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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영 / 더한 어둠으로 밝혀진 어두운 세계

이선영

더한 어둠으로 밝혀진 어두운 세계

  

이선영(미술평론가)

  

빽빽한 공간 속에 아무렇게나 쑤셔 박힌 닭들, 소시지처럼 등이 쪼개진 채 살처분되는 돼지들, 좁은 공간에 산지도 죽은지도 모르게 가득 쟁여진 생명체, 살과 지방, 그리고 뼈가 한데 엉긴 모습이 즐비한 최재영의 작품은 어둡다. 그러한 현실은 과장이 아닌 사실이기도 하고, 아직 새파랗게 젊은 그가 어둡기만 할 이유는 없을 터이지만, 꿈과 희망의 몫이 더 많을 젊은 작가이기에 더 어둡게 보이는 세상이다. 한 젊은이가 세상을 겪다가 밝은 모습을 다시 보게 된다면 그것은 더이상 철없던 시절의 밝았던 그 세상은 아닐 것이다. 그저 주어졌던 원초적 밝음이 아니라 어둠이 지양된 그다음 단계일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밝음이 아니라, 순간의 축복처럼 주어지는 밝음이다. 그리고 두 번째 밝음은 주체와 관련된 밝음일 것이다. 세상은 그러한 주체의 생산물 중의 하나를 예술작품이라고 불러준다. 어떤 어둠이라도 예술가의 비전에 의해 밝혀진 세계는 어둡지 않다. 최재영은 어둠의 세계를 밝게 비춘다. 그의 작품에는 어둠의 풍경이 낱낱이 드러난다. 그것은 더한 어둠으로 밝혀진 어두운 세계이다. 




가득한 텅 빈 4, 454× 182, oil on canvas, 2017



가득한 텅 빈 2, 724× 227, oil on canvas, 2017



가득한 텅 빈 1, 454× 162, oil on canvas, 2017



여기에서 세상 또는 내 안에 응어리들은 어떤 실체로 드러난다. 피 흐르는 내장의 풍경 일부는 똑같이는 다시 칠해지기 어려운 붓질의 유희로 절묘하다. 부분만 떼서 보면 그 안에 또 다른 풍경들이 보이는 추상화이다. 거기에는 더이상 고전주의적 이성, 또는 이상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매너리즘 시대 화가의 야생적인 붓질 같은 것이 있다. 어둠 속에서 산란하는 빛줄기 같은 이러한 ‘하이라이트’는 극단의 고통 속에서 생겨나는 쾌락인 희열이다. 물리적이든 심리적이든 실제로 작가가 겪는 고난과의 역학관계가 예술작품에는 선명하다. 그에게 어둠의 원인 제공자는 타인이었지만, 그것은 곧 자기 안의 타인의 모습과 중첩된다. 나에게 고통을 주는 세상이 전적으로 타인의 탓이라 생각하면 나름대로 편할 수도 있다. 외재적인 적은 적당히 피해 갈 수도 있고, 맞서 싸울 수도 있다. 그러나 타인의 모습이 내 안에도 있음을 발견할 때 문제는 복잡해진다. 자기를 응시하는 작가들은 남 탓하기 좋아하는 대중들과 달리 문제가 단순하지 않음을 안다. 


이러한 모호함에 예술의 진면목, 또는 진실이 있다. 가축들이 가득한 풍경과 그 일부, 즉 살덩어리가 있는 풍경, 이 두 개의 국면은 외재적/내재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두 국면은 분리 불가능하다. 가령 평생(그래봤자 수개월 이내)을 A4 한 장 크기의 면적에서 산다는 닭의 내부, 감염병에 취약한 채 태어나 불량품처럼 대량 폐기되는 돼지의 내부가 그렇게 생긴 것이다. 우리네 어머니가 ‘너 때문에 속이 푹푹 썪는다’는 표현을 할 때의 그 상황이다. 최재영이 그린 고깃덩어리들은 죽어서야 보이는 내부이다. 또는 죽어가면서 보이는 내부이다. 그는 고깃덩어리를 직접 보고도 그리지만, 보지 않고도 그리기에 피비린내 나는 풍경들을 해부학적인 것이라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래도 한 개인의 경험은 중요할 것이다. 그것도 일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사건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는 미술과 미술 아닌 일 등 여러 일을 하면서 모은 전 재산을 사기를 당할 뻔한 터라 타인으로부터의 고통이 크다. 




