을 검게 할 것이다. 동시에 검정을 뚫고 나온 빛을 더욱 강조할 것이다. 강과 숲은 그 위에 드리워 있는 하늘보다도 더 검다. 모든 색이 합쳐지면 나오는 색인 검정은 그자체가 통합적이다. 검정과 연관된 밤 또한 도구적 이성이 갈라놓은 것들을 통일시킬 수 있다. 문예사조사에서 그러한 밤의 힘을 깊이 깨달은 첫 세대는 낭만주의라고 할 수 있다. 김현주의 작품에서 숲의 저녁 공기나 밤의 강물은 묵직하다. 작가는 영상에다 검은 물, 검은 숲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Poetic Machine_part2_black water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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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검은 우주에는 휴식 없는 삶에 대한 멜랑콜리가 발견된다. 휴식의 부재는 죽음이라는 영원한 휴식에 다가가게 할 것이다. 김현주의 영상 속 밤에서 빛은 유희적으로 해체된다. 전시공간을 사방팔방으로 훑어 내리는 어지러운 패턴은 그것만 볼 때 무엇을 비추기 위한 빛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반면 소리는 그다지 변형되지 않았다. 그것은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잘 안 들리지만, 작가가 일부러 소리를 줄인 것이 아니라 원래 음향이 작다. 그것은 자연과 일상적 삶에서 나오는 작은 소리들이다. 시각과 달리 원래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그자체가 해체적이며, 따로 그것을 분산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영상 속 밤풍경들에는 자연 및 사람 사는 소리들이 작게 들려온다. 바람 부는 날, 여름과 가을에 찍은 영상에는 벌레소리, 새소리, 아이들 노는 소리 등이다. 그것들은 귀에 거슬리는 소음이기보다는 내가 세상에 속해있다는 증거이다. 완전한 정적은 극히 예외적인 상황이기에 오히려 휴식을 방해할지도 모른다. 


야경은 기계라는 인공물을 돋보이게 한다. 인공광원이 없을 때 자연은 그 존재감이 희미해진다. 한강둔치를 찍은 영상에서 카메라에 포착된 인공 광원은 물을 사물화 한다. 그 자체만 보면 결코 물을 연상시킬 수 없는 강렬한 빛의 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것은 어지러움을 낳는데, 어지러움은 놀이기구에서 체험되듯 어느 정도 까지는 즐거움을 낳는다. 인간의 놀이를 연구한 인류학자 로제 카이와가 [놀이와 인간]가 유형화한 놀이의 네 가지 방식 중에서 일링크스(Ilinx)--그 밖에 흉내 놀이인 미미크리(Mimicry), 경쟁 놀이인 아곤(Agon), 우연놀이인 알레아(Alea)가 있다—에 해당한다. 석유처럼 걸쭉한 검은색 액체처럼 보이는 매질 위에서 어지럽게 춤추는 빛의 띠들은 몰입의 끝이 결국은 죽음일 수도 있음을 예시한다. 대양이나 모체의 양수처럼 비롯된 곳으로의 회귀는 죽음 아닌가. 정도를 넘어선 놀이는 정도를 넘어선 노동만큼이나 치명적이다. 그러나 인간은 삶의 끄트머리까지 이어져있는 열락에 유혹되기를 거부하지 않는다. 




Poetic Machine_part2_black wood1



Poetic Machine_part2_black wood2



근처 아파트 불빛 등 인공광원이 비춰진 물은 검은 바탕에 그려진 선들처럼 자유롭게 움직인다. 일렁거리는 물은 반복되지 않는 무늬처럼 흘러간다. 숲 또한 주변의 광원을 흩어트린다. 영상은 주변의 풍경을 찍은 것이지만 추상적 패턴이 된다. 그것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서사의 한 대목이 아니라, 전경의 사물과 결합해서 사건을 만들어야 하는 과도적인 순간들이다. 무엇과 무엇이 결합하려면 결합될 것들은 변형이 일어나야 한다. 각자 완전한 것, 자족적인 것은 다른 것과 결합의 필요를 못 느낀다. 가령 김현주의 작품을 이루는 영상과 기계는 각각 멋진 장면을 촬영한 사진 또는 영상이나 기계문명을 상징하는 대상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기계의 경우 작가는 표면을 재료 그자체로 남겨둠으로서 자체의 형태나 행위를 약화시켰다. 이러한 형식은 비어있어야 채워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자체의 중력을 잃고 무늬화 되어 공간을 떠도는 풍경은 전시장을 사건의 장으로 만든다.  기계의 미소한 움직임은 영상과 결합하여 나비효과를 발휘하고 강력한 시적 메시지로 거듭난다.  

  

출전; 아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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