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이승희 / 도자기로 도자기를 그리다

이선영

도자기로 도자기를 그리다

  

이선영(미술평론가)

  

평면에 얇게 얹어있는 듯한 도자기 이미지를 구현한 이승희의 작품은 실제의 사용보다는 완상용으로서의 대상을 염두에 둔 것이다. 쓰임새를 가진 것이 장식이나 예술로 변주되는 경우는 적지 않다. 가령 요즘 서양에서 인테리어 장식물로 각광 받는 소품 중의 하나가 동양의 바구니라고 하는데, 그들은 바구니에 뭘 넣는 것이 아니라 벽에 걸어둔다. 무엇인가 담는 여러 짜임새를 가진 바구니들은 그들의 눈에는 멋진 만다라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바구니의 경우는 어떠한 변화 없이 그냥 벽에 걸면 된다. 장식용 접시도 그렇다. 그러나 보이는 면이 바닥이 아닌 정면이라면 달라진다. ‘평면도자 회화’라고 칭해지는 이승희의 작품은 캔버스에 도자기를 그린 것도 아니고, 도자기 모양을 빚은 부조도 아니다. 도판 위에 흙물을 수없이 덧대어 발라 그림을 그리고 구워낸 세라믹 작품이다. 그래서 도자기 표면에 그려진 문양들은 실제의 도자기와 다를 바 없이 구현된다. 




TAO, ceramic, 83x100cm, 2013년.



잘 건조된 식물표본처럼 평면 안에 도자기가 오롯이 담겨있는 모습이 신기하다. 관객들은 그의 작품을 최대한 다른 각도로 보려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만져보려고 한다. 순수한 회화라면 이상적인 관찰 시점이 있고, 눈으로만 만지는 시각적 촉각성이 고무되지만, 그의 작품은 반대이다. 평면화 됨으로서 입체적 형태보다는 선과 색이 만들어내는 환영이 강조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도자는 자리를 크게 차지하지 않고 깨질 염려도 적다. 그러나 이승희의 작품이 유통의 용이함 만을 위해 진화한 것은 아니다. 백자를 비롯하여 옛 유물에 담긴 전통문양을 새로운 차원에 재배치함으로서 ‘전통과 현대’, ‘공예와 순수미술’에 관련된 문제 중 하나를 해결했다. 최근의 ‘TAO' 시리즈는 두 가지 도(陶,道)를 중첩시켜 작업에 있어서 수행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세계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컨셉을 내장했다. 그의 작품은 평면에 가까운 입체로, 그리기와 만들기가 공존한다. 


흙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무엇을 재현했는가 보다는 물성이 강조된다. 작품 속 문양들은 (새로울 것이 없는)전통에서 온 점은 그가 이미지의 재현보다는 새로운 차원으로 도자를 만들었다는 점을 알려준다. 도자기 그림이나 도자기 그자체가 무슨 새로움이 있겠는가. 그것은 2차원적이거나 3차원적인 재현에 불과할 것이며,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낼 수도 있는 방식이다. 이승희는 공예의 대량 상품화 가능성 앞에서 길을 잃는 대신에 정도(正道)로 돌파했다. 새로운 차원으로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많은 시행착오와 실험이 행해졌다. 그렇게 고온의 가마에 들어가도 휘어지지 않는 평평한 도자기/이미지를 만들 수 있었다. 요즘 작품은 조선백자를 소재로 하지만, 도판 위에 얹히는 이미지는 다양하다. 2016년에 발표한 [物外物] 시리즈를 보면, 표범 가죽 무늬의 괴생명체나 기물, 꽃이나 압정 같은 형태도 발견된다. 그림을 흉내낸 도자기에서 대상은 중요하지 않다.


