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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새로 / 일으켜 세워진 바닥

이선영

일으켜 세워진 바닥

  

이선영(미술평론가)

  

사진은 세계를 재현함으로서 수집하는 유력한 매체이다. 사진기 하나를 메고서 세계 곳곳을 누벼왔던 현새로의 작품에서는 우선 사진의 일차적 기능이 확인된다. 관객은 거기에서 인도나 스페인의 멋진 풍광이나 그곳에만 있는 어떤 소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진가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포획하여 색다른 것을 관객 앞에 가져다 놓는 것이다. 이 단계에 머문다면 그것은 소비이다. 그러나 소비를 넘어서 생산이나 창조로 나아가려면 더 중요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여러 번의 사진전과 책자 발간의 단계에서 현새로의 작품들은 수집의 다음 단계가 분류와 조합, 그리고 맥락화 라는 것을 알려준다. 작가는 영국에서 사진을 따로 공부하기는 했지만, 기술적인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현대인은 크고 작은 인터페이스에서 자기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이어가기 위해 그렇게도 많은 사진을 활용한다. 




Taulet3, 40inch x 40inch, Inkjet print, 2018



Taulet2, 30inch x 30inch, Inkjet print, 2018



그러나 그러한 수단으로서의 사진에 눈길이 오래 머물지는 않는다. 즉 그것은 정보 사업가의 계획대로 소비된다. 의미가 생성될 틈이 없이 보고 폐기되는 과정의 가속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사체와의 관련성이 (상대적으로)확실한 사진은 세계를 보는 창이자 창고라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가령 현새로의 작품에서 사진의 수집은 기능은 바르셀로나의 광장에 있는 조각상이나 오래된 건물 타일들의 면면을 재현한 작품들에 선명하다. 맥락화는 그 위에 여러 과일들을 놓는 작가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다. 과일을 놓음으로서 바닥은 그림처럼 변화했다. 현새로는 이 색다른 배치를 통해 자신이 스쳐지나갔던 공간을 주목하게 한다. 이러한 배치 외에 전시나 책자발간은 또 다른 맥락화이다. 수집 및 재현의 경우 그 전에는 주로 회화가 그러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사진이 등장한 이후, 사람들은 사진이 재현을 통한 수집의 역할을 대신하기에 적당하다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기술과도 밀접하여 빠르게 발전해왔으며 전문성이나 예술성, 대중성을 확대해온 사진은 시각 이미지를 생산하는 보편적 매체가 되었다. 사진이 탄생한 근대에 이미지는 사진으로 급속하게 채워졌고, 인간의 시각 또한 사진적으로 틀 지워졌다. 감시(미셀 푸코) 및 조절(질 들뢰즈)사회와 연계되는 사진적 시각의 편재(遍在)는 정보혁명을 통해 극대화되었고, 앞으로도 인간의 시점을 식민화할 것이다. 사진의 외눈박이(Cyclops) 시점과 육안 사이의 간극은 뛰어난 작가들에 의해서 부분적 해결책을 찾곤 했다. 거기에 있는 것이되, 누가 어떻게 본 것임이 드러나는 이미지가 소중하다. 기술만이 아니라 인생과 자연, 문명 등에 대한 혜안이 결합된 시각에 의해서 말이다. 사진의 약진과 연동되어, 그림은 세계를 재현하는 자신의 역할을 변화시킨다. 그러나 마찬가지의 일이 사진 자체에서도 일어난다. 누구나 찍을 수 있다면 색다르게 찍는 것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Virreina3, 40inch x 40inch, Inkjet print, 2018



