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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누리는 삶을 위한 예술적 담론의 장

이선영

함께 누리는 삶을 위한 예술적 담론의 장

  

이선영(미술평론가)

  

국내 작가 28명, 국외 작가 21명이 참여한 제8회 여수 국제아트 페스티벌은 지금 여기에서 근대가 추동해 왔던 세계화의 흐름 속의 삶을 총체적으로 조망하려 한다. ‘지금, 여기 또다시(lci maintenant encore)’라는 전시주제에서 ‘지금과 여기’는 그러한 야심 찬 조망을 위한 좌표지점을 말한다. 여기는 여수를 포함한 아시아이다. 지금은 지난 세기의 중반 이후를 포괄한다. 제국들 간의 전쟁이 끝난 이후, 새로운 권력 재편이 이어지면서 생겨난 문화적 지형도을 배경으로 한다. 발전, 또는 진보라는 미명 아래 혁명과 전쟁으로 점철된 아시아 근대라는 공통적 시공이 회화부터 영상설치에 이르는 150여 점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을 느슨하게 묶어주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수탈의 교통요충지였고, 해방 이후에도 여순 항쟁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의 산실이기도 했던 여수는 아시아의 역사를 다시 읽는 출발지로 적합해 보인다. ‘또다시’는 차이를 낳는 반복에 해당 된다. 






2018년의 행사가 8회를 맞이하는 만큼, 그 시공간에 대한 작가들의 또한번의 해석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예술가들이 역사가들이 해야 할 몫을 수행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제 모든 것이 정보화되는 추세와 관련되어 있다. 날로 광대해지는 정보의 바다 속에서 어떤 역사적 사건도 심미화되지 않으면 의미로 전환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눈에 띄지 않으면 묻힌다. 묻힌 것의 발굴에도 미적 조치가 필요하다. 보다 많은 정보들이 심미화된 형태로 유통/소통될 미래를 생각하면, 역사 이외에 예술이 필요했던 이유가 이 시대만큼 절실하게 다가오는 때는 없다. 가상현실의 제국이 확장될수록 인간적인 몫 또한 줄어들며, 그때 예술은 어떤 역할을 다시 맡게 될지 예측하기 힘들다. 그러나 정보가 권력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권력의 장에서 예술은 ‘새로운 게임의 수’(리오타르)를 두는 것에 관련될 것도 분명하다. 


예술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시대와 예술은 밀접했다. 시대는 예술작품에 각인되지만, 예술에 의해 다시 발굴되는 시대도 있다. 특정 지역에서의 예술축제는 적절한 계기를 부여한다. 일상의 반복적 삶에 의해 덮여 있는 진실의 발굴은 예술이 단지 상상의 차원에 머물지 않음을 말한다. 심미화란 이미 있는 의미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 것이다. 이 전시의 작품들에는 잘 정돈된 예쁘장한 것보다 의미의 보충을 요구하는 거친 작품들이 더 많다. 예술은 정리하는 것이기보다는 매번 다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의미와 미가 다른 지점이다. 19세기 말의 유미주의 시대에는 미와 의미가 반대편에 놓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근대화가 펼쳐놓은 한 면만을 주목했을 따름이었다. 문명과 반대되는 자연이거나, 근대와 반대되는 고대, 중세, 유럽과 반대되는 원시나 동양, 또는 물신화된 근대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그것이다. 



귀환촌


그러나 근대가 펼친 세상에서 현실과 진실은 추하기조차 했다. 근대적 현실을 목도 한 리얼리스트들이 단순한 현실반영에 머물렀을 때, 그것은 시대의 증인으로서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 시대와 함께 떠나가 버렸다. 보다 주도면밀한 예술가들은 근대적 삶과 함께 근대의 어법 또한 중요시했다. 모더니즘과 모더니티가 만났을 때 어떤 리얼리즘보다도 현실을 잘 반영했으며, 더 나아가 현실을 효과적으로 변형할 수 있었다. 현대미술은 사회적으로 고립된 소수자의 언어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현실반영을 위해 자신의 자율성을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로 사회적 소통을 꾀한다. 예술적/사회적 단계에는 단선적 의미의 전후(인과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맘때면 지역 곳곳에서 펼쳐지는 현대미술의 축제는 이렇듯 여러 겹의 소통을 전제로 한다. 그러한 요구에 답하지 않는 현대미술은 그들만의 리그로 소비되고 만다. 그 점에서 제8회 여수 국제아트 페스티벌은 현실과 대화적 관계를 가지도록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때로는 숨겨져 있는 이야기들의 과도함이 형식적인 완결감을 방해할 정도로...그러나 어떤 시기의 삶은 어떤 예술보다도 더 강렬할 수 있으며, 작가들은 그러한 삶을 싸안을 새로운 형식을 고민하곤 한다. 사회적, 역사적, 정치적 의미로 망을 넓혀나갈 수 있는 정보의 뭉치들은 강렬한 인터페이스를 요구한다. 이미 다가와 있지만 앞으로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할 코드화는 형식의 자동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지금, 여기 또다시’라는 부제는 기계적 자동화가 아니라, 인간적 의지 및 실천을 요구한다. 이렇게 재조명된 의미는 보다 근본적인 삶을 태도 및 행동을 낳는다. 기획 의도에 포함되어 있는 ‘사유(私有)’, ‘공유(共有)’, ‘향유(享有)’라는 키워드는 사적/공적 영역으로 양분된 이전 시대의 패러다임을 넘는 또 하나의 변수를 도입한다. 향유는 예술과 보다 밀접하다. 향유될 수 없는 것은 사유든 공유든 할 필요가 없다. 향유는 이항대립 자체를 무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요소이다. 



