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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윤정 / 모든 것이 나오고 돌아가는 흙

이선영

모든 것이 나오고 돌아가는 흙

   

이선영(미술평론가)

    

송윤정의 [막연한 감정] 시리즈는 둥근 좌대를 원형의 무대로 삼은 변신의 장이다. 나무에서 동물이나 사람이 돋아난다. 인간의 뒤통수는 새이며, 얼굴 옆도 바닥에도 무엇인가로 현실화될 잠재적 돌기들이 자란다. 여러 요소들이 뭉뚱그려진 애매한 형태들은 무엇이 될지 확정돼 있지 않다. 물론 그 역도 사실이어서 현실적인 것은 잠재적인 것으로 변할 것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진화나 퇴화 등으로 구별하겠지만, 공간 감각만큼이나 시간 감각 또한 다양한 세계에서 그러한 구별은 무의미하다. 성과 나이, 인종을 특정 지을 수 없는 사람의 형상에는 풀이 그려져 있다. 이 작품 뿐 아니라 이 전시에서 인간이 등장하는 어떠한 도상에서도 풀은 빠지지 않는다. 작품 [익숙하면서도 낯선]에서는 평행한 세 줄의 홈 그 위에 끼워진 평평한 판들에 여러 종류의 풀이 그려져 있는데, 그 앞의 거울에 비친 상에는 인물이 보인다. 풀과 인간은 표면과 그 이면의 관계이다. 




[막연한 감정 1]



[막연한 감정 2]



송윤정의 작품에서 식물과 인간은 서로를 거울처럼 비춘다. 작품 [막연한 감정]에서 둥근 좌대에 앉은 사람의 발 한 쪽은 가지, 또는 뿌리로 변하는 중이다. 뒤의 나무통에서 나온듯한 동물은 고양이를 많이 닮았지만, 작품 속 인간만큼이나 특정하기 힘들다. 그것들은 종적 명확성을 가지기 보다는 사람일반, 동물일반, 식물일반을 나타내며, 그마저도 수시로 경계를 허문다. 사람의 경우, 여성은 남성이 될 수도 있고, 어른은 아이가 될 수도 있고, 동양인은 서양인이 될 수도 있고, 현대인은 원시인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가히 혼돈의 우주이다. 그러나 송윤정이 주목하는 것은 잠재적 상태이지 현실적 상태가 아니다. 씨앗이나 배아처럼 잠재성은 그 무엇으로도 현실화될 수 있다. 그리고 예술은 그러한 잠재성의 유력한 영역이다. 제목에서 유추해 보건대, 작가는 인간의 감정도 그렇게 이해한다. 


사랑과 미움, 쾌락과 고통, 매혹과 혐오, 희망과 절망, 익숙함과 낯섦 등, 크게 보면 삶과 죽음으로 대표될 수 있는 두 계열은 수시로 자리를 바꾸는 같은 뿌리를 가지는 감정이다. 같은 뿌리를 가졌기에 그것들은 그렇게 강력한지도 모른다. 이성 또한 그러한 감정과 단절되어 있지 않다. [막연한 감정] 시리즈에서 인간과 식물은 일체화된다. 나무에서 인간이 자라 나오고, 인간에게는 풀 이미지가 있다. 식물은 대지에 뿌리를 내리는 존재라는 점에서, 오랜 세월 타국에서 생활하고 작업하는 작가에게 어머니의 땅(母國)에 대한 그리움이 깔려있다. 그러나 송윤정의 작품에서 나무는 깊이 뿌리 내리는 견고한 존재이기 보다는 변신하는 측면이 강조된다. 우주목(宇宙木)의 이미지에서 명확하듯, 나무는 세계의 중심이며 지하와 지상과 하늘을 잇는 기념비적인 존재라는 점이 수많은 민족의 신화에서 보편적으로 확인된다. 그와 동시에 나무는 다른 존재로의 변화무쌍한 호환성을 가진다. 변이하는 존재, 특히 예측할 수 없는 접속에 의해 변화하는 존재는 수직적 뿌리보다는 수평적 뿌리줄기를 요구한다. 




[어떤 위로 1,2,3]



어디든 깊이 뿌리 내릴 수 없는 현대는 후자의 측면, 가령 나무가 뿌리라면 풀 같은 뿌리줄기의 측면이 공감을 얻는다. 나무의 견고한 체계성과 변화무쌍한 뿌리줄기의 이미지는 상호보완적이다. 가령 우주목같은 중심의 이미지에도 변신은 내재해 있다. 우주목과 함께하는 캐릭터인 ‘샤먼은 나무라는 통로를 통해 삼계(三界)를 넘나들며’(미르치아 엘리아데), 지상에만 묶여있는 존재들에게 또 다른 비전을 제시한다. 샤먼은 초월적인 존재이기 보다는 다른 이들보다 먼저 병을 앓았던, 또는 더 심하게 앓았던 사람이다. 또한 샤먼과 함께 했던 수상한 식물들은 치유나 환각 상태 등, 존재의 변신에 도움을 준다. 샤먼은 이런저런 수단을 통해 서로 구별되는 세계를 이어주는 매개자였다는 점에서 예술가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송윤정의 작품에서 인간은 풀을 닮았지만, 나무 그리고 사람과 함께 나무에서 돋아나는 네발짐승과의 교감도 분명하다. 작품 속 동물은 사람보다 작지 않으며 사람과 동렬에 놓이거나 심지어는 우위에 있다. 