가득한 텅 빈 3, 194× 130, oil on canvas, 2017



덩어리 5, 130× 97, oil on canvas, 2018



덩어리 2, 130× 97, oil on canvas, 2018



사기당할 뻔한 돈을 겨우 찾아 얻은 거처 또한 길가에 바로 마주하고 있어서 타인의 소음으로부터 고통받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밤낮이 뒤바뀐 생활 속에서 세상과 떨어진 채 홀로 작업하는 이가 세상을 밝게 본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그는 ‘타인의 지옥이다’라는 말을 인용한다. 그 말의 주인공인 사르트르는 사회적 모순의 극복을 위해서 집단적 유대를 전제하는 사회주의 운동에도 열심이었는데, 정작 전후의 사람들이 가장 공감했던 대표적 철학적/문학적 언명이 ‘타인은 지옥’이라니 그것도 역사의 역설이다. 그 언명의 근간을 이루는 실존주의는 비사회적인 개인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그 반대파들로부터 부르주아/개인주의/퇴폐주의 등등의 오명을 뒤집어 썼다. 특히 소외된 개인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적 단결이 요구되는데, 그때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사고는 부정적일 수 밖에 없다. 실존주의는 (후기)구조주의 같은 보다 현대적인 철학의 흐름 속에서도 낡은 휴머니즘에 머물고 있음을 비판받기도 했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고 주장한 이도 사르트르였다. 


그러나 휴머니즘이 문제시 된 것은 휴머니즘이 그 이름값에 못하는 관념이어서 일수도 있고, 근본적으로는 인간중심주의일 수 없는 과학 기술에 의해 급격히 시스템 화 된 사회에 뒤떨어진 사상이어서일지도 모른다. 휴머니즘은 보편적인 사상이기 보다는 신학적이거나 계몽적인 사상, 즉 서구적인 사상이다. 이제 유일하게 보편적인 것은 시장으로 간주된다. 시장의 바탕에 자본과 노동이 있다. 한국 또한 보편사의 일부로서 자본주의를 따라갔기에 휴머니즘은 얼마간의 의미를 가진다. 한편 한국은 기이한 발전을 했다. 인터넷 접속망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이 어려울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매우 적다는 조사가 나와 있다. 그것은 존재와 의식의 괴리가 심한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데이터이다. 드넓지 못한 자연조건과 단절된 전통 때문인지, 한국사회에서 인간 대 인간의 게임은 가혹하다.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탈주할 수 있는 여지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덩어리 1, 130× 97, oil on canvas, 2018



덩어리 6, 130× 97, oil on canvas, 2018



덩어리 8, 117× 91, oil on canvas, 2018



피할 도리가 없는 상황에서 그래도 작가라는 존재는 그 억압적 상황 자체를 작품으로 풀어낼 수--그래서 실존주의는 예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있다. 그래도 예술은 나의 자유가 타인의 피해로 이어지지 않는 얼마 안 되는 분야 중의 하나 아닐까. 사기꾼의 농간이 그대로 관철되었다면 사기당한 이는 길거리에 나앉았을 것이지만, 최재영의 작품이 아무리 편치 않은 광경이라 할지라도 피하면 된다. 대중으로부터 예술이 꽁꽁 숨어있는 곳에서는 더욱 쉽다. 그러나 예술가는 대중의 일원으로 대중들과 함께 복닥거릴 수 밖에 없다. 그가 그린 닭장 풍경에서 교실이나 공장 같은 곳이 떠오른다. 그의 작품에서 학교 지붕 위로 석양이 살덩어리나 지방덩어리 같은 느낌으로 뭉개뭉개 펼쳐진 것 같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작가는 꿈속에서 닭장에 갇혀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의 작품은 현실보다 더 강렬한 꿈의 이미지와 관련된다. 깨고 나면 휙 사라지는 이미지를 자기의 느낌대로 펼치는 것이 중요하다. 