Sol1, 24inch x 24inch, Inkjet print, 2018



Placidia 1, 24inch x 24inch, Inkjet print, 2018



Pacidia 2, 30inch x 30inch, Inkjet print, 2018



이 단계에서 사진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회화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것은 그림같은 느낌을 주는 현새로의 작품에도 해당된다. 마을 광장의 조각상이 담긴 작품들이 풍경화라면 타일과 과일 시리즈는 추상회화일 것이다. 한 가지 대상도 수많은 방식으로 찍혀질 수 있다는 사실이 공인된 이후, 사진은 기술을 넘어 예술이 되었다. 사진에 뒤이어 영화 또한 같은 인증절차를 밟았다. 이제 거의 모든 사람이 사진을 찍는다. 그만큼 흔해졌기 때문에 차이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 또한 높아졌다. 색다른 시각은 인생의 많은 우회로를 거친 후 다소간 늦게 사진가의 대열에 합류한 작가들에게서 자주 발견되곤 한다. 영문학을 전공했으나 이후 전공을 사진으로 바꾸고 세계 여기저기에서 살아온 준유목적 삶을 살아온 현새로에게 사진은 가장 친한 친구이자 자신의 일부가 되었을 터이다. 유목적 삶이라고 해서 스쳐지나가는 관광객의 시점은 아니다. 그녀의 주요 작품들은 대개 단기적 정주의 결과물이다. 


특히 인도에서 살았던 4년간 그곳에서 찍은 작품들은 일상과 신성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전시 및 단행본으로도 결실을 맺은 바 있다. 그 시기의 작품 중, 보리수나무 아래의 물가에서 빨래하는 한 여인을 찍은 작품은 일상의 한켠이 영원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작가는 그 작품에서 화면의 반을 그림자 영상에 할애했는데, 이러한 여백은 사진의 단편성을 극복하는 한 방식으로 여겨진다. 사진이라는 단편 아래 보다 포괄적인 무엇을 함께 제시하려는 노력은 최근의 작품에서도 계속된다. 레지던시 근처의 광장에 있는 조각들을 찍은 작품들은 다수가 부분이다. 빛의 조율을 통해 실루엣으로만 드러나 있는 것도 있어 관객이 어떤 정보를 읽기는 힘들다. 작가는 사진이라는 세계를 보는 창을 다소간 불투명하게 운용한다. 공공장소에 있는 조형물이니만큼 무엇인가를 기념하는 상 일 텐데,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서 그러한 정보를 착실히 전달(studium)하는데 인색하다. 




(참고작품) 현새로, 보리수와 여인,30x30inch,2011 (사진출전; 도서출판 길나섬 )



뜬금없는 부분들은 다소간 전형적일 수 있는 기념비의 구성을 산산이 조각내고 작가를 찔러왔던(punctum) 이상한 부분들을 사진으로 들어낸다. 부분은 관객들로 하여금 상상력을 자극한다. 밀로의 비너스의 잃어버린 팔이 그렇듯이 말이다. 어두운 실루엣이 강조된 것들은 공간을 오려 놓은 듯하다. 동상들은 굳어진 몸으로 기념할만한 사건을 전달하기 위한 전형적인 포즈들 취한다. 작가는 눈에 띄지 않는 조연들에게도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한 순간 멈춘 모습들은 그자체가 사진 아닌가. 동상을 찍은 사진들은 어쩌면 동어반복일 수 있다. 어떤 것은 기괴하고 어떤 것은 시적이다. 세월호 사건으로 한국인에게 친숙해진 노랑리본이 걸린 동상은 우리의 익숙해진 서사와 달리 그 장소만의 다른 이야기—독립의 상징이라고 함--를 가지고 있었다. 부분을 전체화하는 방식은 물신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물신의 방식은 현대의 상품사회 전면에 깔려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사실주의 시대에 가능했을 법한 총체화의 시각은 사라져간다. 그러나 단편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단편이 단편에만 머문다면 그것들은 그저 먼지가 되어 우주 저편으로 사라질 것이다. 전체를 포함하는 단편이 중요하다. 단편이자 전체인 포괄적 시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유목만으로도 정주만으로도 안 된다. 현새로는 자신이 던져진 곳에서 작업할 거리를 샅샅이 찾는 스타일이다. 소재를 찾은 후에는 깊이 탐구한다. 올해 여름에 제작된 작품들은 바르셀로나에서의 짧은 레지던시의 결과물들이지만, 새소리를 듣고 깨어난 작가는 하루를 며칠처럼 살았다. 고통스러운 기억도 길지만 즐거운 기억도 길게 마련이다. 작가는 그곳에서 ‘15일 간의 자유’를 온전히 누렸다. 집단의 압박이 심한 한국을 떠나 오직 개인 현새로일 수 있는 상황이 바로 자유였다. 그러한 자유는 영국에서 사진을 공부했던 시기 이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모자이크와 검은체리, 11inch x 14inch, Inkjet print, 2018



