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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온 / 의미에서 풀려난 존재의 풍경

이선영

의미에서 풀려난 존재의 풍경

  

이선영(미술평론가)

  

오래된 시장 골목의 가게 두 칸으로 만든 채온의 작업실은 그의 최근 작품만큼이나 어지럽다. 바닥에 널부러진 물감들이나 다닐 길도 없이 빽빽하게 세워놓은 캔버스 등, 어떤 방문객도 뭐하나를 건드리지 않고서는 움직이기 힘들다. 물론 그것은 방문자의 관점이라서, 작가는 그런 곳에서도 정확하게 재료들을 다룰 것이다. 한낮에도 다니는 사람이 뜸한 을씨년스러운 곳이지만 그렇다고 정적에 감싸여 있지도 않다. 유년시절의 추억이 담겨 있는 그곳은 유령들이 떠도는 듯한 이번 전시의 작품들이 나오기에 딱 맞는 장소 같다. 문은 있지만 창문은 안보이는 작업실 벽에 걸린 거울이 인상적이다. 액자 집 주인의 선물이라고 하는데, 통상적인 거울보다는 폭이 좁아서 얼굴이 다 보이지 않고, 얼굴을 다 넣으려면 멀리서 봐야 할 것이다. 가령 이전 작품 [거울 보기2](2013)에 반영된 인물은 반으로 자른 계란 노른자처럼 박힌 작은 얼굴인데,  그것은 스마일 기호의 한 점처럼 저편으로 곧 사라질 것 같다. 




환영하는 밤, 112.0x162.0cm, 2018.



환영하는 밤, 130.3x130.3cm, 2018



상상화 227.3x181.8cm, 2018



젖은 오리 Oil on Canvas 40.9x31.8cm 2016



Stroke 4 Oil on paper 24x32cm 2017



전체를 적당한 거리에서 자세히 보기 힘든 그 거울은 잘리거나 흐릿한 이미지를 반사한다.사빈 멜쉬오르 보네는 [거울의 역사]에서, 거울은 인간의 의식에 자기 육체의 상을 보여주면서 수많은 투사와 상상적 동일시의 자리를 제공해 주지만, 모든 얼굴 중에서 자신의 얼굴은 우리가 가장 아는 것이 없는 얼굴이라고 한다. 보네는 거울의 반사상이 언제나 수증기처럼 피어오르는 욕망에 가려 단한번도 완벽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보네가 인용하는 현대의 심리학자들이 주장, 즉 자기 상의 불안정성은 채온의 작품에서도 분명하다. 거울은 이전의 작품 [saw me](2012)처럼, 거울과 마주한 한 남자의 몇 십 년 인생을 왔다갔다 하는 고무줄 같은 시간 감각을 가진다. 채온은 자화상을 비롯하여 많은 초상을 그렸다. 작가의 정동(affect)이 강하게 투사된 풍경과 정물 또한 자화상같은 성격을 가진다. 그러나 작업실에서 거울을 다가가기 힘든 장소에 있었으며, 그는 거울을 잘 보지 않는다고 했다. 


작품의 산실에서 부재 하는 창문과 불완전한 거울은 채온의 그림과 유사하다. 거울이나 창문은 오랫동안 회화에 대한 비유가 되어 왔다면, 그의 ‘거울’과 ‘창문’은 관객의 시선을 저편의 대상으로 안전하고 확실하게 맞닿게 해주지 않는다. 시각의 투명함과 거리감 대신에 유화 물감의 끈적한 표면에 들러붙게 한다. 그는 대상의 피상적인 외관을 넘어 실재와 만나고자 한다. 물감이 칠해진 순서를 알 수 있을 법한 필획과 중력을 향하는 물감 자국 등은 그리기의 과정 또한 실재에 포함시킨다. 즉 그의 그림은 대상에 대한 추인이 아니라, 대상과 함께 진행된다. 대상과 실시간 대화하고 그 결과가 시시각각 남겨지는 작품들은 언제 그 과정이 시작되고 끝나는지 자신만이 알 수 있다. 드로잉 없이 바로 시작하고 끝내는 그의 작품은 붓질 자국이 선명하고 재현주의적 꼼꼼함과는 거리가 있다. 채워야 하는 면이 생겨도 기필코 가장자리 얼마큼은 빈 곳을 남겨놓는다. 자신을 휘감았던 순간순간의 기분을 얼룩처럼 표현한 추상적 작품은 화가가 사용하는 색채의 계열이 담긴 팔렛트와 다름없다. 