또한 작품 속 특이한 시공간의 좌표 또한 전방을 주시하는 전형적인 인간적 시점에 한정되지 않는다. 가령 그것들은 매끈한 도예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풀이나 털같은 촉감적 요소가 강조된다. 드로잉의 경우에는 누런색 장판지를 사용하여 특유의 촉감과 냄새까지 자극한다. 작품 [어떤 위로 1,2,3]에서 풀로 덮인 사람과 털로 덮인 동물이 여러 자세로 결합한다. 냉정한 세상에 놀라서 잔뜩 웅크린 사람과 동물은 함께 한다. 사람이 주체도 동물이 객체인 것이 아니라, 주체 내부에 있는 타자와 동물이라는 타자와의 만남이다. 상상 또한 이질적인 것들이 끝없이 접 붙는 과정이다. 옛 장판지 위에 간략한 선과 면으로 표현된 남자와 여자의 머리가 있는 [적당한 거리감] 시리즈는 비슷한 계열이기는 하지만, 결코 한 유기체에 속한다고 볼 수 없는 식물적 형상들이 아슬아슬한 끝말잇기처럼 연결된다. 남자머리의 실루엣에서는 풀이 돋아나고 또 그 위에 새가 앉아있다. 여자머리 실루엣은 ‘적당한 거리감’을 가지고 이질적인 것들이 연이어 피어나는 식물적 존재를 바라본다. 글을 쓰다가 그것이 드로잉이 되고, 다시 도예 작품이 되는 연결망 또한 미세한 차이를 가지는 영역들 간의 전이이다. 




[적당한 거리감]



그 무엇으로 변화하든 막힘없이 이어지는 과정이 중요하다. 작가는 순환을 강조하기 위해 굽지 않은 흙으로 만들어 깨서 다시 만드는 식의 작업을 하기도 했다. 도자의 기본재료인 흙은 송윤정의 작업에 많이 등장하는 식물 이미지와 어울린다. 그러나 완전한 야생은 아니다. 작품 속 식물은 원초적인 숲보다는 정원술이나 원예술과 관련될 것이다. 좀 더 확고하게 생산적인 차원으로 나아간다면 농사와도 연결될 것이다. 그러나 송윤정의 작업은 씨를 뿌리거나 심었으되 그 결과를 확정할 수 없는 소규모 농법을 떠올린다. 이러한 농법에서 자연계에서 흔치 않은 돌연한 변이는 환영할만하다. 자유로운 흐름을 단절하게 하는 모든 닫힌 체계를 거부했던 철학자인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농업이 서양이라면 원예는 동양’이라고 비교 한 바 있다. 그러면서 ‘유럽인은 리좀이나 풀을 잃어버렸다’고 하면서 비판한다. 그들은 ‘진화의 도식은 덜 분화된 것에서 더 분화된 것으로 나아가는 나무 모양의 혈통 모델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질적인 것 안에서 즉각 작동하며’, ‘다른 선 위로 도약하는 리좀을 따라갈 것’이라고 말한다.  


[천개의 고원]은 ‘식물들의 지혜’, 즉 식물들은 뿌리를 갖고 있을지라도 언제나 어떤 바깥을 가지며, 거기에서 식물들은 항상 다른 어떤 것, 예컨대 바람, 동물, 사람과 더불어 리좀 관계를 이룬다는 점을 강조한다. 송윤정의 작품에서 마음껏 주물러 다른 형태를 만들 수 있는 흙은 이질적인 것들과의 연계를 유기적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모든 것은 흙으로 돌아가니 흙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도예는 이러한 자명한 이치를 작품의 내적 원리와 통합시킬 수 있는 매체적 특성을 가졌다. 송윤정의 경우에는 만들기보다는 그리기, 그리기 보다는 쓰기가 선행 된다. 이 생각 저 생각을 옮겨 놓은 글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선이 되고, 그 선이 입체화되는 과정은 리좀적이다. 작품 속 풀의 이미지는 선적 이미지를 대표한다. 작품에는 나무도 등장하지만, 그것의 속성은 풀이다. 멀리서 보면 산등성이나 대지 위의 나무들도 풀처럼 보인다. 땅이 몸통이라면 나무는 털이다. 식물과 같이 등장하는 동물들의 몸체에 가득한 것도 털/풀이다. 




