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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 / 세계를 여는 창

이선영

세계를 여는 창

  

이선영(미술평론가)

  

김승희의 작품에는 누군가의 창문들이 찍혀있다. 보통 창을 포함한 집은 자아의 상징으로 읽힌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이러한 주제를 한권의 두꺼운 책으로 풀어내기도 했다. 특히 집은 여성의 공간이다. 일상어에서 기혼 남성들은 여성을 ‘집/사람’으로 부르곤 한다. 작가는 ‘집이라는 나에서 외부 세계인 너를 들여다 볼 때 우리는 창문을 통한다’고 말한다. 창 안쪽에는 자아와 관련된 것들이 가득 채워져 있을 것이다. 때로 그것들은 창턱에 모습을 드러낸다. 김승희의 작품 속 창에 걸쳐있는 빨래나 화분들이 그것이다. 실제로 동네를 걷다보면 집 내부가 좁아서 창고 식으로 창(때로는 베란다)을 늘려서 집안의 물건들을 ‘상설 전시’하는 창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때 창은 시선을 바깥으로 유도하는 접면이 아니라, 내부에 물건이 쌓인 입구라고 할 수 있다. 현실에 대한 환영(illusion)이 아니라, 현실의 일부가 되는 방식은 입체파의 꼴라주 이래, 재현주의를 거부하는 현대미술의 주된 표현방식이었다. 





오래된 공동주택의 경우, 다른 시기에  다른 제품으로 창을 개보수하여 하나의 몸체에 각기 다른 창틀을 가진 진풍경도 찾아볼 수 있다. 김승희의 작품은 창문이 뚫린 벽까지 같이 찍히기 때문에, 여러 장소의 여러 형태의 창문이 있는 표면은 누군가의 얼굴로 보인다. 얼굴 또한 판판한 판에 뚫린 구멍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구멍의 배치에 따라 얼마나 얼굴이 달라질 수 있는가. 한국은 물론 동유럽에서 찍어온 이국적인 분위기의 창문은 여러 표정의 얼굴이 담겨있다. 작품은 줄리엣을 부르는 로미오가 바라봤을 법한 로맨틱한 분위기의 창문/얼굴부터 감옥같은 쇠창살이 덧대있고 상처 많은 투박한 창문/얼굴까지 다양하다. 닫혀있거나 열려있는 창문을 얼굴과 비교하자면 눈으로 여겨진다. 대개 하나씩 포착되어 있는 창문은 입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창문 아래에 있을 문이 입과 더 가까운 비유가 될 것이다. 우리는 얼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눈을 ‘영혼의 창’이라고 표현한다. 


개체의 죽음은 이 창에서 빛이 거두어짐을 말한다. 창문/눈은 작가가 들고 있는 카메라의 눈처럼 외눈박이이다. 그것은 고정된 단일한 눈을 유도한다. 르네상스 시대에 확립된 회화의 규범 또한 그와 비슷하다. 김승희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사진이기는 하지만, 회화의 지지대가 같이 결합됨으로서 사진과 회화 모두에 얽힌 어떤 시각과 시각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마틴 제이는 [모더니티의 시각체제들]에서 캔버스를 투명한 창문이라고 한 알베르티의 유명한 비유를 들면서, 그 같은 캔버스는 평평한 거울로도 이해된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그 장면을 보고 있는 눈에서부터 방사상으로 퍼져 나가는 공간은 기하학적 공간이다. 그런데 그 눈은 정상적인 시각에서의 두 개의 눈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단일한 눈, 즉 앞에 놓여있는 장면을 하나의 구멍을 통해서 들어다보는 고립된 눈이다. 마틴 제이에 의하면, 이러한 시각은 불규칙하고 단속적인 움직임들로서 하나의 초점에서 다른 초점에로 옮겨 다니는 동적인 눈이라기보다는, 정적이고 깜박거리지 않는 고정된 눈으로서 이해된다. 