나의 얼굴 oil on canvas 33.4x24.2cm 2015



강한 사람2 oil on canvas 34.4x24.2cm2015



멍든 정원사 Oil on Canvas 45.5x37.9cm 2016



과정과 결과의 일치를 보여주는 [무제](2012-2013) 시리즈나 [Stroke](2017) 시리즈는 종이 위에 붓질 그 자체만을 남겨놓는다. 그리 크지 않은 화폭에는 그리기의 즐거움을 뺀다면 어떤 의미와도 연결되지 않는 물감의 흔적들이다. 의미보다는 존재를 중시하는 현대미술이 형식주의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었다면, 채온의 작품은 내용에 충실하다. 그림 그자체보다는 자신에 집중한다. 존재는 의미와 일치시킬 수 없으며 더 광범위하다. 세계에서 인간적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그렇게 많은 의미가 찾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의미(특히 인간적 의미)는 협소하고 때로 폭력적이다. 그의 작품에서 얼룩은 의미를 지시하지 않는다. 더 멀리 추적하자면 담벼락의 얼룩에서 영감을 구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보통은 15-20분, 길어도 30분을 넘기지 않는 작업시간은 순간의 영감과 필획의 운용에 충실하다. 한 번에 수행되지 않으면 망칠 확률이 높은 채온의 작품은 재현주의적 장황함을 걷어내고 대상과의 공명이라는 핵심만 남겨놓고자 한다. 


그의 작품은 영감에 충실한 예술가의 신화를 불러들인다. 에른스트 크리스와 오토 쿠르츠가 함께 쓴 [예술가의 전설]에 의하면, 예술에 있어서 신적 영감을 중시한 최초의 철학자는 플라톤이다. 그러나 미메시스, 곧 자연의 모방을 추구하는 조형예술은 진정한 실체인 이데아로부터 멀리 떨어진 희미한 반영에 불과하기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예술가의 전설]에 의하면, 플라톤의 사상에서 신적 영감은 시인에 해당된다. 여기에서 신적인 존재에 도취한 신성한 상태, 또는 신적인 도취는 고대에 시인이나 음유시인들의 특징이다. 플라톤의 논리는 신적 영감을 받을 때 인간은 신성의 도구가 되며, 순수한 감동의 열광이 그의 영혼에 기운을 불어넣는다는 것이다. 채온은 화가이지만 (플라톤이 폄하한)조형예술가가 아니라 시인처럼 그린다. 영감에 충실하기 위해 시인이 글을 쓰듯이 신속하게 작업한다. 채온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드로잉이다. 드로잉은 회화보다 완성감은 부족하지만 영감을 받아쓰기에 적절하다. 그것은 정적인 완성감이 아니라 동적인 과정을 중시하는 것이다. 




강한 사람 oil on canvas 90.9x72.7cm 2012



가창의 밤 oil on canvas 90.9x72.7cm 2015



캔버스나 종이는 그러한 과정들의 궤적을 생생하게 기록하는 장이다. ‘환영하는 밤’이라는 전시 부제는 두 가지 환영(歡迎, 幻影)을 겹쳐 쓴 것이다. 요동치는 입자같은 허연 형태들은 그의 작품에 자주 출몰하는 유령이다. 환영(幻影)을 환영(歡迎)한다고 하니, 그의 작품 속 유령적 존재는 그다지 부정적이지 않은 셈이다. 경계를 거스르며 횡단하는 유령은 자유로운 존재이다. 이전에 그린 작품 [가창의 밤](2015)처럼 유령은 들과 하늘을 이어준다. 정확하게는 그 사이에 끼어있는 형국이지만, 그 시기의 비슷한 스타일의 작품 [오늘은 비를 맞을 거예요](2015)처럼 경계는 쉽게 허물어지며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유령적 존재는 끈떨어진 풍선처럼 정처없이 공간을 유영한다. 그것은 어디쯤 날아가다가 터질까. 이러한 정처없음과 자유로움이 동시에 함축된 이러한 상황은 현실에서는 정확한 자리가 없는 예술가의 또 다른 모습이다. 정확한 외곽선이 없이 풀어 헤쳐진 형태들은 속도감 있게 공전하면서 시시각각 변화한다.