요즘 작품의 한가운데 놓이는 백자는 더 절묘하다. 백자로 백자를 그리는 셈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가 백자를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했을 때, 정작 백자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박물관에 수없이 가서 육안으로 보고, 자신의 관점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는 미세한 입체라고 할 수 있는 조선백자를 360도로 보고자 했다. 그것은 이미 누군가의 해석에 불과한 상투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실재하는 어떤 대상에 대한 관찰과 구현의 문제였다. 새로움은 실재로부터 온다. 이승희는 근래에 백자에 대한 대중적 인기를 시간성에, 즉 시간성에 내재된 우연성 및 자유로 진단한다. 불과 300-500년 묵은 백자는 1000년 이상의 시간을 보낸 중국의 도자기보다 더 고풍스럽게 보인다. 그 이유 중의 하나로, 작가는 태토(胎土)의 질이 떨어진다는 점을 든다. 백자는 단점을 장점으로 전화시켰다는 것이다. 손때 묻은 듯한 백자에서 사람들은 형식적 완벽함보다 시간성과 서사를 감지한다. 


물론 백자에는 관객이 분명하게 읽어야 할 무엇인가가 써있는 것은 아니다. 대신 거기에는 쓸거리, 즉 공백이 존재한다. 이러한 공백으로 인해 변화가 가능해진다. 고대 원자론 철학자들이 말하듯이, 공백이 없이 사물은 변화하기 힘들다. 또는 현대의 후기구조주의 철학처럼 새로운 텍스트가 가능한 쓰기를 고무한다. 이승희는 백자의 이러한 빈 곳을 공략하여 무한대로 다시 읽고 쓸 수 있는 텍스트로 만들었다. 얇은 흙물의 수많은 중첩으로 이루어진 작품들은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는 두터운 책의 낱장을 한장한장 넘기는 듯한 시간성과 서사가 있다. 시간성과 서사는 물질과 몸이 매 순간 만나야 하는 이승희의 작업에 이미 깔려있다. 도자기 표면의 이미지를 만드는 선과 색에도 시간성이 내재한다. 원래 도자기를 비롯한 오래된 사물은 한번의 응시로 파악되는 추상적 대상이 아니다. 전통적 주제를 거부했던 추상미술은 그러한 응시 속에서 순수성을 보장받으려 했다. 


그러나 현대적이지 않은 사물들, 특히 이제는 그 기능을 달리하는, 그래서 때로는 수수께끼같은 오래된 사물들은 거듭되는 시각성(과 재해석)을 요구한다. 백자는 이러한 요구에 대해 풍부한 대답을 해준다. 우선 색에서 그러하다. 이승희는 2016년 ‘TAO’ 전에서, ‘에스키모인은 흰 눈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많다’고 인용한 바 있다.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에스키모인이 흰색을 표현하는 단어가 하나가 아닌 수 십 개가 있는 것은 그들이 흰색의 세계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색의 유혹]에서 인용되는 언어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에스키모들의 세분화 된 어휘는 흰색의 이름이 아니라 다양한 상태의 눈을 가리키는 어휘이다. 즉 색은 물체와 관련되어 미세하게 달라진다. 물체와 관련된 색은 추상적으로 코드화 할 수 없다. 이승희의 작품에서 감으로 체득될 수 밖에 없는 색채의 조율도 마찬가지다. 판판하게 만든 흙의 면에 그려서 구워지는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작품에서 ‘화이트’는 물질의 다양한 상태와 관련되어 수많은 계열로 분화된다. 


그의 작품에서 흙이라는 물질은 그냥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다. 흙물을 한 켜 한 켜 70번을 발라 만든 판이다. 거기에다 가마에서 구울 때의 수축률을 염두에 둔다. 그것은 오랜 경험과 감각의 산물이다. 색의 경우 그가 쓰는 청화 안료는 서른 가지 정도 되는데, 그 또한 유약에 따라 변색 되는 정도를 가늠할 수 있어야 한다. 그의 작업은 자신만의 매뉴얼에 의해 엄밀하게 만들어지지만 우연성에 열려 있다. 작업과정에 깔린 우연성의 개입을 실패로 볼 것인가의 유무는 전적으로 작가의 판단이다. 판단은 그가 내리는 것이지만, 성공과 실패가 간발의 차이임은 분명하다. 시간을 쌓아 새로운 공간을 생성하는 방식은 설치작품에서도 이어진다. 도자로 대나무의 마디들을 모듈식으로 만들어 수직으로 연결하여 숲을 만드는 작품은 보다 큰 규모로 펼쳐진다. 흙으로 직접 만들고 그린 조형적 단위를 중첩해 만든 인공 대나무 숲은 평면 도자처럼 고도의 인공물이자 언어인 예술이면서 자연 및 사물에 가깝다. 