모자이크와 붉은체리1, 11inch x 14inch, Inkjet print, 2018



모자이크와 배, 11inch x 14inch, Inkjet print, 2018



사춘기보다도 더 힘든 시기, 갱년기를 온전히 통과해야하는 시점에서 얻은 기회라 더욱 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동안 찍은 작품들을 보면, 자유가 휴식은 아님은 알 수 있다. 작가에게 자유란 휴식이 아니라 몰입이다. 심신의 차원에서 몰입은 노동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소요되는 것이지만, 일상에서 수행하기 힘든 무엇인가를 성취한다는 점에서 고귀하다. 몰입이 정지된 순간 잊혀졌던 피로는 한데 몰려올 것이다. 일상에서의 피곤과 우울은 상당 부분 몰입할 수 없는 상황과 관련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소비생활이나 타인과의 만남에 몰두한다. 그러나 다소간 검소하며 작품에 인간보다는 사물이 많이 등장하는 현새로의 경우 그 전형적인 두 가지 타입의 몰두는 대안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몰입은 ~로부터의 자유가 아닌 ~로의 자유이다. 예술은 후자의 자유가 집중되어온 인간만의 영역이다. 현실에서는 희귀한 자유가 요구되다 못해 필수적인 곳이 바로 예술이다.

 

그에 버금가는 일상 속 실행으로서는 놀이가 있다. 예술은 놀이처럼 몰입을 낳지만 산물 또한 낳는다. 물론 퍼포먼스를 비롯해서 특정한 산물이 없는 예술도 있지만, 이때 사진의 역할은 더욱 필수적이다.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에 떠난 작가에게 몰입을 야기하는 자유는 치유의 과정이기도 했다. 육아에 얽매어 있던 시간들을 작가 스스로 강제로 정지시킨 간만의 해외 일정이 몸과 마음의 병을 단번에 사라지게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새로는 유목민의 자유를 소중히 한다. 자끄 아탈 리가 [유목]에서 말하듯이, 유목민이란 머물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떠남의 자유를 추구한다. 이러한 자유는 네가티브가 아니라 포지티브이다.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것이다. 그저 놓여나는 시공간이 아니라 전에 없던 것을 생성 또는 숙성시키는 시공간이다. 작가는 거기에서 다른 멋진 풍경을 뒤로 하고, 120년 묵은 5층짜리 레지던시 건물의 바닥 타일에 주목한다. 




모자이크와 초록사과, 11inch x 14inch, Inkjet print, 2018



모자이크와 산딸기 11inch x 11inch, Inkjet print, 2018



모자이크와 아보카도, 11inch x 14inch, Inkjet print, 2018



바닥을 주시하는 이들은 대개 우울한 사람들이라고 말해진다. 삶의 중력을 느끼는 자 그 누구도 멜랑콜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슬람의 지배를 받은 역사가 있는 스페인은 눈부신 모자이크 예술의 산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새로가 포착한 타일은 매우 소박한 편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여행 및 유목이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태양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고대의 진리는 초짜 여행객의 시점을 벗어나는 시점에서야 확실해진다. 새로움이 아니라 단지 새로운 배치일 뿐이다. 꽉 막힌 통로를 뚫고 탈주의 흐름을 강조한 철학자 질 들뢰즈는 새로운 배치의 힘을 강조—또 다른 하나는 변신이다—한 바 있다. 스페인에서의 레지던시는 친숙하고 편안하지만 구속과 질곡으로도 다가오는 일상의 여러 관계를 끊고 스스로를 다르게 배치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다. 새로움과 진보라는 근대적 이데올로기를 상대화한다면, 색다른 배열이 탈주일 뿐이다. 


