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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주 / 자명한 허구

이선영

자명한 허구

  

이선영(미술평론가)

  

이석주의 [사유적 공간] 시리즈는 실제로 착각할 만한 정교한 붓질로 만들어진 허구의 공간이다. 진짜처럼 보이는 허구는 역설적이다. ‘사유적 공간’이라는 제목은 관객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이 투명한 창문이나 거울에 비춰진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사유 또한 재현되어야 한다는 과제가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일수록 더욱 호소력 있는 증거가 필요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의 허구성을 강조한다. 사실과 허구를 표면과 이면으로 가지면서 수시로 자리를 바꾸는 듯한 극사실적 기법에는 뭔가 부조리한 면이 있다. 2017년의 사유적 공간에 나타난 바처럼, 눈앞에 있는 듯이 그려진 말의 몸뚱이에 접힌 종이 자국이 선명하다면, 작가는 미셀 푸코와 르네 마그리트의 대화처럼, ‘이것은 백마가 아니다’라는 언명과 관련된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복제기술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현재, 허망해 보이기까지 한 극사실적 필법은 실제가 아닌 관념을 복제하는 수단이다. 




사유적 공간 545.4x227cm oil on canvas 2015



2015년의 한 작품에는 쫑긋한 귀 때문에 유니콘처럼도 보이는 백마가 있다. 이석주의 작품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이 도상은 사람 못지않은 감정이입의 대상이다. 가령 말의 머리에 바짝 붙어있는 책장이 있는 2017년의 한 작품은 마치 말의 생각이 글자로 쓴 것같은 표현이 있다. 비록 화면상에서 글자는 매우 흐릿하지만 말이다. 2015년의 작품에서 말과 함께 등장하는, 화면의 한쪽 끝은 구겨진 책 한 페이지와 뜯어진 페이지가 있다. 화면과 밀착시킨 인쇄 이미지는 입체파의 빠삐에 꼴레(Papier Colle)가 의도했듯이, 화면의 평면성을 강조한다. 입체파가 빠삐에 꼴레를 통해서 현대미술에 추가한 개념은, 그림은 저편으로 뚫린 창이 아니라, 화면에 직접 덧붙여진 인쇄물같은 평면이라는 것이다. 이석주의 작품에서 캔버스 바탕 면에 일치시킨 페이지는 마치 화면이 떨어져 나가고 있는 듯하다. 마치 하나씩 뜯어내는 달력같은 시공간성이다. 그러나 그의 많은 작품에 등장해왔던 말은 그만큼 늙지 않는다. 


인간은 대개 다른 종(種)의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므로, 만약에 말이 늙었다 하더라도 하얀 머리를 하고 있는 산신령같은 총기(聰氣)를 여전히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석주의 작품에서 백마는 시간으로부터 초월한 상서로운 존재로 다가온다. 요한계시록이 암시하는 바에 의하면, 백마의 주인공은 예수이다. 2016년의 작품에 등장하는 하얀 비둘기 또한 마태복음에 암시하는 대로 성령이 연상된다. 작가가 종교를 가지고 있든 말든 상관없이, 백마나 하얀 비둘기 같은 도상이 가지는 상징은 어느 정도 보편화되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강력한 상징은 하나의 사실처럼 공유되고 소통되고 변형되곤 한다. 전경에 놓인 책들은 그러한 신령한 존재에 비교될 수 있는 가치를 지닐 것이다. 최근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책들은 매우 낡았다. 책들은 시간의 켜를 둘러쓰고 있다. 서사적 과정 뿐 아니라, 한줄한줄 읽어내려가며 한장한장 넘기는 책의 이미지 자체에 시간성이 내재해 있다. 그래서 회화가 공간적 매체라면, 소설은 시간적 매체로 간주 된다.


 

사유적 공간 181.8x227cm oil on canvas 2016



사유적 공간 181.8x227.3cm oil on canvas 2016



2016년의 작품 속 낡은 책과 시계의 조합은 인간적 지식의 상대성을 말해준다. 인간이 등장하지 않은 장면 속에 인간의 흔적을 담고 있는 사물인 책은 영원의 반열에 놓인다. 예술에 관련된 제목이 드러나는 것으로 봐서 예술의 상대적 영원함을 전달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사유적 공간에는 명화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2017년의 작품에는 얀 베르메르의 [우유 따르는 여자](1660)가 등장한다. 무대 밖 타자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일상적 업무에 몰두하고 있는 여자는 여전히 젊지만 낡은 그림표면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잔인하게도 얼룩덜룩하게 변질된 피부가 역력하게 드러나 있다. 화면 오른쪽은 낡은 책의 한 페이지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다가 가운데의 깊은 음영까지 더하여 언뜻 도판이 실린 미술책 같다. 원작가가 예상할 수 없었던, 수백 년 세월의 흔적조차 완벽히 재현해냈어도 그것은 베르메르의 그림에 대한 이미지인 것이다. 