[적당한 거리감]



그것은 정확한 점에서 점으로 이어지는 재현적인 선이 아니라, 무엇이 될지 모를 생성(되기)의 선이다. 나무조차도 풀같은 존재태를 가지는 작품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초월적인 원리로서의 질서는 해체된다. 심리적인 과정 또한 리좀적이다. [천개의 고원]에 의하면, 사유는 결코 나무 형태가 아니며, 뇌는 결코 뿌리 내리거나 가지를 뻗고 있는 물질이 아니다. 뇌는 나무라기보다는 풀이다. 나무(뿌리)보다 풀(뿌리줄기)를 지향하는 [천개의 고원]의 저자들은 나무 같은 긴 기억이 아니라 풀 같은 짧은 기억을 중시한다. 그들에 의하면 긴 기억은 나무 유형이며 중심화 되어 있다. 우리가 비록 긴 개념들로 이루어진 긴 기억을 가지고서 읽는다 할지라도 쓸 때는 짧은 기억을 가지고서, 따라서 짧은 관념들을 가지고서 쓴다고 본다. 재현보다 생성을 중시하는 이들에게 긴 기억(가족, 인종, 사회, 또는 문명)은 질곡으로 다가온다. 송윤정의 작품에서 고향에 대한 기억과 지향이 있다면, 그보다 더 큰 것은 망각과 도피일 것이다. 정주가 아닌 유목일 것이다. 


하나가 아닌 여러개의 출입구가 있는 송윤정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건립되고 파산하는 모델, 끊임없이 확장되고 파괴되고 재건되는 과정’(들뢰즈와 가타리)이다. 과정 중에 있는 형식은 ‘과정 중에 있는 주체’(줄리아 크리스테바)를 전제한다. 엄연히 주체에 선재하는 견고한 상징적 구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정 중에 있다함은 미성숙함, 또는 과도함을 의미한다. 상징적 구조를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또는 이질적인 언어를 말하는 예술은 아이 같음이나 광기와 연결되곤 한다. 송윤정의 작품에 편재하는 것은, 스스로도 의식하듯, 아이같은 언어이며, 광기에 해당하는 것은 묵직한 죽음의 그림자가 서려 있는 우울함이다. 또한 한국의 민간토속 신앙에 대한 관심도 그에 속한다. 토속신앙에서 자연과 정신은 연결되어 있다. 예술의 언어가 유치함이나 광기의 언어와 하나인 것은 아니다. 단지 강력하게 연동되어 있을 뿐이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익숙하면서도 낯선](부분)



광기가 ‘그 자신에게만 속하는 질서’(미셀 푸코)라면, 예술은 그 자신에게만 속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진정한 예술이 아니다. 예술이 소통하기 힘들다는 것은 기우이다. 예술은 더 효과적으로 소통한다. 예술은 지배적인 언어와 상호작용하면서 다른 것을 말한다. 이때 무의식의 처소인 몸은 중요하다. 뤼스 이리가라이는 [근원적 열정]에서 지배적인 상징적 질서와 길항 작용에 있는 여성적 상상력에 주목한다. 뤼스 이리가라이에 따르면, 소년은 자신을 남근적 권력과 동일시함으로서, 상상의 단계에서 해방되어 상징적 질서로 진입하지만, 소녀는 상징적 질서와 동일시할 수 없어 언어 없이 타자로 추방당하고 상상의 단계에 머문다. 송윤정의 작품에서 타자적 요소는 동식물을 포함한 자연에서 두드러진다. 환상성은 상상계와 상징계와 명확히 구분 짓지 않은 결과이다. 그것은 타자, 즉 이방인의 언어이다. 


이방인의 언어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동시에 이것도 저것도 이다. 그것은 명료하지 않지만 포괄적이다. 외연이 넓지는 않지만 내포적이다. 송윤정은 이번 전시의 부제를 ‘마주침과 그 흔적의 재발견’이라고 했다. 그것은 자신의 작품 속에 있는 우연의 몫을 강조한다. 작품은 자신에서 비롯된 것이면서도 거듭되는 해석의 대상이 되며, 추후에 만나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열린 예술의 특징이다. 물론 이러한 열림에는 자유로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마주침은 그것이 피할 수 없을 때 구속적이다. 그러나 예술은 이러한 불가피함을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함으로서 필연성을 가진다. 질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프루스트는 방법이라는 철학적 이념에 강요와 우연이라는 이중적 이념을 대립시킨다고 말한다. 진리는 어떤 사물과의 마주침에 의존하는데, 이 마주침은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고 참된 것을 찾도록 강요한다. 그것은 우연한 것이며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송윤정의 작품은 짧지 않은 세월을 살면서 맞딱뜨린 필연적 우연에 대한 잠정적 대답들로 이루어졌다. 

  

출전; 클래이아크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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