그것들은 어떤 좌표에 자리 잡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운동하는 공간을 만들어 나간다. 꽂혀 있는 꽃들에 비해 목이 가느다란 병이 있는 작품 [상상화]는 알라딘의 마술 램프처럼 꼭지가 열려 폭발하듯이 튀어 오른다. 폭죽처럼 보이는 상상화는 희끄무레한 유령과 달리 색색의 화려함을 가진다. 그를 사로잡은 유령의 이미지의 출처가 근처 공단의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라고 볼 때, 좁은 용기 안에서 터져 나오는 식물 또한 근친 관계를 가진다고 생각된다. 새벽녘에 더 잘 보인다는 공장의 굴뚝에서 나오는 것은 재료가 타서 나오는 부산물이다. 그곳에서 밤낮없이 일하면서 연기를 만들어내는 공장 노동자처럼, 작가 또한 재료와 자신을 불살라 무엇인가를 만들어 세상에 내보낸다. 그러나 잠시 형태를 갖출 뿐, 곧 공중에 산산이 흩어지는 그것들은 생산물이기 보다는 폐기물(배설물)에 가깝다. 엔트로피는 극대화된다. 그가 본 공장의 풍경은 내면 풍경으로 전환되었다. 극단적으로는 몇 개의 색 얼룩만으로 그려진 초상화들 또한 유령 같다. 




Woopo Wetland Oil on canvas 112.1x162.2cm 2017



부는 바람 Oil on canvas 30.3x90cm  2017



넘는 풍경 Oil on canvas 72.7x100.0cm 2018



기다리는 성당 Oil on Canvas 116.8x91.0cm 2016



작은 교회 Oil on canvas 48.0x110.0cm 2016



가족이나 지인, 자신을 포함하는 좀 더 가까운 거리의 대상에 대한 인상이 담겨 있다. 생김새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이런저런 얼룩의 조합은 그들의 우울함과 냉랭함, 공포와 불안 등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얼굴에 표정이 담기는 것이 아니라, 표정이 얼굴이 된다. 두꺼운 안경이나 입가의 얼룩 같은 것들도 얼굴이 된다. 적절한 위치에 찍힌 평면 위의 두 점은 슬픈, 또는 절망적인 눈망울이 된다. 작품 [강한 사람](2012)은 실제로 강하기보다는 강해지려 노력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큰 얼굴 안의 또 다른 얼굴들이 가득한 모습을 통해 자기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이질적 타자들을 표현한다. 삶의 타자가 죽음인 것처럼, 자신의 타자는 유령이다. 동일자와 타자는 반대 항이 아니라 한 몸체이다. 고야의 작품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출현한다]처럼, 채온의 작품은 유령이 출몰하는 어둠의 시공간이 좀 더 길 뿐이다. 교회, 자동차, 동물같은 친근한 대상들 또한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단순하며 자신의 관심사에만 집중한다. 


작가는 유령이라는 비현실적 존재를 현실적으로 느끼고 있으며, 초상화들은 영혼 그자체를 그린 듯하다. 붓으로 주변을 다 쓸어버린 듯 황량한 들판에 서 있는 [붉은 교회](2016), 지평선 위에 단독자처럼 서 있는 첨탑의 푸른 십자가가 하늘에 흡수된 듯한 [작은 교회](2016), 성당의 세부가 생략되어 마치 왕관처럼 보이는 [기다리는 성당](2016) 등은 현세를 초월하는 정신세계의 풍경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21세기의 화가가 플라톤이나 종교인들처럼 또 다른 세계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는 힘들 것이다. 2017-18년에 그려진 자연풍경들은 녹색 자연의 풍부한 색감과 지평선이 있는 길이 있는 시원한 구도로, 색 얼룩의 실험이 자연같은 객관적 현실과 만났을 때의 힘을 보여준다. 물론 작품 [유령들의 밤](2018)처럼 풍경에도 유령이 잠재해 있다. 지평선 아래의 꾸물거리는 하얀 유령들은 밤이 되면(또는 때가 되면) 슬금슬금 경계를 가로지르며 활개 칠 것이다.

 

출전; 대구문화예술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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