2017년의 사유적 공간에는 카라바조의 [의심하는 도마](1601-1602)가 등장한다. 그 도상은 성서의 내용과 관련된 것으로, 자신의 상처를 직접 만져보게 해서 제자의 의심을 불식시키려는 예수의 행동을 보여준다. 카라바조의 원본이 무대 전경에서 조명을 받는 것 같다면, 무대 뒤편으로 물러나 있는 이석주의 판본은 상처를 후벼파고 있는 행위를 감싸는 부드러운 공기가 특징적이다. 그 아래에는 시계가 놓여 있다. 몇 백 년의 시간 차를 가지는 이 두 명의 화가는 유화의 ‘만져서 알 수 있는 듯한 명백한’(tangible) 특성을 최대한 살린다. 이석주의 작품 소재는 유화의 거장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던 바로크 시대뿐 아니라, 20세기의 회화까지 이른다. 창이나 거울로서의 회화를 거부했던 20세기의 그림은 이전 시대의 것보다 입체감이 덜하지만, 여전히 재현적 형상을 가지고 있어서, 끝말잇기 같은 상상을 촉발시킨다. 2018년의 사유적 공간에는 파울 클레의 작품이, 또 다른 작품에는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이 보인다. 




사유적 공간 388x259cm oil on canvas 2017



사유적 공간 388x259cm oil on canvas 2017



사유적 공간 363.6x227.3cm oil on vanvas 2017



둘 다 낡은 예술 관련 책자가 전경에 세팅되어 있다. 현대미술이 비록 대중들에게는 낯설더라도 그 또한 익숙화 단계를 거치며, 작가는 그러한 작품들을 주로 활용한다.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1942)이 보이는 작품은 마치 이편의 책꽂이 너머로 보이는 저편의 풍경같기도 하지만, 일찍이 현대인의 쓸쓸한 삶을 포착했던 미국화가의 유명한 작품임을 알아볼 수 있다. 호퍼는 현대적 삶의 쓸쓸함을 비추는 빛의 표현에 능했던 화가였지만, 후경에 자리한 탓에 흐릿하게 처리되어 있다. 늦은 밤까지 홀로인 사람들을 비추는 카페의 냉랭한 빛은 이석주의 작품에서는 전경의 책들에 적용되어 있다. 21세기의 화가도 20세기의 정서를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겹의 그림에서 사람 간의 관계가 사물 간의 관계로 이동하는 추이가 감지된다. 호퍼의 작품도 이석주의 작품도, 사람이 부재한 가운데의 빛은 부재의 느낌을 더욱 강조한다. 전경에 낡은 책들은 서로를 기대고 있는데, 인간들은 늦은 밤 카페에서 각자인 인간들과 비교된다. 사유의 공간은 작가가 애호하는 대상들을 무대처럼 배치하고, 각 대상이 가지는 상징들 간의 근접성에서 야기되는 대화적 상상력이 있다. 


사물이 사람을 대신하는 무언극인 셈이다. 그의 사유의 공간은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삶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 세계를 창조한 자의 의도에 맞춰 제자리에 있는, 잘 정돈된 고요한 세계이다. 신비롭게 나타나는 이석주의 작품은 초현실주의를 생각하게 하지만, 초현실주의같은 도상과 도상 간의 과격한 맞딱뜨림은 없다. 이석주의 조합은 왠지 어울리기까지 한다. 그의 그림은 무의식보다는 의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시간이 멈춘듯한 상징의 세계에서 종교나 예술의 비중은 크다. 위대한 저자가 썼을 법한 역작일, 두툼한 책의 이미지도 마찬가지 계열이다. 그것은 많은 시간을 고요한 정적 속에서 작업했을 작가의 상태를 반영하는 듯하다. 물론 그의 작품 속에서 그림이나 책은 시간의 흐름을 숨기고 있지 않다. 그래도 그 시간은 인생보다는 늦게 갈 것이다. 작품 속 베르메르나 카라바조 같은 대가는 그 이미지를 보고 있는 관객의 삶보다 더 길 것이다. 그림 속 그림, 펼쳐진 페이지 속 페이지 같이, 계속 또 다른 창을 내면서 뒤로 사라질 것 같은 겹겹의 세계가 연출되어 있다. 




사유적 공간 454.6x181cm oil on canvas 2018



사유적 공간 259x194cm oil on canvas 2018



이석주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시계는 이러한 공간적 후퇴감에 상응하는 시간의 이미지이다. 그의 작품 속 둥근 시계는 무대의 바닥에도 배경에도 깔리곤 하지만, 지구와 태양을 포함한 만물에 내재 된 시간성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필자가 기억하는 그의 이전 작품에는 시간의 환을 따라 달리는 백마가 있었다. 백마는 보편화 된 상징주의에 따라 부활을 통해 거듭된 시간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둥근 시계는 순환적 시간도 떠올린다. 니체가 노래했듯이, 영원한 회귀의 시간성 속에서 필연적인 것만 되돌아온다. 그의 사유의 공간에서 드러난 필연적인 것의 목록을 보면 다음 생에서도 그는 그림 그리기를 선택하지 않을까. 이석주의 사유의 공간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예술이나 종교적 도상은 필연성의 계열에 속한다. 시간의 축을 따라 대상을 배열하면 확실한 것도 불확실해지며, 불확실한 것도 확실해 진다. 정지된 매체인 회화는 그러한 변화를 기록하고자 한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18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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