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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연 / 여성과 자연의 이질적 만남

이선영

여성과 자연의 이질적 만남

  

이선영(미술평론가)

  

필자가 처음 본 김주연의 작품은 2000년대 초반 오랜 독일 생활을 마치고 귀국해서 처음 선보인 전시로, 당시 인사동에 있었던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의 야생적인 공간에서 축축한 생명의 기운을 실시간으로 내뿜고 있었다. 하얀 드레스에 심어진 씨앗들이 자라는 현장 설치 미술은 고대와 현대적 감각을 횡단하면서 미술계의 호평을 이끌어냈고, 이후 대형 설치작업 위주로 간간이 진행해온 전시들 또한 식물을 발아시키는 과정에 대한 다양한 변주였다. 그 간의 전시에서는 옷 이외에 신문지, 책 등 매개체가 되었고, 그 규모는 식물이 자라는 대지의 일부를 뚝 떼어놓은 듯 거대하기 일쑤였다. 10년 전에 봤던 [Metamorphosis] 전이 대표적이다. 여성주의와 관련된 이번 전시의 출품작들은 옷 위에 씨앗을 심는 과정은 여전했지만,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작품 제목에 걸맞게 이전의 묵직한 중량감을 덜어냈다. 옷 여기저기에서 자라는 싹들은 녹색 식물 특유의 빛을 향한 움직임으로 옷/몸을 들어 올리는 듯 하다.  




존재의 가벼움XII 사진, 피그먼트프린트 2018



존재의 가벼움XIII 사진, 피그먼트프린트 2018



존재의 가벼움IX 사진, 피그먼트프린트 2017



사진과 설치작품에 등장하는 것은 평상복이다. 2002년 한국에서의 첫 전시에 나왔던 하얀 드레스가 고대의 여신상이 부활한 듯한 기이한 느낌이었다면, 평상복 위의 식물은 보다 교묘하다. 그것은 ‘자연도 재발명’(다나 해러웨이) 되는 생명공학의 시대를 반영한다. 이전 작품에서 하얀 드레스에서 자라나는 씨앗들의 복합체는 대지의 열매를 관장하는 풍요의 여신 데메테르도 연상시켰다. 김주연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인 씨앗은 곡물에 의존해 살아가는 인간에게 풍요를 안겨준 중요한 요소이다. 자크 브로스는 [식물의 역사와 신화]에서 속씨식물의 시대가 포유류의 시대와 일치하는 것은 포유류가 열매, 특히 곡물에 의존해서 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자크 브로스에 의하면 곡물의 지배는 훗날 또 다른 종, 즉 인간의 폭발적 증가를 낳게 된다. 김주연의 작품은 자연-생명-여성-풍요의 복합체를 떠오르게 하며, 이후 식물이 등장하는 작품들은 생태여성주의(Ecofeminism)의 한 자락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에코 페미니즘은 인간/자연, 주체/객체, 남/녀, 서양/동양의 구별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이원론을 거부하는 전일론적(holistic) 사고이다. 전일론적 사고를 종교나 자연이 아닌 사회로 전환시키면 여성을 비롯해 타자화 되었던 부류들 또한 중요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에코 페미니즘은 1970년대에 나온 사상이긴 하지만, 환경문제가 더욱 악화되고 있는 지금 그 시효가 따로 있을 수는 없다. 에코 페미니즘은 ‘뉴 에이지’ 문화처럼 모든 모순을 두리뭉실하게 화해시킨 그저 편안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특히 자연과 여성의 연결망과 관련된 논쟁거리를 낳는다. 이원론적 사상은 수없이 비판되긴 했지만, 사라지지 않고 형태만 바꿔가며 지속되는 형국에서 여성을 자연으로 간주한다함은 문제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자연의 본질처럼 여성만의 본질이 있다는 사유 또한 마찬가지 함정에 빠진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중심주의가 상상하듯이 완전히 정복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미지의 실재로 남아있다. 