여순사건


예술이 사적 영역에만 속할 때 소통 불능에 빠진다, 반대로 공적 영역에만 속할 때 피상적이 된다. 그렇게 예술은 배설과 계몽을 오고 가는 난국에 빠지곤 한다. 사적/공적은 소유와 관련된 구분법으로 여겨진다. 개인적 소유, 공공적 소유 등으로. 그러나 예술은 소유를 넘어 향유되어야 한다. 진정 행복한 삶처럼 말이다. 삶 그자체가 향유될 때 예술은 불필요한 것이 되겠지만, 그 전까지 향유의 미래를 선취하여 보여주는 것이 예술이다. 예술가는 아름다움을 향유 할 수 없게 하는 현재의 모순을 더 첨예하게 바라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애쓴다. 일정 정도는 이상주의적인 비전을 가지는 정치가들과도 함께 갈 수 있는 부분이다. 예술의 경우 개인적으로는 작품을 통해서 그렇게 하지만, 이렇게 큰 전시를 통해서 개별적 의지를 모아낼 수 있다. 이 전시는 30대부터 70대까지를 두루 포괄하는 세대를 통해 역사와 현실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여수 국제아트페스티발 2018 전시기획팀’의 작가선정의 기준은 ‘이 시대에 왜 이 작품이 주목 받아야 되는가’였다. 여기에는 근대 이후 늘 상 과도기로서 간주되었던 시대정신(Zeitgeist)이 깔려있다. ‘지금’이라는 기준은 그 전후에 있는 과거와 미래와 관련된다. 아시아 근대를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주체와 역사를 다루는 이 전시에서 미래는 과거 및 현재와 연동된다. 개념사 이론의 창안자로 평가받는 저자 라인하르트 코젤렉이 [지나간 미래]에서 펼친 주장처럼, 근대 시기에 미래의 몫은 매우 커졌다. 전통으로 대변되는 과거는 무시되고 미래를 먼저 실현하는 현재에 대한 비중이 커졌다. 전통은 때로 근대의 입맛에 맞게 재가공되어 각국의 민족적 정체성이 조성되기도 했다. 발전주의나 역사주의로 대표되는 단선적인 역사관이 시간은 공간적으로 설정할 때, 아시아는 미래에 대해 아직 미개인 단계로 분류되었고, 소수에게만 열려 있는 미래에의 비전은 다수의 희생을 전제로 했다. 아시아 근대의 비극과 활력을 결정지은 미래에 대한 기대치는 기층민중의 희생을 요구했던 것이다. 



김기라X김형규


4차 산업혁명의 전야인 현재 모순과 대립은 또 다른 차원으로 전개될 것이다. 이때 제2차 대전 이후에 본격적으로 전개된 아시아 근대를 살펴보는 일은 인간과 역사 간의 가장 뜨거웠던 관계를 무대의 전경으로 끌어 내오는 셈이다. 30대의 박광수부터 70대의 강종렬까지 두루 걸쳐있는 국내 작가 28명의 작품은 거대 역사와 개인사의 관련 속에 작동하는 어떤 잠재적, 현실적 힘을 가시화한다. 소비사회의 풍경이나 자연은 보다 미시적이거나 보다 거시적인데, 이러한 차원의 급이동은 작품으로 펼쳐진 장면들을 수수께끼로 만든다. 그것은 소비사회가 낳은 물화(物化)나 자연의 추상화와 관련된다고 여겨진다. 중간 세대인 40대는 김기라와 김형규의 작품 제목처럼 [약속의 땅]을 향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맹목과 광기를 반영한다. 개별적으로 흥미로운 국내외의 작품들이 많지만, 해외작가들을 포함한 세대별, 지역별 각론들이 있기에 총론의 성격을 띄는 이 글에서 작품 분석은 생략하기로 한다.


해외작가는 이승아 큐레이터가 정리한 싱가폴 작가들과 2017년 갤러리 루프에서 진행되었던 '무브 온 아시아-동원된 표상' 전시를 투어 개념으로 가지고 온 ‘동원된 표상'으로 나뉜다. 이들 작가의 작품에도 거시역사와 개인사의 이데올로기적 관련이 발견되며, 그들의 작품은 시대의 반영과 더불어 변형을 동시에 목표로 한다. 이 전시가 다루는 아시아 근대는 더욱 가속화된 역사적 시기로 전시가 열리는 도시인 여수에도 곳곳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전시가 열리는 여수 엑스포 전시관 자리에 있었던 귀환정은 ‘패망 직후 일본이나 만주 등에서 귀환한 동포들이 몰려오자 당시 임시정부였던 건국위원회가 마련해 준’(주철희 박사)주 임시 장소였다고 한다. 역사의 파고에 의해 외적인 힘에 의해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제대로 자리 잡기 위해서 많은 갈등이 있었다. 해방 이후에도 혼란은 계속 되었던 것이다. 