꿈, 또는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그것들과 관련은 있지만 다른 무엇, 즉 작품이다. 작품은 깨어있는 채 꾸는 꿈이다. 작품 속 잔혹한 장면을 떠올려 본다면, ‘살아있는 채 죽는 상황’(바타이유)이다. 그의 작품이 다소간 초현실적인 면이 있는 것은 꿈과 현실의 관계를 초현실주의와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최재영의 초현실은 비현실이 아니다. 믿어지지 않는 현실이다. 그리고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밀접한 현실이다. 닭이 되어 닭장에 갇힌 인간의 모습은 단순한 풍자나 과장이 아니다. 역사상에서 그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역사는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끌려가는 흑인 노예선의 끔찍한 배치를 보여준다. ‘블랙은 강하다’라는 흑인 인권 운동 모토 중의 하나는 그러한 최악의 조건에서도 얼마간은 살아남았던 유전자를 가진 후예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유럽 제국주의와 무관치 않은 원인으로 항시적인 전쟁 중의 조국을 패해 지중해를 건너는 난민선의 풍경이 그에 못지않다. 얼마 전 출퇴근 시간대에 서울 지하철 9호선을 탔는데, 그 상황도 떠오른다. 




덩어리 3, 130× 97, oil on canvas, 2018



, 130× 97, oil on canvas, 2018



(참고작품) 자본으로서의 삶 1-2, 60× 40, lacquer, silver on wood, 2013



최재영의 작품은 닭이나 돼지같이 인간에게 고기를 공급하기 위해 대량사육 되는 동물과 인간이 동일시되는 단계를 말한다. 고기는 푸줏간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고기이다.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도 깨달았듯이 말이다. 신화나 종교의 시대에 고기는 희생물로 바쳐지는 제의적, 또는 축제적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살아있는 생산품에 지나지 않는다. 맨 처음 고기 가공 산업에서 출현한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은 인간 또한 고기와 같은 부분으로 만든다. 작업 초창기에 최재영의 작품에는 온전한 인간들이 많이 나왔는데, 상처가 되었던 사기 사건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가축들로 바뀐다. 작품 속 비좁은 공간 속에서 반쯤 죽어 나가고 있는 가축들이 시스템 속 현대인에 대한 은유라면, 작품 속 인간의 위상은 급락한 셈이다. 천사와 동물 사이에 위치해 있다던 인간이 급격하게 아래쪽으로 향한다. 삶과 죽음, 생명과 상품, 사람과 동물, 안과 밖 등의 경계가 모호한 작품들은 승화와 거리가 있다. 


요즘 말로 비천(abject)하다. 소외되고 쓸쓸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래도 인간의 형상이 있던 초기작업에서 먹고 먹히는 관계에 놓인 ‘벌거벗은 생명’(조르조 아감벤)으로의 전락이다. 그러나 그것은 직선적인 변화라기 보다는, 작가 내부에 공존하고 있던 어떤 요소의 비중이 달라진 경우로 보인다. 가령 지금보다 사람이 많이 등장했던 시기의 작품인 [the gap](2013)에서, 가난한 나라의 소년 어부가 작은 물고기 한 마리 들고 있는 있는데, 같은 시기의 작품 [자본으로서의 삶]에는 낚시에 걸린 물고기가 잘린 꼬리는 보는 잘린 모습으로 등장하고 그 바탕도 생선 자르는 도마같이 붉게 얼룩져 있다. 사회적 시련이 있은 후 그의 작품은 물고기를 잡는 사람이기 보다는 잡힌 물고기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한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역전이다. 그러나 지상의 모든 존재들이 둘 중의 하나여야만 하는가. 중간자는 없는가. 그것이 레드 오션으로 변해가고 있는 인간사회의 커다란 비극이다.

 

출전; 청주시립미술관, 내일의 미술가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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