(참고) 이숙異熟, 천, 씨앗, 세수대야7개, 의상의 길이 350cm



(참고) 이숙異熟, 천, 씨앗, 세수대야7개, 의상의 길이 350cm



그게 아니라면 인간은 벌써 생명의 생로병사의 비밀을 다 파악하고 신적인 존재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근대적 자연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제기될 때마다 등장하는 대안의 개념들에는 또 다른 의미의 자연이 깔려있다. 가령 무의식, 현실계, 실재계, 코라(또는 세미오틱 코라)같은 일련의 가족 유사성을 가지는 개념들이 그것이다. 이에 바탕 하여 ‘여성적 글쓰기’(엘렌 씩수)가 고무되기도 했다. 여기에서 여성은 의식되어야 할 뿐 아니라, 무의식의 자원까지 길어 올려 져야 한다. 무의식의 거처는 몸—다른 하나는 언어--이다. 김주연의 작품에서 생명은 몸, 특히 여성의 몸에서 자라는 듯하다. 작가는 굳이 남성 여성 옷을 따로 구분하지는 않지만, 여성의 옷이 더 적당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싹이 자라서 부피가 커지면 아담한 크기의 여성 옷이 더 예쁘기 때문이지만, 김주연의 작품에서 옷/몸의 동일성에 비추어볼 때 타자를 받아들이고 품고 자라게 할 여지가 있는 여성적 몸의 적절함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작품을 비롯한 최근작들은 여성-자연의 동일성이 일면적일 수 있음을 알려준다. 요즘 작품은 대지로부터 떨어져 있다. 이전 작품들처럼 지상 위에 켜켜이 세워 놓은 것이 아니라 중력에 거슬러 공중에 메달아 놓은 점, 그 주변에 사진작품들이 함께 한다는 점이 가벼움의 느낌을 더한다. 전시기간 동안 식물을 자라게 하는데 필요한 부대 설치물들도 눈에 띄지 않는다. 물 이외에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생육과정은 면이나 모같은 천연 재료의 옷 뿐 아니라, 아크릴같은 인공 재료의 옷에서도 가능하다. 씨앗이 발아되고 있는 부위의 보슬보슬한 느낌이 옷의 다양한 색과 디자인과 어우러진다. 옷의 전체 또는 다양한 부분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의 싹들은 옷을 이루는 섬유의 일부 인 양 장식적인 효과를 자아낸다. 발아하는 식물의 복슬복슬한 질감은 포근해 보인다. 그러나 옷 위에 다른 무엇이 자라나고 있는 작품들은 물리적으로 무겁다. 더구나 식물이라서 따스하지도 않다. 




(참고) Metamorphosis III 신문 약 20,000부, 씨앗, 비계구조물 380cm(h)x170cm(l)x250cm(w) 2009



(참고) MetamorphosisVII 옷, 나무파렛트, 씨앗 2013



(참고) 도서관  책, 책장, 씨앗 360cm(h)x200cm(l)x200cm(w) 2009



(참고) 도서관 책, 책장, 씨앗 360cm(h)x200cm(l)x200cm(w) 2009



옷에 심겨진 씨앗들이 모두 힘차게 자라는 것은 아니다. 살기도하고 죽기도 하는 과정중의 생명들은 보기에 따라서는 징그러울 수도 있다. 삶과 죽음의 다툼이 일어나는 생명의 과정은 아무리 산뜻한 세팅을 거쳤다고 해도 수그러들지 않는다. 김주연의 작품에서 옷은 몸의 속성을 띈다고 할 때, 싹들은 몸에서 자라나는 무엇을 은유한다. 신체라면 털, 마음이라면 욕망 같은 것이 그것이다. 신문 수천, 수만 부에다가 씨앗을 심은 [Metamorphosis] 시리즈나 [이숙(異熟)] 시리즈는 껍데기를 찢고 나와 수많은 국면을 거치는 생명의 성장과 소멸의 과정에 대한 탐색으로, 예쁜 꽃밭이나 푸른 낙원을 연출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즉 그것은 생명찬가, 자연의 아름다움, 여성 또는 모성의 풍요로움 등등의 판에 박힌 표현을 넘쳐나는 무엇이 있다. 한마디로 보기와는 다른 점이 김주연의 작품의 특징이다. 그녀의 작품은 단순해 보이는 외관에 비해 내포적 다양성을 가진다. 


작가가 1980년대 중반부터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온 동양의 사상에서 발견한 이숙(異熟)은 전시를 통해 압축적으로 재현한 생명의 과정에 내재한 이질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개체의 발생이나 계통의 발생에 공히 적용되는 생명의 과정과 관련된다. 그것은 가장 일반적인 사고인 진화론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브루스 매즐리시는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에서 환경과 유전자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는 진화 ‘evolution’은 원래 씨앗(배)에 성체가 미리 형성되어 있다는 17세기의 이론을 가리키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진화는 씨앗 속에 이미 있던 것이 펼쳐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 의하면 18 세기에 들어와서는 배가 하등의 종을 재현한다는 생각이 나타났고, 진화는 종의 변화(alteration)라는 뜻이 되었다. 배는 진화과정에서 거쳐 온 종들의 모든 형태를 거치게 된다는 생각이다. 브루스 매즐리시에 의하면 형질전환(transformation)이나 변이(transmutation)와 같은 개념 또한 배의 변화와 종의 변화와 관련된다. 