마틴 제이는 원근법적 응시의 추상적인 차가움을 강조한다. 즉 그것은 화가가 그처럼 기하학화 된 공간 속에서 묘사된 대상들과 정서적으로 얽히는 것을 방해한다. 사진적 시각이 보편화된 이래, 외눈박이의 관점은 인간의 지각에 영향을 주어왔다. 사진에 대해서도 중요한 글을 남긴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기계복제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언급하였듯이, 예술작품에는 변함없이 지속되는 본질이 아니라, 사회적 변화와 기술적 발명품 따른 역사적 본질만 남아있게 되었다. 사진은 근대시대에 매체계의 변화를 이끈 대표적인 양식이다. 이후 그것은 색깔과 소리, 움직임을 추가하면서 시각혁명을 이끌었고, 21세기에 보편화된 인터넷 기반의 생태계에서도 대표적 소통방식이 되었다. 김승희가 찍은 창은 사진 및 사진적 지각이 변화시킨 세상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특히 작가는 소통의 간접성에 대해 말한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소통이 간접화되면서 무엇인가 끼어든다. 


반대로 무엇인가 끼어들면서 소통은 간접화된다. 미디어는 결코 투명하지 않은 것이다. 김승희가 찍은 창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작가가 창 자체를 소통의 창구를 탑재한 인간으로 비유하기 때문에, 인간이 또 있는 것은 중언부언일 것이다. 닫혀있는 창문은 물론이고 열려있어도 내부가 잘 보이지 않는 창문에서 여기를 바라보는 시선은 감춰져 있다. 마치 선글라스를 낀 사람처럼 말이다. 또는 CCTV처럼 나는 볼 수 없는데 나만 보여지는 듯한 감시적 시선을 느낄 수도 있다. 김승희의 작품은 자신의 시선을 감추는 누군가, 또는 시스템과 마주선 느낌이다. 창은 안과 바깥 사이의 연결을 위한 통로가 되지만, 그러한 가능성이 충분히 현실화되지는 않는다. 실제로도 열리지 않는 창문은 점차 늘어나고 있다. 공기청정기를 비롯하여 냉난방시설이 잘된 고급 건축이나 사생활보호가 잘 안 되는 1층이나 반지하의 취약한 건물 모두에서 창은 잘 열리지 않는다. 






자체 내의 자족성으로 인해 열 필요가 없거나,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열수 없는 경우이다. 다양한 창문을 찍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곤 하는 작가에게 거리가 안 나와서 찍지 못하는 사진도 많다고 한다. 대개 재개발 지구 같이 취약한 거주지, 즉 밀집된 장소가 그렇다. 다닥다닥 붙어사는 도시적 삶에서 창의 위상은 바뀌었다. 시선이 통과할 거리가 넉넉해서 원근법이 잘 적용된 르네상스 시대에 창은 세계를 보는 창이자 틀이었다. 창은 세계를 발견하게 하고 또 발견한 것을 재현할 수 있게 했다. 재현은 ‘발견’된 대륙에서 가져온 원자재와 노예를 활용하여 상품을 생산하는 것처럼, 시각적 이미지의 생산과 관련된다. 이러한 이미지의 생산은 보고/재현하는 것을 통해 소유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드로 가득한 프레임으로 실험하는 알베르티의 원근법에 관련된 판화를 보면, 그러한 발견 및 재현 방식이 매우 체계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피사체가 된 대상을 촘촘한 좌표축 위에 배열한다. 그 때 원근법은 과학과 다르지 않았고, 카메라의 시각 또한 그러한 모델에 바탕 한다. 창문은 그저 중성적인 틀이 아니라 고도의 상징과 역사를 내포하고 있다. 작가가 창을 통해 던지는 메시지는 그러한 상징들과 얽혀있다. 세계로 열린 창에는 명암이 함께한다. 평등하지 못한 세계에서, 즉 차이가 차별로 전화되는 세계에서 창을 통한 소통 및 유통에는 사회적 모순이 깔려 있다. 창문을 바깥과의 소통창구로 생각하는 작가는 바로 그 창구를 통해 소통의 부재를 말한다. 이러한 역설어법은 이미 세계로 뚫려 있다는 창에 이미 내재한다. 즉 여기에서의 창은 소통의 가능성이지 현실성은 아니다. 작가는 창이라는 소재이자 주제인 작품을 통해 소통의 가능성을 예술작품으로 현실화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사진을 포함한 예술작품은 인터넷 기반의 생태계 속에서 위상이 변화한다. 