딘 큐레


그것은 일제 잔재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하고 모습만 바꿔 계속 지배계급으로 남아 있던 탓이 크다. 접경지대에서 크고 작은 전쟁은 늘 있어 왔지만 대체로 오랫동안 각자의 영역에서 문화를 이어온 아시아 국가들이 더욱 요동을 치게 된 것은 근대이다. 근대화는 세계화를 가속화 했으며, 보이지 않는 힘은 사람들을 장기판의 말로 배치했다. 6.25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 등, 왜 서로 싸워야 하는지도 모를 전쟁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근대시대에 명확한 경계를 유지하는 것을 힘들어졌다. 식민지로부터 물자와 노동력을 뽑아왔고, 그렇게 만들어진 상품도 대량적으로 소비해야 할 시장이 필요했으며, 각국은 이러한 이해관계의 대차대조표에 따라 경쟁하고 갈등했다. 이후 각국의 경쟁은 항시적이었으며 전쟁으로 비화되는 것은 놀랍지도 않은 수순이 되었다. 경쟁과 전쟁에는 전략적 요충지를 수반한다. 여수 또한 그러한 뜨거운 장소에 속했다. 


여수역과 그 인근 또한 그러한 물자와 인력들이 이동했던 주요 장소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당시에 여수는 남한중에서도 지방, 즉 주변부에 위치했다고 할 수 있지만, 중심/주변 간의 모순은 순차적으로 재현된다. 물론 중심/주변의 관계는 고정된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만들어졌으니 만큼 변화될 수 있다. 그러나 먼저 중심을 차지한 것은 유럽이다. 조나단 프리드먼은 [지구화 시대의 문화정체성]에서 유럽세계의 헤게모니는 15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때는 상업주의와 유럽 중심의 세계 시장이 형성되던 탐험의 시대였다. 각 대륙에서 나름대로 자연과 전통에 기반하여 살던 인간들은 인류학의 대상이 되어 탐구되었다. 조나단 프리드먼은 인류학은 공간을 시간으로 오역하고, 문명과 비(非)문명의 진화적 관계로서 현 문명의 중심부/주변부/변두리 구조의 이데올로기적 표상 속에서 탄생했다고 본다. 중심이 중심으로서 자신을 유지하려면 팽창되어야 한다. 처음에는 폭력적으로 중심부가 팽창된다. 



오원배


조나단 프리드먼에 의하면 교역, 전쟁, 약탈 등은 부의 원시적 축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지구화 시대의 문화정체성]의 논리에 따르면 식민잔재가 청산되지 않음으로서 야기된 남한 사회의 모순도 설명할 수 있다. 프리드먼은 주변부에서 엘리트층은 외부와의 관계를 독점함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해왔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제국주의가 물러난 것은 굳이 군사적 점령이 필요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그것은 침략자들에게도 부담되고 위험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지배계급이 된 대리인들은 제국의 이해관계를 재현한다. 근대에 와서 중심의 팽창은 시스템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전 세계적인 분업이 이루어졌고 생산력은 높아졌으며 시장은 확장되었지만, 근본적인 모순은 해결되지 않았다. 시장의 지배가 보편적인 현대 사회에서 가장 큰 모순은 ‘노동과 자본의 모순’(마르크스)이다. 


모순은 격화되기도 하고 은폐되기도 하는데 이때 이데올로기가 작동한다. 예술은 이데올로기의 첨병을 자처하기도 했고, 강제되기도 했으며, 이데올로기로서의 예술을 반대하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를 실천하기도 했다. 이데올로기는 가상적이지만 현실적인 힘을 발휘하는 신념 및 행동이라는 점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작동하는 힘이다. 그것은 어느 시기에는 거칠게 주장되기도 하지만, 점차 일상적으로 편재하는 권력이 된다. 국가를 포함한 ‘이데올로기적 장치’(알튀세)는 현실에 버금가는 역할을 하는 관념을 체계적으로 만들어낸다. ‘동원된 표상’ 전을 포함한 이 전시는 오랫동안 재현과 관련을 맺고 있었던 시각예술이 중심부의 권력질서를 재현하는 ‘재현의 정치학’에 대해 반응한다. 아시아를 서구의 타자나, 서구의 주변부가 아니라, 아시아의 동일성을 확보하는 새로운 중심으로 거듭나고자 함이다. 예술 또한 권력이다. 그러나 지배 없는 권력이다. 거시역사부터 미시역사까지 이어지는 굵은 혈맥과 모세혈관에 걸쳐있는 이 전시는 하나의 중심을 다수의 중심으로 만들어가는 진정한 민주주의적 실천으로 나타난다. 

 

출전; 여수국제아트페스티벌추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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