그것은 코드화로 귀결되기 쉬운 독단적 시각으로부터 벗어나야 가능하다. 르네상스 이후에 확립된 대표적인 재현의 방식은 하나의 소실점(중심점)에 맞춰진 감상자의 눈을 가정하는 관례이다. 얼어붙은 듯한 하나의 시점은 주어진 것들을 합리적으로 배열하여 알고 소유하고 지배하는 방식이다. 현대미술은 이러한 시각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했다. 그러나 대표적인 현대미술인 추상미술과 개념미술은 수백 년을 이어온 기존의 관례와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코드화되곤 했다. 들뢰즈의 진단에 의하면, 추상미술이 코드화된 것은 손적인 것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이승희의 방식은 순간에 결정화된, 그럼으로서 순수성을 확보하려 한 모더니즘과 거리가 있다. 공예와 미술, 구상과 추상, 2차원과 3차원, 그리기와 만들기 등이 중첩되는 그의 작품은 시간성과 해석에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몸과 물질이라는 실재와 관련된다. 


그가 전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것은 근대적 평면성이었는데, 그의 평면은 근대적 관례로부터도 벗어나 있는 것이다. 염직과 도예를 전공한 이승희는 공예가들보다는 현대 미술가들과 전시를 많이 했고 교감했다. 그 중 한 명인 홍명섭의 ‘비(非)조각적 조각’를 따라 ‘비(非)도자기적 도자기’라고 자신의 작품을 설명한다. 그들은 조각이나 도자기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조각이나 도자기를 확장시켰다는 공통점이 있다. 변화는 지엽적이지 않고 근본적이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승희의 첫 개인전의 부제가 ‘흙 이야기’였다는 점은 시사적이다. 그는 도자기보다는 그것을 만드는 원초적 재료에 대해 생각했고 그것의 형식보다는 내용에 집중했다. 새로운 형식은 단지 형식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경계에서의 위태로운 게임을 통해 이루어진 이중의 탈주, 그 중심에 시간성이 있다. TAO 전(2016)의 도록에서 작가는 작품보다는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더 공을 쏟는다. 


그는 여기에서 ‘시간은 쌓이고 칼날은 무디어지고 붓은 닳고’라고 읊조린다. 매 순간 감각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작업의 과정은 시시각각 달라지는 지각에 호소하는 작품을 낳았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이승희의 작품은 미니멀하다. 미술사에서 미니멀리즘은 모더니즘의 정점이자 그로부터의 탈피로 평가된다. 모더니즘의 논리에 의하면, 시간성의 개입은 순수성을 해칠 가능성이 있다. 그린버그로 대표되는 모더니즘 미학에서, 순수함은 각 장르를 특징짓는 매체의 특수성을 통해 얻어진다. 모더니즘은 특정한 기능과 내용에 얽매이지 않는 순수성과 이를 통해 자율성과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완전한 평면은 있을 수가 없고, 주제로부터의 자유란 것도 예술의 힘을 빼왔던 점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모더니즘에서 시각성을 극대화하는 방식은 시각예술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수없이 많은 겹으로 이루어진 이승희의 평면 도자는 그 일부를 모더니즘에 기대고 있다. 그린버그는 [더 새로운 라오쿤을 향하여]에서, ‘화면은 그 자체가 깊이의 효과를 내는 가상의 면들이 실제 캔버스의 표면인 실재적이고 물질적인 평면 위에서 하나로 만날 때까지 그것들을 평평하게 만들고 압박하는 가운데 점점 얇아진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것은 시간적 지속이 아니라 일순간의 응시로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전능한 관점으로 포착된 평면이다. 이승희의 작품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표면과 평행한 면들을 활용한다. 그러나 그린버그적 논리의 귀결인 추상회화와 달리, 도자기 이미지가 선명한 이승희의 작품은 ‘사실주의적(realistic) 환영’과 ‘시각적인(optical) 환영’(그린버그) 모두에 걸쳐 있다. 그의 작품은 예술적 새로움이 ‘순수’가 아니라, 경계에 걸쳐 있는 ‘불순’, 또는 혼합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려준다.


출전; 월간미술 2018년 9월호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