전시부제로 정해진 ‘window’는 일반인에게는 얼핏 실제의 창보다 가상의 창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의 창의 위상이 약해진 만큼 가상적 창의 위상은 매우 강해진다. 김승희의 사진 이미지는 가상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물리적 형태를 갖춘다는 점에서 ‘윈도화면’으로 말해지는 인터페이스와는 차이가 있다. 작가는 창으로 대변되는 타자와의 만남이 위축된 것을 윈도 화면으로 본다. 가상의 소통이 실제의 소통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실제의 창문을 열기보다는 윈도화면(그리고 작은 컴퓨터라고 할 수 있는 스마트폰 화면)을 먼저 여는 경우가 더 많다. 잠들기 전에도 윈도화면은 그날 마지막 본 창이 된다. 그러나 가상세계이다 보니 허수가 많다. 윈도화면 저편에 육체를 가진 나는 내동댕이 처져 있고, 가상 속에서의 가상적 소통이 이루어진다. 가상세계가 보다 더 잘 꾸며진 것일수록 실제와의 괴리는 더욱 커진다. 


그곳이 화려하고 변화무쌍할수록 실제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더욱 짙어진다. 가상세계는 이미 실제의 판도를 상당부분 변화시킨다. 작가는 가상적 창문을 통한 소통이 주체를 더욱 소외시킨다고 본다. 각자 창을 열고 창을 통해 소통하는데, 그것이 진짜 상대와의 소통인지 불확실하다. 그것은 이미 가상적 통로가 투명하지 않다는 증거이다. 그것은 시스템이고, 대부분 누군가의 사업이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소소한 이야기들은 빅 데이터가 되어 정치경제적으로 활용된다. 소통을 통해 소비되는 느낌이 강하다. 마크 포스터가 [뉴 미디어의 철학]에서 말하듯, 전자적 매개를 통한 소통은 자기지시(self-referentiality)적이다. 어떤 다른 것이 아니라 시스템 그자체를 지시한다. 나는 전자적 매개를 통해 소통한다고 믿지만, 그것은 시스템의 논리를 복제한다. 그것은 세계를 보는 창에서 진화한 회화가 결국 근대에 와서 자기지시적으로 변화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작가는 창을 찍은 사진 뒤에다 캔버스 왁구를 엇겨서 붙인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렇게 만들어진 복합체를 벽에 붙인다. 사진 속 풍경과 조화되는 색으로 칠해진 왁구는 이미지를 현실로 연장시킨다. 이러한 장치는 사진작품을 설치적인 방식으로 확장할 수 있게 한다. 전시장의 조명에 따라서 틀 자체의 물성을 강조한다. 틀은 물질처럼 그림자를 가지는 것이다. 이미지와 물질은 병치된다. 이미지와 틀을 엇겨서 배치하는 것은 이미 틀을 중성적 장치로 간주하지 않음을 말한다. 결과적으로 김승희의 작품은 창이미지 뒤에 또 다른 창이 자리하며, 그것은 가상과 실제의 구분에 버금하는 어떤 차이를 부여한다. 이미 가상 세계에서 창속의 창, 그 창속의 창이라는 무한한 창의 계열을 실행할 수 있는데, 그러한 메커니즘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작가는 에셔의 작품에 나타나는 끝없는 회귀의 이미지와 비유한다. 창이 창을 낳을 뿐, 창을 통한 어떤 다른 것은 나타나지 않는다. 


구조만이 남아 그자체가 실체가 되면 인간은 소외된다. 인간은 자신이 주체적으로 기계를 사용한다고 생각하지만, 기계의 단순한 실행자로 환원시키려는 흐름은 강력하다. 소통을 위한 소통 시스템 속에서, 시스템의 말단에 위치할 뿐인 인간은 무엇을 소통하는 것일까. 하루 종일 바라보는 그 ‘윈도’에서 소통되는 것은 무엇일까. 살아있는 사람을 유령화 시키는 시스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타자와 교류하는 창의 실체를 똑바로 볼 필요가 있다. 작가의 수많은 창에 대한 응시는 그러한 과제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작품 속의 열리거나 닫힌 창에는 짙은 외로움이 느껴진다. 곧 있으면 허물어질, 아니 사진적 특성상 이미 사라졌을 수 있는 풍경에서 직접적인 소통에 대한 희망이 가능하기나 한가에 대한 회의까지도 느껴진다. 김승희가 사진으로 표현한 창문들은 소통의 인플레 현상 속에서 다시금 실제적 소통을 찾아보자는 희망사항이 투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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