즉 떠나는 것 그자체가 자유인 것이고, 온전한 개인 그자체로 자신을 재발견하는 일이다. 그 지역 사람들에게는 익숙하다 못해 진부할 수도 있는 것이 다른 지역 사람 즉 자신을 다른 곳에 배치한 이들에게는  모든 것들이 새롭게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바닥 타일 뿐 아니라 광장의 조각상도 마찬가지 아닐까. 기념비 조각이란 그것이 조성되었던 최초의 맥락이 사라지면 존재감이 사라진다. 적어도 그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그램 질로크는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에서 벤야민은 ‘모든 문명의 기록은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다’라는 말을 인용한다. 그러한 기록의 대표적인 것은 기념물이다. 그램 질로크에 의하면 ‘기념물은 그 자체를 숭배의 대상으로 제시하고 변함없는 예전의 광채와 업적을 영원히 상기시킨다. 기념물을 이중으로 신화적이다. 기념물은 한편으로 거짓된 역사를 환기시키며 동시에 자신의 영속성을 스스로 선언한다. 기념물을 화석화된 신화’이다. 




Diamant3, 40inch x 40inch, Inkjet print, 2018



Joan Carles2, 30inch x 30inch, Inkjet print, 2018



현새로 또한 벤야민처럼 오래된 도시를 고고학자의 입장에서 거닐었겠지만, 기념물을 재현하는 방식은 신화의 재확인이 아니다. 신화는 부분적 재현이나 그림자같은 모습으로 변화시킴으로 해체된다. 여기에서 공적 기념물은 ‘영속적인 구조가 아니라 일시적인 구조’(그램 질로크)로 나타난다. 사진에 대한 중요한 논문을 쓰기도 했던 발터 벤야민은 도시가 끊임없이 쌓인 과거의 잔해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벤야민은 도시의 기념물에 대해 ‘잊혀진 죽음의 기념물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누군가의 일상은 누군가의 예술이 된다. 극히 드물게는 예술이 일상인 삶도 있을 것이다. 현새로가 찍은 오래된 바닥타일 사진은 따스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작가는 별로 주목할 거리가 없는 평범한 것을 사진을 통해 일으켜 세웠다.  바닥을 찍은 사진은 극적인 위상 변환을 거친다. 그러나 작품 속 타일들은 이국적이라는 것 외에도 작가의 눈에 띌 만한 요소가 있었다. 


그 타일들은 보수한 것도 아닌데 무늬들이 갑가지 바뀌는 부분들이 자주 발견된다. 이질적인 배치의 연결은 자연스럽다. 일률적 원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제각각의 체계를 가진 것들이 공존한다. 전혀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다른 모습으로의 전이가 이루어진다. 작가는 여기에 자신이 즐겨 먹었던 과일들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배치했다. 색다른 배치 위에 또 다른 배치가 이루어진다면, 사진적 선택은 또 다른 배치이다. 마치 작은 바둑판 위에서도 무한한 게임의 수가 전개될 수 있듯이, 작가는 색다른 배치를 즐겨한다. 거기에서는 기하학적인 것과 유기적인 것의 대비, 단단한 것과 부드러운 것의 대비, 평면적인 것과 입체적인 것이 대비되고 더 나아가 문명과 자연이 대비된다. 무기질의 질감과 과일이 결합하면 과일 맛 사탕이 될 수 있듯이, 이러한 대비는 다시 종합될 수 있다. 기하학적 무늬란 자연 및 자연의 리듬이 추상화 된 것이다. 타일을 만들 때 썼던 흙을 비롯한 재료들은 유기물이 썩은 결과물이다. 