(참고) MetamorphosisV 나무파렛트, 부직포, 씨앗 가변설치 2012



(참고) 이숙異熟 씨앗, 신문7000부, 나무파레트 2015



개체발생에 계통발생이 반복된다는 사고는 생명의 발생과 발현의 과정에 내재한 이질성을 강조한다. 정상 속에 이상이 있고, 동일자 속에 타자가 있는 것이다. 관객은 식물에 주목하기 마련이지만, 식물이 자라는 매체가 되는 재료들은 식물과 더불어 메시지를 전달한다. 가령 김주연의 작품에서 ‘문자적 선형성’(마샬 맥루한)에 기반 하는 인쇄 매체인 신문이나 책들은 흙으로 되돌아간다. 그것은 무엇인가 자라게 하는 토양, 또는 양분으로 제시된다. 이제 올드 미디어의 대열에 속하게 된 종이매체들은 새로운 생태계에서 다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섬유들의 망으로 이루어진 옷에 바탕 하여 자라는 식물은 시시각각 변하는 디지털 네트워크를 떠올리며, 현대적인 맥락으로도 해석된다. 이번 전시에서 옷이라는 대상에서 자라나는 생명들은 대지 또는 대지의 비유를 가졌던 매체와 단절 된 채, 씨앗들은 섬유 올에 아슬아슬하게 붙어서 자라는 중이다. 


작가는 [존재의 가벼움] 시리즈를 6미터 높이의 공간에 약간 올려다 볼 정도로 걸어 놓았다. 또한 벽 위에 걸린 사진 속 작품들 또한 실제라는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이미지들로 재 맥락화 된다. 그것은 수천부의 신문이나 책이 동원되고 그것을 지탱해 주는 준 건축적 구조가 필요했던 이전 작품과 달리 자리로부터 자유롭다. 이제 인간이든 식물이든 한군데에 깊이 뿌리 내리지 않으며 순간적으로 관계를 맺을 뿐이다. 그것은 현재 대세가 되고 있는 디지털 생태계가 역사상의 그 어느 시대보다도 자연으로부터 멀어진 상황을 반영한다. 그런 주제를 가지는 동시대 다른 작품들과의 차이는 가벼움으로 느끼게 해줄 균형추인 실재의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김주연의 작품에서 성장하는 그리고 살아있는, 또는 스러져가는 생명은 섬세하면서도 두툼한 실재감을 제공한다. 생명이 자라나고 스러지는 표면은 자연의 심연으로 이끈다.




(참고) 이숙II 천, 양파, 작업의 길이 270, 300cm



(참고)  이숙II



(참고) 존재의 가벼움I  사진, 피그먼트 프린트, 108x144cm 2014



(참고) 존재의 가벼움 VIII 사진, 피그먼트프린트 108x144cm 2016



작가는 2011년 겨울 남극에서 체험한 자연의 숭고함에 대해 말한다. 남극에서 만난, 인간의 흔적을 찾기 힘든 원초적 자연은 우주 속의 지구를 생각하게 했다. 작가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억겁의 시공간 속에서 느낀 인간의 왜소함, 그리고 그러한 극한의 조건 속에서도 1년에 0.1cm 씩 자라나는 지의류의 생명력을 보았다. 인간의 취약함과 식물의 끈질긴 생명력의 만남은 몇 년 전부터 시작된 [존재의 가벼움] 시리즈에 나타난다. 다양한 씨앗이 발아하는 작품에 대한 또 다른 기원은 1986년 독일에 유학 가자마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왔던 음양이나 기(氣)에 관련된 동양철학, 그리고 태극권과 단전호흡, 요가 등의 수행에 이은 채식 생활 중에 수세미에 떨어진 씨앗으로부터 받은 영감이다. 옷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씨앗을 키우는 ‘기법’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다. 작가는 오래전에 우연히 자신의 몸과 마음에 심어진 것들을 소중히 키워가는 중이며, 누군가는 그것을 예술이라고 부를 따름이다.         

   

출전; 청주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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