아침의 커피



아침을 준비중인 파라솔



작가가 머문 건물이 아니더라도, 스페인의 아름다운 타일들은 수많은 세월동안 사람들의 선택에 선택을 거듭하여 살아남은 것들이다. 그것은 열매가 만들어지기까지 생물체가 격어 냈던 시험들을 생각하게 한다. 거시적으로 보면 문명은 자연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둘 다 역사를 가진다. 물론 문명은 상대적으로 반복보다는 차이에 가치를 두지만, 모더니즘이 상찬하는 급격한 새로움은 없다. 조금씩의 변화가 축적되어 질적 변화가 야기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자연도 마찬가지이다. 구워서 만든 무기질 재료와 유기적인 것의 만남은 접시 위에 놓은 음식, 포도(鋪道) 위에 떨어진 열매 등의 배치도 연상된다. 현새로의 작품 속 배치는 어찌 보면 단순하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과일 한 보따리 사와 머무는 곳의 바닥에 놓은 것일 뿐이다. 작가는 자연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해 자연조명으로 찍었다. 스페인은 유명한 관광지가 많지만, 작가가 머문 곳은 현지인의 일상적 삶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조그만 동네이다.


즐겨 갔던 카페 등을 찍은 사진에는 작가말대로 ‘혜화동의 조그만 동네같은’ 느낌이 살아있다. 낡음의 자연스러움은 그동안 작가가 찍어왔던 여러 장소들의 연속성을 부여해준다. 작가는 거기에서 멀리 가지 않고 갔던 곳을 반복해서 간다. 그러나 갈 때 마다 다른 것을 보며, 다르게 본다. 다르게 보는 시선이 없다면 이 세상이 아무리 넓다한들, 세계는 그렇고 그런 이미지의 집적체에 불과할 것이다. 이미지 홍수의 시대에 그토록 많은 권태가 편재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권태가 잔인함을 낳는다. 선정성과 권태의 적절한 조합 및 상호의존이 현대사회의 일상을 지배한다. 작가의 스페인에서의 일정은 미로처럼 닫혀있으면서도 열려있는 여정이다. 미로를 유목하는 듯한 작가의 여정에서 시간이란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공간 속에 널리 퍼져 있’(자크 아탈리)음을 알 수 있다. 화면 가득히 잡힌 타일과 과일의 결합은 선택과 집중이 강한 소재지만, 다운된 톤의 자연스러움이 특징적이다. 




지와 레지던시의 정원



고양이 펠룻과 함께한 자화상



배치과정의 단촐함은 사물과 사물을 만나게 하는 초현실주의적인 실행을 떠올린다. 사진 자체가 초현실주의와 친숙했다. 시공간의 절편인 사진은 뜻밖의 시각이나 만남을 야기하곤 한다. 꼴라주나 몽타주가 아니라 한 장의 사진에서도 수수께끼는 충만하다. 오래되어 지금은 그 기능이 사라진 사물들도 마찬가지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세기말 세기 초 파리의 시가지를 즉물적으로 촬영한 으젠 앗제의 사진에 열광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현새로의 작품목록은 오래된 것을 따스한 시각으로 담은 것들이 많다. 늘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있는 것들은 변화를 필수로 여기다 못해 강요받기까지 하는 현대인에게 위안을 준다. 그러나 늘 그 자리에 있던 것들 또한 사라질 것이다. 초상사진을 비롯한 모든 사진들은 이러한 사라짐의 기호를 각인한다. 롤랑 바르트나 수잔 손탁같은 많은 사진 평론가들이 사진과 죽음의 관계를 지적해 왔다. 곧 사라질 것들에 작은 기념비를 만들어주는 사진적 행위는 세계와 마주한 주체의 궤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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